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애송이처럼 술렁거리지 마라.”
형만의 한마디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 자리는 D급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는 인원을 추려내기 위한 자리다. D급 헌터들은 너희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목숨을 잃는 곳이 바로 D급 게이트다. 그만한 역량과 배짱이 없는 자는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인 형만은 헌터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형만의 겁박에 자리를 뜨는 헌터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번에 너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해주도록 하겠다.”
형만의 이야기가 재개되자 모서리에 있던 네 개의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뭐야 저게?”
“내 눈이 어떻게 된 건가?”
뭔지 모를 장치들이 작동하기 시작하자 헌터들 사이에서 또다시 술렁거림이 일었다.
평범했던 강당의 모습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모퉁이부터 잠식해 나가기 시작한 풍경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고, 형만이 서 있던 무대의 뒤편은 거대한 터널이 되어 있었다.
“이거… 완전 카오스 게이트 내부 같은데요?”
완전하게 바뀌어 버린 풍경 속에서 주원이 이야기했다.
용주가 보기에도 이건 카오스 게이트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어쩌면 흉내 낸 것 이상일지도 모르지.’
용주는 네 개의 장치가 있던 방향들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모습을 덧씌우는 정도라면,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드 차원에서 준비한 시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건가?’
용주가 진짜 놀란 부분은 형만의 뒤편에 생긴 저 공간.
어떤 기술적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저건 물리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너희가 할 일은 간단하다.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짧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끝마친 형만은 길을 내어주었다.
“앞으로 가라고?”
“그게 시험 내용의 전부입니까?”
몇몇 헌터들이 곧장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에 돌아온 대답은.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가만히 있다가는 전부 탈락할 거다.”
딱 한마디뿐이었다.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체력 테스트 비슷한 거면, 자신 있지. 1등은 내 거라고!”
“웃기는 소리! 마라톤 선수였던 날 두고 어디서!”
가볍게 몸을 푼 일부 헌터들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설마 선착순으로 인원을 추린다거나 하는 그런 건가요?”
“그런 거라면 꾸물거릴 시간 없지!”
“겨우 이런 걸로 탈락할 수야 없어!”
선발대의 출발에 다급해진 헌터들 역시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그런 걸까?’
다른 헌터들의 호들갑 속에서 용주는 생각에 잠겼다.
용주가 생각하기에 이 시험은 어딘가 이상했다.
일단 목적 자체가 불분명했다.
체력이나 스피드, 지구력을 테스트하는 거라면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일정 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거나 하는 조건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에서 그러한 것들은 제시되지 않았다.
시험의 내용은 오로지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걸로 과연 무엇을 측정하려고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이 상황을 성공 조건도, 제한 시간도 없는 퀘스트라고 가정한다면….’
용주는 만약 퀘스트 게이트에서 이런 문구가 나타났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다른 단서 없이 확대 해석 하는 걸 지양했을 것이다.
일차적인 목적은 실패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닌,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경쟁을 부추기는 것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는 함정을 깔아둔 건가?’
그런 거라고 가정하면 이 테스트의 목적은 체력이 아니었다.
정확한 판단력과 잘못된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 침착함.
지금 측정하고자 하는 건 이 두 가지일 것이다.
“으아아~! 전부 뛰어가잖아요! 우리도 가요!”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린 주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왜 내가 너와 우리지?”
매정할 정도로 확실하게 선을 그은 용주는 남들보다 한 걸음 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3분의 2 이상의 헌터들이 벌써 출발하고 난 뒤였다.
형만과 같은 선상에 선 용주는 그를 흘겨보았다.
형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확실하게 용주를 보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거라고요.”
“…….”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발소리에 용주는 반대편을 흘겨보았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주원은 아직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거 단단히 잘못 걸렸군.’
뒷머리를 긁적거린 용주는 출발선을 벗어났다.
출발선 바깥에서 마주한 풍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과도 같았다.
