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으… 제발 부탁이니까. 용주 형이랑 붙여주세요.”
순서를 기다리던 주원이 혼자 소원을 빌었다.
멀게만 보였던 순서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엄청 신뢰받고 있네, 소년?”
주원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던 조커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용주는 딱히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이 있는데, 한번 해볼래?”
주원이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던 조커가 물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 이번에도 주사위 던지는 건가요?”
“아니. 이번에 보여줄 마술은 이거야.”
조커가 두 손을 교차시키며 안쪽으로 말았다.
부채춤을 추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의 손이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그의 손에는 수많은 트럼프 카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트럼프 카드?”
“자, 보다시피 이건 아무런 속임수도 없는 평범한 카드야.”
능숙하게 카드를 돌린 조커가 카드의 앞면을 보였다.
“소년은 이제부터 여기서 세 장을 뽑으면 돼. 뽑은 카드는 뒷면인 채로 그대로 들고 있고.”
“세 장? 그게 다인가요? 그걸로 정말 소원이 이뤄지는 거예요?”
주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그런 걸로 소원이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답은 카드가 알려줄 거야.”
“그런가요….”
미심쩍은 표정의 주원이 카드 석 장을 골랐다.
“이제부터 내가 셋을 셀 거야. 내가 셋을 세고 나면 소년이 마음속으로 셋을 더 세고, 카드를 뒤집어. 이해했지?”
“셋을 세고, 거기에 셋을 더! 음음! 이해했어요.”
“좋아. 그럼 센다. 하나… 둘…셋!”
이해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주원은 셋과 동시에 카드를 뒤집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공포탄에 뛰쳐나간 경주마 같았다.
“아….”
한발 늦게 실수했단 걸 깨달은 주원은 조커를 바라보았다.
조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주원은 카드를 바라보았다.
무작위로 뽑은 세 장의 카드.
세 장은 모두 하트 8이었다.
“하트 8이 3장…?”
주원이 놀란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많은 카드 중에 하필 똑같은 카드가 3장 있었고, 그 3장을 다 뽑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확률이었다.
“어때? 카드가 알려준 답이 들렸어, 소년?”
미소를 지어 보인 조커가 손을 접자 카드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카드는 물론이고, 주원이 들고 있던 카드까지 몽땅 말이다.
“그럼, 먼저 실례.”
차례가 온 조커는 먼저 공을 뽑았다.
그가 뽑은 공은 38.
예나와는 다른 번호였다.
“자, 드디어 내 차례! 그럼 어디, 어디!”
크게 심호흡을 한 주원이 함 안에 손을 넣었다.
“이거야!! 너로 정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주원이 공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가 뽑은 번호는 8.
예나와 같은 번호였다.
“크크큭! 이야! 이거 완전 대박.”
“꼬맹이에 바보 파티라니, 벌써 빵 터지네. 저기 한 자리 아직 공석이지?”
“응. 누군진 몰라도 같은 조에 걸리는 사람 불쌍해서 어쩌냐? 자동 탈락 수준인데.”
주원이 번호를 뽑자마자 여기저기서 조롱 섞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아…. 편식은 안 하는 편이긴 한데 저긴 좀….”
“두 사람 다 잘은 모르지만, 썩 정상적인 팀일 것 같진 않네.”
아직 번호를 뽑지 않은 헌터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8이에요! 8! 확! 하고 뽑아 버리라고요!”
추첨을 끝낸 주원이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함에 다가간 용주는 차분하게 공 하나를 꺼냈다.
공에 적힌 숫자는 8.
주원과 같은 것이었다.
“나왔어. 마지막 8.”
“연속해서 8이 나오다니, 쟤도 참 운도 없다.”
“저 사람 근데 그 사람이잖아? 좀비 헌터.”
“꼬맹이, 바보, 좀비라니. 시험 내용이 뭐든 간에 저긴 100% 탈락이네. 하나 밑에 깔고 가면 되겠어.”
“셋이 같이 밥 먹던데, 완전 복선이었잖아?”
“다행이다. 저 팀은 피해 갔어.”
8번 팀의 마지막 멤버가 확정되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술렁댔다.
“이얏호! 같은 팀이네요! 같은 번호라고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용주의 번호를 확인한 주원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이게 가능한 확률인가?’
숫자를 확인한 용주는 공의 다른 부분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앞선 사람 중 아무도 8을 뽑지 않을 확률.
거기에 연속해서 8이 나올 확률.
