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오빠들은 서로 아는 사이에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요?”
문어 모양으로 잘린 비엔나소시지를 한 입 깨문 예나가 물었다.
헌터니 뭐니 해도 예나가 고른 메뉴들은 딱 초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뿐이었다.
“엄청 오래됐지! 한 6시간 정도?”
자신감을 표했던 주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6시간? 그게 오래예요?”
예나가 똘망똘망한 두 눈을 깜빡였다.
“아아,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내가 잘못했어. 그냥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자신을 향한 예나의 시선에 주원이 곤란함을 표했다.
왠지 자신이 엄청 큰 죄를 저지른 것만 같았다.
“음~ 그럼 오빠들도 여기서 처음 본 사이라는 거네요?”
“뭐, 그렇지.”
“저 오빠는 아까부터 말이 별로 없던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예나가 용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입이 무거운 타입이긴 해.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도 꽤 특이한 타입이야.”
“…….”
자신에 대한 주원에 평가에 용주는 생수를 병째 입에 물었다.
특이한 타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영 묘했다.
“그럼 오빠는 왜 저 오빠랑 같이 있어요? 헌터라면 여기 엄청 많잖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음… 글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생명의 은인? 생각보다 엄청 거창한 말이 나오네요.”
“아, 그런가? 그럼 꿈의 수호자?”
“똑같은 높이에서 옆으로만 이동한 것 같은데요. 옆그레이드라고요.”
오히려 황당하단 표정을 지은 예나가 닭강정을 오물거렸다.
예나의 반박에 주원은 호탕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라? 오빠, 입에 뭐 묻었어요.”
입안에 든 걸 삼킨 예나가 이야기했다.
“어? 어디? 여기? 아니면 여기?”
주원이 양쪽 입꼬리를 쓸어내렸다.
“아니, 오빠 말고요.”
주원을 한쪽으로 치워 낸 예나는 용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용주의 입꼬리를 쓸어내렸다.
“자~ 됐다! 이제 깨끗해졌어요.”
예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용주의 젓가락은 잠시 멈춰 있었다.
“무서운 눈…. 제가 방금 뭐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건가요?”
용주의 눈빛에 예나가 물었다.
살짝 얼굴을 터치했을 때, 용주의 눈은 결코 어린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럼, 그럼. 다음부턴 먼저 말로 알려준 다음에 휴지로 닦아주도록 해. 그렇게 밥 먹던 손으로 닦아주지 말고.”
용주 대신 대답한 주원이 예나의 입을 닦아주었다.
“킥킥, 야! 방금 봤어?!”
세 사람 옆을 지나간 헌 헌터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말해 뭐해. 좀비에 바보에 초딩. 완전 삼위일체네, 삼위일체.”
“저 드림팀은, 야, 짜라고 해도 짜기 힘들겠다.”
“끼리끼리 노는 거지. 옛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둘이었을 때도 들었던 비아냥거림은 셋이 돼도 여전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 * *
“그럼, 오빠들 고마웠어요.”
짧지만은 않았던 식사시간.
식사를 마친 예나가 곰 인형의 손을 흔들었다.
“2차 시험도 파이팅하는 거야! 자! 따라해 봐! 파이팅!!”
예나의 접시를 대신 치운 주원이 세상 떠나가라 소리쳤다.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자세까지 더해진 주원의 모습은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파… 파이팅이에요. 오빠.”
소박한 호응을 한 예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당돌하고 씩씩한 꼬마네요.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로요.”
용주에게 다가온 주원이 이야기했다.
잠깐 같이 있었을 뿐인데, 다른 헌터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보호자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부모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요. 저런 어린아이가 위험한 카오스 게이트에 드나든다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나중에 큰코다칠 거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던 용주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래요?”
“녀석도 조건을 충족한 헌터란 소리다. 2차 시험 내용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도 분명한 경쟁자다.”
짧은 대답을 마친 용주는 걸음을 옮겼다.