수십 명의 사람이 일렬로 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어떠한 특징도 없는 풍경이 무한히 반복되었다.
갈림길도 없었고, 높낮이도 없었으며, 다른 거라곤 앞뒤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순서 정도였다.
같은 곳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싸워야 하는 적도, 피해야 하는 함정도 없었다.
이들이 하고 있는 건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아아! 이러다가는 정말 탈락하고 말 거라니까요!”
뜀 걸음을 하고 있는 주원이 이야기했다.
용주의 속도는 조깅을 한다고 하기도 민망한 속도였다.
덕분에 주원도 제자리에서 뛰는 빈도가 훨씬 많았다.
“좀 더 빨리! 좀 더 속도를 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앞장서고 싶으면 먼저 가라고 말했잖아. 그것도 몇 번이나!”
용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대답을 하기도 슬슬 짜증 나지는 시점이었다.
“에이, 어떻게 그래요? 여기까지 온 거면 분명 합격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온 거잖아요. 저만 따라오라고요. 곧 유명해질 제가 이끌어드린다니깐요?”
“이끌릴 생각도, 따라갈 생각도 없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요~.”
“…….”
용주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드리웠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왜 아까 그 헌터들이 ‘열혈 바보’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아까 그 조커라는 인물보다도 더 껄끄러운 타입이었다.
“어?!”
그 뒤로도 용주를 한참 동안 설득하던 주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 앞에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젠장. 발목을 접질렸어.”
주원은 곧장 사내의 발목을 확인했다.
복숭아뼈 부근에 파랗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이건….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요. 빨리 치료해야 할 것 같아요.”
“안 돼. 그럼 여기서 탈락이란 말이야.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탁이야. 가서 압박붕대 하나만 받아와 줘. 시험관이었던 그… 샐러맨더한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렇지만….”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두 손을 간절히 모은 헌터가 땅에 머리를 박았다.
주원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으… 알았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
주원이 뒤로 돌아서려던 그때.
거친 손길이 그를 낚아챘다.
깜짝 놀란 주원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건 용주의 얼굴이었다.
“너도 같이 탈락하고 싶은 거냐?”
“네? 그게 무슨….”
주원이 말끝을 흐렸다.
용주는 거칠게 그를 끌어당겼다.
“9.5초. 방금 네가 멈춰 있던 시간이었다. 허용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만이 했던 말에서 벗어나지 마라.”
“…뒤로 돌아가면 탈락이라는 건가요?”
기억을 더듬은 주원이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지 못하는 게 무척 괴롭다는 그의 표정이었다.
“판단은 네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주원을 반쯤 끌고 가던 용주가 손을 놓았다.
“…….”
“야! 잠깐만! 어디 가는 거야?!!”
고심에 찬 주원의 귀에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주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선택이었지만,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
사과를 하려던 주원은 인사를 끝마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저기 있었던 헌터가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 사라졌어?!”
주원이 충격을 금치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탈락자의 처리는 저렇게 되는가 보군.’
주원이 본 걸 같이 보고 있던 용주는 무심하게 갈 길을 갔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탈락자가 저런 식으로 배제된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아깐 감사했어요.”
말없이 한참을 걷던 주원이 입을 열었다.
에너지 넘치던 그의 목소리는 텐션이 낮아져 있었다.
“아까 부상을 입었던 그분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요?”
“의료 헌터에게 치료를 받고 금방 팔팔해졌겠지.”
용주가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여긴 근본적으로 시험장이었다.
카오스 게이트면 모를까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통제 범위 안이란 소리였다.
당연히 부상자에 대한 조치도 미리 계획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일 텐데 말이에요.”
“예상외의 판단을 하더군.”
이번에는 용주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외? 어떤 부분이요?”
“돌아가지 않은 거. 난 네가 녀석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저도 그러고 싶긴 했는데요. 이번 시험만큼은 절대 탈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원이 손을 움켜쥐었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면 재능이 없어도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헌터가 되고 나서 줄곧이요. 간신히 찾아온 기회를 그렇게 놓치고 싶진 않았어요.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되더라도.”
