70화
“뭔진 모르겠지만, 위험해 보이는데요.”
주원이 이야기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충분히 공격할 수 있던 예나를 대놓고 무시했어. 그렇다는 건 녀석이 노리는 건….’
용주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공격의 시작 지점이 정해져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경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고지를 빼앗긴 데다가 녀석은 위치까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선공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녀석이었다.
사각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란 뜻이었다.
힘으로 맞서는 건 당연히 불가능.
평지에서도 밀렸는데 가속도를 받은 지금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코어로 간다!”
짧고 간결한 말을 내뱉은 용주가 달리기 시작했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가장 크고 강도가 높은 구조물이라고 한다면 바로 저 중앙 코어.
상당 부분이 뜯겨나가 불안하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대응할 여지가 있는 건 저곳뿐이었다.
‘중앙 코어를 방패막이 삼을 생각인가?’
달리는 두 사람을 바라본 예나가 난간을 붙잡았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큰 원을 그리는 녀석을 따라 상대적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돌면 유동적으로 사각을 만들 수도 있었고, 코어의 강도라면 직접적인 타격도 상당 부분 막아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빠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에 나도 뭔가 해야 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던 예나의 눈에 한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용주가 올라탔던 컨테이너.
만약 저걸로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면….
‘크기로 보니 뭘로 보나 훌륭한 무기잖아. 문제는 저걸 어떻게 움직이냔데….’
예나의 시선이 크레인 주변을 살폈다.
조작을 위해 만들어진 다른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여기 어딘가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젠장 어디야.’
생각한 것과 달리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버티야! 좀 더 가까이 가보자! 크레인 근처에 가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달리기 시작한 예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코어에 도착한 두 사람은 괴물과 대칭을 이루며 계속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온다.’
코어를 끼고 돌던 용주가 주원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놈의 다리 근육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실룩거렸었다.
콰앙!
콰지지직!!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로부터 정확히 3초 뒤.
소리를 따라온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고, 부서진 코어의 파편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입은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다.
코어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주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뛰쳐나간 용주는 검을 왼손으로 넘겼다.
6번 개체는 코어에 박힌 손톱을 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정도의 지능은 겸비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든가.
‘할퀴기.’
결정화되는 붉은 피.
총 10의 HP를 지불한 용주는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왼발의 눈.
손톱 끝으로 전해지는 질감은 확실히 단단했다.
하지만.
촤악!!
용주의 손톱은 확실하게 녀석의 동공을 찢어 놓았다.
속도를 죽이지 않은 용주는 그대로 놈의 아킬레스건을 타고 올랐다.
뒤이어 이어지는 두 번째 공격.
반대편 다리로 도약한 용주는 오른쪽 무릎에 자리한 또 다른 눈을 찢어 놓았다.
순식간에 두 개의 눈을 잃은 6번 개체는 오른 다리를 힘껏 휘둘렀다.
반동에 공중으로 날아간 용주의 눈앞에 있는 건 네 개의 팔과 스무 개의 손톱이었다.
“용주 형!”
주원의 다급한 외침 속에 용주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이 상황에서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사후 강직!’
몸으로 받아내는 것.
“용주 오빠!!”
전속력으로 달리던 예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예나의 검은 어떻게 해서든 용주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지만,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치명적인 일격은 무저항 상태의 용주에게 그대로 직격했고, 용주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예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잠깐만 날아가?
그런 예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용주는 분명 베였다.
저런 식으로 베였다면 분명 엄청난 양의 출혈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출혈량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날아가는 각도 또한 이질적이었다.
저건 마치 야구 배트에 맞은 야구공이 날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저렇게 날아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뭔가 또 다른 스킬이 있던 건가?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움직일 수 있었다.
‘큭…!’
사후 강직의 효과로 치명상을 막아낸 용주는 바닥에 내리꽂혔다.
제대로 된 낙법은 칠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관절이 그렇게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세 번의 물수제비를 뜬 용주의 몸은 그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목이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세로 착지했지만, 다행히도 타격은 크지 않았다.
‘다행히 치명상은 피했군.’
어깨며 가슴이고 할 거 없이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하지만 몸에 남은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해봤자 커터칼에 긁힌 정도.
작은 상처라도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용주에겐 귀여운 수준이었다.
▷ ‘할퀴기’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4 → Lv.5)
▷ ‘사후 강직’의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2 → Lv.3)
“용주 형, 괜찮아요?!”
다급하게 달려온 주원이 물었다.
‘괜찮냐’라는 물음 자체가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긴 했다.
물어볼 시간이 있다면, 지혈하고 빨리 의료 헌터를 부르는 게 맞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주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한 용주는 코어를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6번 개체는 다시 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같은 공격을 또 한 번 시도할 모양이었다.
“어떻게, 저지할 수단이 없을까요?”
용주와 속도를 맞춘 주원이 물었다.