2차 시험 시작까진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들어오는 길에 복도에 자판기가 있는 게 보였었다.
수정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직접 만나 보신 소감은 어떠셨나요, 아가씨?”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조커가 물었다.
기둥 뒤편에는 혼자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다른 헌터들이 근처에 있었지만,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두 사람은 관심 밖이었다.
“숫자 8이 나온 사람 같지는 않았어. 사람이 착하긴 한데, 뭐랄까…. 좀 모자라 보인다고나 할까? 솔직히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셨군요. 숫자 8이 나온 다른 헌터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헌터를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같이 있는 다른 한쪽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거든.”
예나가 용주의 눈을 떠올렸다.
“네가 왜 좋은 눈을 하고 있다고 말했는 지 알 것 같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경계하고 있더라고. 자신을 최대한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어.”
“하핫! 그러셨습니까?”
“그렇다고 어리다고 날 무시하던 사람들처럼 군것도 아니야. 그 사람은 내 말에 전부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동등한 한 사람의 헌터로서.”
“아가씨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말입니다.”
“그거 무슨 의미야?”
“아가씨의 귀여움에 넘어오지 않는 희귀한 타입이란 뜻이었습니다.”
“정말 그거 맞아? 어쩐지 나 놀리는 거 같은데….”
“하핫,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뾰로통해진 예나의 반응에 조커가 웃음을 삼켰다.
“그럼,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다음 시험이 만약 팀전이면 두 사람이랑 붙게 해줘. 경쟁자로 두는 것보단 아군으로 두는 게 유리할 것 같거든. 아…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해 두는데 집사랑 같은 팀이 되는 건 최후의 방법이야. 집사 도움 없이 합격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그렇게 기획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뭐… 이미 이렇게 하는 시점에서 도움을 드린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걸음을 뗀 조커는 먼저 자리를 떴다.
시계는 이제 약속했던 2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 * *
시간이 되자 다시 한번 문이 봉쇄됐다.
난리통에 부서졌던 출입문은 수리를 마친 상태였다.
“시작되려나 본데?”
“뭘까? 이번에는?”
헌터들의 술렁거림이 일었지만, 감독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왜 아무도 안 나와?”
“혹시 벌써 시험이 시작된 게 아닐까? 뭔진 모르겠지만, 뭔가를 테스트 하고 있는 거지.”
“문제도 안 알려주는 시험이 세상에 어디 있어?”
“CCTV 같은 거라도 어디 있는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글쎄….”
핸드폰을 연 용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계획되었던 시간은 벌써 15분이나 지체되어 있었다.
그 뒤로도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그리고 약 30분이 더 흘렀을 때.
무대 위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대 위에 선 이는 다름 아닌 형만이었다.
“진행에 차질이 생긴 점 사과하겠다.”
무대 중앙에 선 형만이 이야기했다.
“샐러맨더?”
“근데 아까 2차 시험은 감독관이 바뀐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주시죠!”
형만에 재등장에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형만은 잠시 말을 아꼈다.
분위기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정대로라면 2차 시험의 진행과 감독은 내가 아닌 다른 A급 헌터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급하게 계획이 변경되었다. 이번 2차 시험 역시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형만이 이야기를 재개했다.
형만의 이야기에 용주는 눈썹을 기울였다.
사전에 준비했던 일정이 당일,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뒤집히다니….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문이었다.
“감독관 변경?”
“뭐지? 지각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잠수?”
“A급 헌터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네.”
형만의 한마디에 또 여러 이야기들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면 감독관 변경이 아니라 시험 자체가 연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당당하게 전면으로 나선 한 인물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저 사람은….”
“윤현…. 윤현이잖아?”
“윤현이라면 그 남자 아이돌?!”
“정말이네!”
“대~박! 아이돌 중에 헌터가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없다고!”
윤현의 등장에 장내가 또 한 번 술렁였다.