“…….”
용주는 눈동자에 주원의 손이 비쳤다.
주원의 얼굴은 제법 풍요롭게 산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다.
고생이라고는 담쌓고 지낸 그런 얼굴 말이다.
하지만 그의 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성한 곳 없이 굳은살이 박인….
막노동을 하는 사람의 손 같았다.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전력으로 뛰어가지 그래? 네 방식대로 전력을 다해 봐야 끝나도 아쉬움이 없을 것 같은데.”
큰 틀에서 보면 아까 사라졌던 그 헌터나 자신이나 주원에겐 비슷한 인물일 것이다.
자신이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인물 말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주원이 자신에게 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용주 헌터라고 그랬었죠?”
“그래.”
“그럼 그냥 제 멋대로 용주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형?”
용주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 호칭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가도 싶지만, 왜 갑자기 자신이 형이 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에이, 그렇게 부르겠다면 그런 줄 아세요. 아무튼 용주 형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봤어요. 박형만 헌터님께서 했던 말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그 말이요.”
“…….”
“1등으로 도착해야 한다. 선착순 몇 명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몇 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 확실히 그런 말은 없었어요. 아까 탈락한 그 헌터 분은 저희보다 앞서 있었어요. 그렇지만 탈락했죠. 어쩌면 제 생각이 처음부터 틀렸을지도 몰라요. 용주 형을 대하는 제 자세도요.”
용주보다 한발 앞서 나간 주원이 뒤로 걷기 시작했다.
“용주 형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떨어졌을 시험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더 옆에 있게 해달라고요. 붙어도 같이 붙고,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는 거예요.”
“…같이 떨어질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떨어질 거면 너 혼자 떨어져.”
작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무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주원은 한 걸음 뒤에서 용주를 따라가고 있었다.
* * *
용주와 주원.
두 사람보다도 더 후미에 위치한 터널의 어딘가.
“그래서 뭐, 눈여겨볼 만한 사람들은 좀 있었어?”
조커에게 다가온 한 소녀가 물었다.
품에 꼭 들어오는 테디베어를 안고 있는 소녀의 나이는 많아 봤자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다.
“칠이 하나, 팔이 둘. 응하진 않았지만 괜찮은 눈을 가진 자들이 또 몇 명 정도 있었습니다, 아가씨.”
감미롭게 차분한 목소리의 조커가 대답했다.
용주나 주원을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의 목소리였다.
“8? 꽤 높은 숫자가 나온 사람들이 있네. 난 높아 봐야 6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녀가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있잖아. 이 시험, 몇 명이나 합격할 것 같아?”
“최소 절반. 많으면 3분의 2 정도를 합격시키지 않을까 합니다.”
“그 사람들이 전부 D급 게이트로 가게 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험 내용을 보고 더 확신이 생겼습니다.”
조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음~ 그래? 그럼 집에서 말한 것처럼 2차 시험이 있을 거라는 거네? 3차, 4차 시험까지 있을 수도 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그럼 협동하거나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네. 누굴 가까이 두는 게 좋겠어?”
“물론, 저 아니겠습니까, 아가씨?”
“그거 말고.”
소녀가 퀭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하하, 알겠습니다. 금발 머리의 소년. 이주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헌터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이기에 부리기도 쉽고, 배신당할 위험도 적습니다. 또 숫자 8이 나온 두 사람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눈을 가진 헌터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헤에. 괜찮은 눈이 아니라, 좋은 눈이야?”
둘은 얼핏 들어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특히 그의 말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가씨. 차가운 눈을 가진 그자라면 분명 유용한 카드가 될 겁니다. 반대로 경쟁자로 두기엔 위험한 카드가 되겠죠.”
“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필요한 때가 오면 알아서 잘 부탁해, 집사… 아니, 조커?”
“물론입니다, 아가씨.”
짧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