확률상 있을 수 없는 확률은 아니지만, 이게 동시에 일어났다는 게 영 미심쩍었다.
그것도 안면이 있는 주원과 예나와 한 팀이 되었다는 부분에서 더더욱.
“오빠들이랑 한 팀이라니, 뭔가 굉장한 우연이네요.”
기다리고 있던 예나가 두 사람을 반겼다.
추첨이 끝난 헌터들은 정확히 50개의 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게. 나도 신기해!”
8이라고 적힌 문 앞에 선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3인 1조로 무슨 시험을 치르려는 걸까요? 이 방 안에 뭔가 있단 거겠죠?”
예나가 하얀 문을 두드렸다.
“뭐가 나오든 파이팅이야! 반드시 통과하자고!”
“통과하자고요.”
나름의 호응을 한 예나는 용주를 바라보았다.
“오빠도 같이해요. 우리 무시한 사람들한테 한 방 먹여주자고요.”
용주에게 바짝 다가온 예나가 일방적으로 주먹을 부딪쳤다.
“…그래”
용주가 짧게 대답했다.
영 찜찜한 감이 있었지만, 던져진 주사위였다.
뭐가 기다리고 있던 떨어져 줄 생각은 없었다.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갔나?!”
가벼운 인사를 나눌 정도의 시간을 추가로 준 형만이 외쳤다.
“네!”
“너희들은 이제 할당된 공간으로 이동될 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곳에서 탈출해라. 제한 시간은 3시간. 그 안에 탈출해 이 자리로 돌아오면 합격이다. 카오스 게이트라고 생각하고 임해주길 바란다.”
“자… 잠깐만요. 할당된 공간이라니, 거긴 뭐가 있는 거죠?”
“곧 알게 될 거다.”
“곧 알게 될 거라니….”
“안에 대체 뭐가 있길래.”
알 수 없는 공포에 헌터들 사이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말했다시피 모두가 쭉정이라면 전부 걸러질 거다. 행운은 없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실력을 갖춘 자들뿐이다.”
형만이 백색 함이 놓여 있던 곳으로 이동하자 밝은 조명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으…! 뭐야!”
“눈부셔!”
눈 뜨기도 힘든 조명에 헌터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봐, 애송이.”
그사이에 위치를 옮긴 형만이 한 사람의 귀에 속삭였다.
감지 않은 조커의 눈동자는 형만을 보고 있었다.
“질 나쁜 손재주로 놀 생각이라면, 좀 더 신중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사전에 합의된 위반 수칙이 있었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거다.”
“후후훗,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하도록 하지요.”
형만의 겁박에 조커가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형만을 제외한 모든 헌터들의 모습은 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으… 안 보여! 앞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요!”
밝은 섬광에 눈을 가린 주원이 허우적거렸다.
“용주 형, 도와줘요! 제 눈이 어떻게 된 것 같아요!”
허우적거림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어떻게 된 건 눈이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작은 한숨을 삼킨 용주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어린아이 쪽보다 어른아이 쪽이 더 애처럼 보였다.
“아…. 응?”
그제야 눈을 뜬 주원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눈동자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오빠, 완전 어린애네요? 그치, 버티?”
주원을 빤히 보고 있던 예나가 이야기했다.
“아하하핫! 뭐, 그럴 수도 있지.”
겸연쩍은 듯 웃어 보인 주원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치 어느 고성 내부처럼 보였다.
바로 앞엔 천칭을 들고 있는 천사 조각상이 있었고, 2층으로 이어지는 중앙 계단이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1층엔 총 5개의 루트가 보는데, 그중 하나는 출입구처럼 보였다.
창문의 존재를 확인한 주원은 곧장 창으로 달려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불타고 있는 도시와 경찰차의 모습이었다.
“불! 불이에요! 도시가 불타고 있다고요!”
“진정해라. 실제가 아니란 거 봐서 알잖아.”
용주가 다급하게 외치는 주원을 진정시켰다.
“아… 그렇죠.”
“오빠, 저도 볼래요. 저도 보여줘요.”
예나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오케이. 나만 믿어.”
주원이 어깨를 내줬다.
목마를 탄 예나는 바깥의 풍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가짜라고 해도 잘 만들었네요. 진짜라고 해도 믿겠어요.”
빌딩의 옥상까지 살핀 예나가 이야기했다.
“그렇지? 완전 신세계라니까. 가상 현실이잖아, 이거 완전. 방 탈출 카페랑은 비교가 안 된다고.”
