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 용주는 어깨와 허리를 더듬었다.
낙하산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는 잡히지 않았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젠장! 그냥 떨어져 죽으란 거야, 뭐야?!’
불합리함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최소한 사망이라는 데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생각해. 생각.’
어떻게, 어떻게 바다로 떨어진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해수면에 닿는 순간 온몸은 산산조각.
전투 속행이란 생존 스킬이 있긴 했지만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잠깐만! 그래. 그거라면….’
그런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둘러 인벤토리를 불러온 용주는 한 가지 아이템을 불러들였다.
박쥐 망토.
3분간 최대 3회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아이템이었다.
‘조금 더 아래에서 사용하는 게 좋겠어. 3분간 내려갈 수 있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망토를 두른 용주는 섬의 전경을 조금 더 눈에 새겨 넣었다.
섬 전체에 나무가 고루 자라고 있었지만, 특정 몇몇 구간엔 인위적인 건축물들이 여럿 보였다.
밀집해 있는 지역도 있고, 하나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지역도 있었다.
섬 곳곳을 잇는 흙길도 보였다.
테이고른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카오스 게이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바다의 지평선은 푸르렀다.
바다가 계속 된다기보다는 하늘색 벽이 세워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서바이벌을 위한 섬이라 이거지?’
자기장의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최후의 1인이 되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선 지형의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
혼란스러운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잠깐만…. 이건 무슨 소리지?’
아래를 살피던 용주는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두두두두’ 하는,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어렵사리 몸을 뒤집은 용주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건 또 뭐야….’
자신보다 높은 곳엔 열기구가 하나 떠 있었다.
아니, 열기구라기보다는 애드벌룬을 달고 있는 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 생김새였다.
열기구의 후미엔 프로펠러 두 쌍이 달려 있었다.
배나 잠수함의 추진기와 비슷해 보였다.
용주가 들은 소리의 정체는 바로 저것.
비행선은 섬 위를 달리고 있었다.
‘비행선…?’
비행선을 살피던 용주의 눈에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되었다.
배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게 설마 내가 경쟁해야 하는 상대들인 건가?’
비행선이 움직일수록 더 많은 이들이 떨어졌다.
마치 원하는 위치가 오길 기다렸다가 뛰어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매고 있었다.
추측건대 낙하산인 것 같았다.
‘뭐, 어떤 녀석들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다시 아래를 바라본 용주는 가까운 지형들을 살폈다.
‘숲 한가운데 떨어지는 것보단 건물이 있는 쪽으로 떨어지는 게 나으려나?’
선택할 수 있는 착륙지는 여럿 있었다.
‘그래. 일단 저기로 내려가 보자. 내려가 보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용주가 선택한 곳은 섬 외곽의 목조 건물.
달랑 두 채의 건물만이 자리한 작은 산장이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이는 없었다.
▶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습니다.
▷ 이번 퀘스트 동안 무기는 지역 내에서 획득한 것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금지된 아이템 : 골드록의 첨예검
테라스에 착지한 용주의 앞에 한 가지 메시지가 활성화됐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이곳에서 획득한 것들만.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지역 여기저기에 무기가 배치되어 있든가.
아니면 떨어진 녀석들의 무기를 뺏어 쓰는 거든가.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이야 없지.’
그렇게 생각한 용주의 앞에 한 가지 메시지가 더 나타났다.
▷ 다음 자기장 축소까지 남은 시간 : 30분.
‘이건 또 뭐야….’
자기장 축소.
그게 뭔지 지금으로선 쉽게 예측이 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나.’
인벤토리를 불러온 용주는 ‘보급품 타이머’를 확인했다.
반응은 없었다.
타이머는 인벤토리가 아닌 용주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럼 일단은….’
창가로 다가간 용주는 문고리를 확인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쓸 만한 무기를 찾아봐야겠지. 스킬은 항상 소모값이 있으니까.’