“감독관이 바뀌었다는 건 평가 기준과 관리, 기타 등등의 모든 부분에서 차질이 생겼다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일정을 미루시죠. 그게 훨씬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윤현이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탈락할 사람이 붙고, 붙을 사람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잖아.”
“공정하지 않지. 그건.”
제법 많은 수의 헌터들 역시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은 분명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연기는 없다. 시험은 그대로 진행된다.”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이군요.”
“감독관이 바뀌었다 한들 시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 역시 불변하며, 정확하다. 연기할 이유는 없다고, 주최 측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여전히 합리적이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상부의 결정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쿨하게 물러나는 윤현의 모습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멋졌어요!”
“이야, 역시 연예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 빛이 나잖아.”
자리로 돌아온 윤현은 선글라스를 집어넣었다.
더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2차 시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사전 준비를 진행하겠다.”
고개를 돌린 형만은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다.
또다시 작동된 네 개의 장치는 풍경을 또 한 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번에 변화한 풍경은 여전히 실내였다.
다만, 수많은 문들이 자리한 밀폐된 백색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이 원래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임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백색 공간의 중앙엔 백색의 함이 놓여 있었다.
“너희들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함에서 공을 하나씩 뽑는 거다.”
“공?”
“그렇다. 그 안에 든 공은 총 150개. 숫자는 총 50까지 적혀 있다. 2차 시험은 3인 1조로 진행된다.”
형만이 백색 함을 가리켰다.
“3인 1조?”
“아니! 잠깐만요! 혹시 내가 잘해도 다른 누군가가 잘못하면 함께 탈락하는 그런 구조인 건 아니겠죠?”
“말도 안 돼요! 만약 운이 없어서 이상한 놈들이랑 만나면 억울하게 탈락하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 연대 책임은 좀….”
2차 시험 진행이 개인전이 아니란 게 알려지자 일부 헌터들 사이에서 불만이 일었다.
“응하고 싶지 않으면, 응하지 않으면 된다. 포기하려는 애송이를 막을 생각은 없다.”
“…….”
연대 책임이란 부분에 대해 형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말에 불만들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칫…! 하는 수 없지.”
혀를 찬 한 헌터가 함에 손을 넣었다.
숫자를 확인한 헌터는 모두를 향해 공을 들어 올렸다.
“난 35야! 35 뽑은 사람들은 나한테 오라고! 35번 문 앞에 있을 테니까!”
한 명이 출발선을 끊자 나머지 헌터들도 줄을 서기 시작했다.
진행 요원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팀플레이인가….’
용주가 한숨을 삼켰다.
딱히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태영과의 협력 때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적었지만, 다른 헌터들을 상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형만의 말대로 응하지 않는다면 탈락할 뿐이었다.
“저희도 서죠.”
주원과 용주가 줄을 선 건 중간보다 약간 뒤 정도였다.
두 사람 앞에는.
조커가 있었다.
“이게 누구야. 금발 소년이랑, 차가운 눈의 소년이잖아. 두 사람 다 무사히 1라운드를 통과한 모양이네.”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조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와, 조커 형도 합격하셨네요! 여기서 다시 보니 엄청 반가운걸요!”
“후후, 내가 언제부터 조커 형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반가워.”
“분장 하나도 안 지워지셨네요. 쉬는 시간에 새로 하신 거예요?”
조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주원이 물었다.
뛰든 걷든 1차 시험에서 땀이 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뭐, 그렇지. 잘 지워지진 않아도, 지저분해진 피에로는 보기 흉하니까.”
조커가 대답을 끝낸 그때.
헌터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꼬맹이 헌터는 8이네.”
“8은 아직까지 아무도 안 나왔었지?”
“아, 저 숫자만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어린아이는 질색이라고.”
“불리하지. 음… 탈락 1순위야.”
소란의 원인은 예나.
추첨을 마친 예나는 쿨하게 뒤돌아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