같은 패턴이 또 한 번 반복된다고 하면 반격하는 건 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놈이 같은 실책을 범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다른 눈들이 위치한 곳은 방금 베어 낸 곳들보다 더 까다로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용주의 시선은 삐딱하니 위를 향해 있었다.
용주가 보고 있는 건 6번 개체가 아닌 예나.
버티와 함께 달리고 있는 예나는 점점 크레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쪽에 뭔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용주는 예나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어린아이인 척 연기하고 있지만, 예나는 엄연한 헌터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녀가 충분히 유능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저 위에 단서가 있다면, 분명 그녀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크레인 아래에 도착한 예나는 크레인을 살펴 보았다.
크레인을 조종하는 레버는 별도의 장치 없이 크레인 자체에 달려 있었다.
‘이걸 움직일 수만 있으면….’
크레인이 움직일 수 있는 각도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격추를 노려볼 수 있었다.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녀석을 정확한 타이밍에 노릴 수 있느냐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이 크레인을 어떻게 움직이냐 하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문제인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첫 번째 문제는 오로지 자신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근데 이거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장치를 발견하긴 했지만 어딜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러 경험을 해본 예나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움직여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감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어.’
예나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버티는 레버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위쪽까지 날아온 코어의 잔해는 평평한 게 발판으로 쓰기 딱 좋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발판에 올라간 예나는 레버를 움직였다.
딱 봐도 움직이는 데 쓰일 법한 레버였건만 반응은 하지 않았다.
‘혹시 시동이 꺼져 있는 건가?’
예나는 이것저것을 눌러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버튼이 많은 거야?! 쓸데없게!’
성질을 부린 예나의 뒤로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놈은 다시 속도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움직이라고!!’
주먹을 움켜쥔 예나가 버튼들을 내려쳤다.
덜컹!
순간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켜진 거야?!’
놀란 예나는 다시금 레버를 움직였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다.
크레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야. 방금 분명 뭔가 반응이 있었단 말이야.’
예나는 방금 내려친 부근에 있던 버튼들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그리고.
덜컹!
그중 하나를 누르자 아까와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이건가?’
예나는 다시금 레버를 움직여 보였다.
결과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누른 예나가 다른 버튼을 함께 눌렀다.
형형색색의 빛이 돌기 시작한 조종 레버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불이 들어오자 몇몇 버튼들에 대한 간단한 문구들이 나타났다.
대략 전원, 조명, 투하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엔 진짜 켜진 거야?’
레버를 움직이기 위해 예나가 손을 떼었다.
변화를 느낀 건 그때였다.
예나가 손을 뗌과 동시에 들어왔던 불이 꺼져 버렸다.
‘이거 설마….’
처음 눌렀던 전원 버튼을 다시 한번 누른 예나는 다시금 조명을 켰다.
전원 버튼에서 손을 뗌과 동시에 불은 다시금 꺼져 버렸다.
‘전원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야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누가 대체 어떤 정신머리로 이런 설계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작동 방식을….
하지만 그게 현실이란 걸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쨌든 방식은 알아냈어.’
버튼을 누른 상태로 예나는 레버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점이 예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상태론 레버가 닿지 않았다.
어른 사이즈로 설계된 구조는 예나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버티! 와서 이것 좀 눌러줘!”
급하게 버티를 부른 예나는 그제야 손을 뗄 수 있었다.
버티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크레인을 조작하는 레버는 크게 세 개였다.
하나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레버.
다른 하나는 좌우로 이동할 수 있는 레버.
마지막 레버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레버였다.
예나는 우선 높이를 조금 더 높였다.
크레인에 딸려 올라간 컨테이너는 이제 놈과 완전한 수평이 되어 있었다.
‘됐어. 다음은….’
예나는 크레인을 좌측으로 최대한 당겼다.
중립 기어에 놓인 속도를 대략 추정할 수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생각해. 괜찮아. 나라면 성공시킬 수 있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북돋워 준 예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달리는 놈의 속도와 크레인의 속도.
거기에 붙을 가속력까지 계산해야만 했다.
누구에겐 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예나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역량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만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역량으로 그 모든 걸 계산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계산으로 안 된다면, 감으로라도 성공시켜 보이고 말 테니까.
‘아직… 아직이야.’
예나가 한 번 더 기다렸다.
놈이 바로 뒤를 내달리는 순간에도 예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때가 왔음을 직감한 예나는 두 개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크레인은 점점 더 빨라졌고, 그로 인해 컨테이너가 비스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그리고.
쿠콰앙!!
컨테이너는 정확히 6번 개체와 충돌했다.
컨테이너의 모서리는 정확히 놈의 목과 가슴 사이를 찢고 있었다.
충격에 버티지 못한 컨테이너는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이내 파편이 되어 흩뿌려졌다.
“크와앙!”
막대한 타격을 입은 건 6번 개체도 마찬가지였다.
크레인의 진행 방향대로 날아간 녀석은 바닥에 처박혔고, 자신이 파괴했던 코어의 잔해를 한 번 더 산산이 조각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