산장 내부로 들어선 용주는 2층 방을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안쪽의 가구는 많지 않았다.
오래된 서랍장과 책상을 전부 뒤져 봤지만, 소득은 제로.
1층의 부엌과 수납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빵 통조림…? 이런 것밖에 없는 거야?’
그나마 발견한 통조림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용주는 옆 건물로 이동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용주의 눈에 다섯 개의 캐비닛이 보였다.
셋은 열려 있었지만, 둘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열어보고 싶은데….’
방을 열심히 뒤져 보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할퀴기.’
붉은 손톱을 만들어 낸 용주는 캐비닛 자물쇠를 끊어 냈다.
안쪽에서 넘어진 것은 빗자루와 대걸레.
즉, 꽝이었다.
용주는 나머지 하나의 자물쇠 역시 잘라냈다.
그리고.
마침내 검 한 자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N- 낡은 롱소드
- 예리도 10, 내구도 3.
- 이 아이템은 자기장의 땅에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자기장의 땅 이탈 시 자동 소멸합니다.
검의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녹이 슬고, 이가 다 빠져 있었다.
첨예검은 물론이고 용주가 전에 사용하던 보급형 롱소드보다도 못했다.
‘N…. 이런 경우라면 이건 등급이라고 봐야 하나? 노말(Normal)의 N?’
이름 앞에 붙은 알파벳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좋은 무기는 아니란 소리였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검을 챙긴 용주는 집안을 마저 뒤지기 시작했다.
추가로 발견한 아이템은 ‘화염병’ 정도로,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붙어 있는 물건이었다.
▷ 제한시간이 경과했습니다. 자기장이 축소됩니다.
- 자기장은 외부에 지속적으로 큰 피해를 입힙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특이점은 한눈에 확인되었다.
지평선 끝에 있던 푸른 장벽이 바다를 잠식하며 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섬으로 다가온 자기장은 섬 외곽의 일부를 잠식하며 멈추었다.
▷ 다음 자기장 축소까지 남은 시간 : 1시간.
이번에 걸린 제한시간은 1시간.
다음번 자기장 축소에선 아마 여기도 안전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저 자기장 바깥으로 밀려나면 게임 오버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산에서 내려가면 이곳보다 훨씬 규모가 큰 단지가 있었다.
자기장에서도 멀어지는 방향이니 일단 거기부터 수색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내려온 용주는 발소리를 죽였다.
아까 이 근처로 떨어지는 낙하산을 몇 개 정도 봤었다.
‘위에서 봤을 때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나무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용주는 모래 바닥을 달렸다.
이곳은 마치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공장촌 같았다.
첫 번째 컨테이너의 자물쇠는 뜯겨 있었다.
열쇠로 연 건 아니고, 쇠 지렛대 같은 무언가로 강제로 비틀려 열려 있었다.
외벽을 타고 건물을 좀 더 돌던 용주는 깨진 창을 통해 안으로 진입했다.
안쪽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가구보다 넘어져 있는 게 더 많았고.
게 중에는 부서진 것들도 제법 많았다.
‘저건….’
수색을 이어가던 용주는 어딘가로 다가갔다.
텅 빈 철제 수납장에 검붉은 액체가 흩뿌려져 있었다.
혈흔이었다.
‘전투가 있었던 건가?’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의 서바이벌이 다대일의 구조인지 아니면 모두가 개인전인지 하는 부분이었다.
전투가 있었다는 건 개인전이라는 뜻.
용주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근데 왜 시체가 없는 거지?’
여기서 누군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핏자국은 부자연스럽게 끊어져 있었다.
여기서 누군가 죽었다면, 시체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시체를 옮겼다면 핏자국이 분명 길게 이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살아남아 지혈을 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둘의 전투가 있었다면, 하나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승자가 어떻게 지혈을 했다고 해도, 패자의 시체는 있는 게 정상이란 소리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점을 하나 남긴 용주는 옆 건물로 이동했다.