두 사람이 창가를 살피는 사이 용주는 문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바깥쪽에서 잠겨 있었다.
손잡이에 열쇠 구멍은 없었다.
대신 문에 세 가지 홈이 파여 있었다.
‘안쪽에 있는 단서들을 이용해 뭔가를 찾아서 여길 탈출해라. 그게 미션인 건가?’
제한 시간은 3시간.
절대 여유 있는 시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단은 흩어져서 단서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했으니, 충분히 주의하면서 살피는 게 좋을 거다.”
놀러 온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에게 용주가 이야기했다.
“잘 들었지?”
“그럼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을 먼저 찾고, 먼 곳은 순차적으로 돌아보자는 게 내 생각이다. 일단 시야가 확보된 여기라면 위험도 상대적으로 알아차리기 쉽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바로 지원을 요청할 수 있을 거다.”
주변 상황을 분석한 용주가 체계적으로 이야기했다.
‘호오?’
용주의 이야기에 예나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역시 진국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누구랑 달리 엄청 믿음직스럽네요. 안 그래요?”
“응응! 엄청 믿음직스럽지. 비교당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하핫!”
호탕하게 웃어 보인 주원이 예나를 내려주었다.
“그럼 전 이쪽을 찾아볼게요!”
“그럼 저랑 버티는 저쪽.”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 두 사람이 각자 방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용주는 두 사람이 보고 있던 창을 바라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새까만 밤과 그에 대조되는 화염.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지만, 꺼지거나 번져 나가지는 않았다.
타고 있는 건물이나 경찰차도 마찬가지.
불꽃은 흔들리고,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15분 뒤.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각자가 찾은 것들을 꺼내놓았다.
“제가 찾은 건 이거예요. 못이랑 망치. 그리고 나무판자 몇 개랑. 아직 뜯지 않은 새 물감통이요.”
“저는 못생긴 인형 하나를 찾았어요. 머리가 엄청 크고 목은 없는 무서운 인형이에요.”
두 사람이 찾아온 물건들을 확인한 용주는 자신이 발견한 걸 보였다.
용주가 찾은 건 낡고 헤진 누군가의 일지였다.
“엄청 지저분한 책이네요.”
“안엔 뭐라고 적혀 있어요?”
용주는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xx년 x월 x일.
하루 종일 맑았다. 늦은 저녁 비가 옴.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도시가 불타고, 비명이 난무한다.
출동한 인원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세상의 종말을 보는 느낌이 든다.]
[xx년 x월 x일.
경찰서 문을 걸어 잠갔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바깥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린다.
난 문을 열지 않았다.
공포가 밀려온다.
동정심도 사명감도 정의감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경찰서? 여기 경찰서였던 건가요?”
두 개의 페이지를 읽은 주원이 물었다.
“중요한 부분이 거기?! 오빠 독해력이 엄청나네.”
순간 필터링도 없이 원래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문장 중 저기에 집중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었다.
“하핫! 보통이지!”
“칭찬 아니거든요!”
묘하게 죽이 맞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용주는 일지를 덮었다.
“일지의 페이지는 여기서 끊겨 있다. 이 사람이 어디 있는지,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역시 지금은 알 수 없어. 하지만 여기 적힌 다른 일들은 대부분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용주는 일지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일지엔 찢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보다시피 일지엔 찢긴 부분이 있다.”
“그렇다는 건 일지의 다른 페이지를 찾으면, 정보를 더 얻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래”
곧장 이어지는 정확한 지적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추리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 평범한 초등학생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른 일지라는 건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요?”
주원이 물었다.
“여기 없다면 다른 곳에 있겠지. 기록한 자의 유해나 유골 역시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가보지 않은 곳이라 하면….”
주원이 복도를 바라보았다.
네 개의 문 중 세 개는 잠겨 있는 걸 확인했다.
2층에도 역시 출입구가 여럿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두 잠겨 있었다.
잠기지 않은 건 한 군데.
선택지는 그곳뿐이었다.
“그럼 이것들은 어떡할까요? 제자리에 갖다 놓을까요?”
자기가 가져온 것들을 가리킨 주원이 물었다.
“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쓸모없어 보이는 것 하나까지도 다 어딘가 쓸 일이 있을 거야.”
주원의 바보 같은 물음에 곧장 대답한 예나는 급하게 말을 멈췄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죠, 오빠?”
용주를 바라본 예나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잠시 동안 말을 아끼고 있던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연기를 하고 있지만, 이 녀석,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