피는 아직 말라 있지 않았다.
근처에 분명 누군가 있을 것이다.
챙! 채챙!
세 번째, 네 번째 컨테이너를 계속해서 뒤지던 용주의 귀에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를 낮춘 용주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었다.
검과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생명체들을.
‘저건 무슨 생명체지?’
녀석들에게 두 팔과 두 다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녀석들의 모습은 인간들과 사뭇 달랐다.
직립 보행을 하며, 도구를 사용하지만, 녀석들의 머리는 염소를 닮아 있었다.
발바닥 역시 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온몸이 털로 덮어 있었다.
팔과 허벅지의 근육이 특히 발달했고, 체격은 용주보다 훨씬 다부졌다.
‘하나 잡으면 메시지가 나오겠지. 승자가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자.’
숨을 죽인 용주는 전투에 집중했다.
도끼를 가진 쪽이 상대방을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승부가 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검을 든 쪽은 최선을 다해 반격했지만, 검이 두 동강 난 순간 승패를 되돌릴 순 없었다.
“!”
용주의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저게 뭐야….’
용주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염소 인간이 이상한 가죽 보따리로 변해 있었다.
승자는 그 보따리를 뒤졌다.
그러곤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따리를 걷어차 버렸다.
‘시체가 없던 이유가 저거였나?’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해해야만 했다.
‘누군가 죽으면 시체가 남는 대신, 녀석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남는다는 건가?’
지금 상황만 봤을 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
용주에겐 그다지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시체가 없다는 건 HP를 회복할 수단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창틀을 넘은 용주는 조용히 녀석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메에에!!”
준비해뒀던 검을 녀석의 목덜미에 꽂아 넣었다.
중저음의 염소 울음소리는 상당히 기괴했다.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염소 인간은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내구도를 모두 잃은 낡은 롱소드는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 브로(BROO)를 쓰러뜨렸습니다.
▷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브로? 이게 이 녀석들의 이름인가 보지?’
쓰러진 녀석은 머지않아 보따리가 되었다.
보따리에 손을 넣을 필요는 없었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의 리스트가 별도의 창에 쫘르르 출력되었으니 말이다.
▷ M - 강철도끼 - 예리도 20, 내구도 5.
‘이게 녀석이 가지고 있던 무기인가?’
브로가 휘두르던 도끼는 용주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능력치 또한 압도적으로 높았다.
적혀 있는 이니셜은 M.
N보단 상위인 이니셜인 모양이다.
▷ 스파이크 트랩
- 날카로운 스파이크를 흩뿌립니다.
- 트랩에 걸린 이동수단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 외의 아이템은 ‘스파이크 트랩’ 정도였다.
아이템 설명으로 미루어 보건대, 달리는 이동수단을 무력화하는 덫인 모양이다.
‘이런 게 있다는 건 어떠한 이동수단이 있다는 소리인데….’
아직 그런 건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그런 게 있다면 확보해 놓아서 나쁠 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기동력이 있으면 자기장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근데 녀석들한테도 그런 게 필요한 건가?’
브로의 발굽은 달리는 데 상당히 특화되어 보였다.
그렇기에 과연 녀석들에게도 그런 게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긴 하지.’
어깨를 들썩인 용주는 수색을 계속했다.
그 이상의 브로는 없었다.
아이템 역시 제로.
모든 컨테이너에 뒤진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서 이미 파밍은 끝나 있던 시점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넓은 부지에 아이템이 고작 이게 전부라니…. 상당히 짠 편이네.’
용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면 슬슬 이동해야 할 때였다.
‘자기장이 바깥쪽에서 점점 안쪽으로 조여 온다면, 아예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미리 자리를 잡아둔다면, 수색하러 들어온 후발 주자를 잡아먹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용주는 하늘에서 봤던 전경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섬 중심부로 가려면 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다.
‘음?’
이동을 결심한 용주는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보급품 타이머가 진동하고 있었다.
‘보급품?’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