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렇지 않다고? 무슨 근거라도 그런 말을 하지? 꼬꼬마 특별조사관”
“화면을 봐주십시오.”
동제가 자신의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화면엔 한 사건의 타임라인이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러려고 만든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여러분께서 보시는 이 화면은 ‘F-33-350 사건’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시간순으로 사건을 재구축한 타임라인입니다.”
“어차피 다 날조된 증언이라면 의미는 없을 텐데?”
“정말 그럴까요?”
태영이 손을 몇 번 움직이자 네 개의 창이 나타났다.
각 창에는 형만과 수지. 그리고 태영과 용주가 이야기한 타임라인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처음 기록된 건 용주와 형만의 만남에서부터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타임라인에 모순은 없습니다. 정말로 이게 날조된 증언이라면 이토록 정교하기는 힘들 겁니다.”
“흥! 이래서 요즘 어린 것들이란. 그렇게 티 나게 하는 멍청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어? 다 철저하게 맞춰둔 거지.”
“좋습니다. 그럼 이번엔 여길 한번 주목해 주십시오.”
태영이 네 사람의 공통된 증언에 동그라미를 쳤다.
“박형만 헌터님께선 이 지점에서 팔을 잃으셨습니다. 현장엔 A급 의료 헌터인 안수지 헌터님께서 계셨죠. 정황상 팔을 치료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럼 이번엔 이 타임라인이 거짓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럼 A급 헌터이신 박형만 헌터님께선 왜 어떠한 이유로 팔을 잃게 되신 걸까요? 그리고 안수지 헌터님은 왜 그런 헌터님을 치료하시지 않은 걸까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동제의 물음에 성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들에 근거가 없었다.
“오성덕 헌터님 주장대로 박형만 헌터님의 실력이 현역시절만 못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녹슨다고 한들 게이트는 D급이었습니다. 사망한 헌터들 역시 모두 D급이었죠.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박형만 헌터님의 상대가 되진 못했을 겁니다. 언노운도, 그리고 헌터도 말이죠.”
“…….”
“박형만 헌터님의 잃어버린 팔이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비밀의 방은 정말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끝마친 동제는 한 호흡을 삼켰다.
“그럼 이번엔 제가 오성덕 헌터님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 드려보겠습니다. 헌터님의 주장에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설마 아무 증거도 없이 사람을 살인범으로 의심한 건 아니시겠죠?”
“으… 읍…!”
얼굴이 빨갛게 익은 성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크크큭! 크크크크!”
성덕이 자리를 뜨자 시우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통쾌해 죽겠다는 그런 뉘앙스였다.
“흠흠! 그럼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의견을 갖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사회자가 다시 회의를 이끌었다.
그리고.
“괜찮으면 이번엔 내가 아이디어 하나 내봐도 될까?”
새로운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사회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그곳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의 사내가.
“이… 이안 헌터님? 대체 언제….”
벙찐 표정의 사회자가 말을 더듬었다.
이 사내의 이름은 ‘이안’.
빈자리에 있는 명패 중 이름이 적혀 있는 인물이었다.
“아까 문이 열렸을 때 슬쩍 들어왔지. 지각한 마당에 당당하게 들어오기도 좀 그렇고 해서 말이야.”
이안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S급 헌터의 등장에도 회의장은 의외로 잠잠했다.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의 실력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이안 헌터님, 발언해 주십시오. 아까 말씀하신 아이디어란 걸.”
“듣기로는 위에서 그런 방침이 내려왔다던데? 뭐랬더라? D급 헌터가 E급 헌터를 픽업할 수 있다던가?”
“네. 확실히 이번에 내려온 지침 중에 그런 임시 지침이 있었습니다.”
“그럴 바엔 아예 E급 헌터들 중에 추려서 D급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해도 좋지 않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의도와 방법을요.”
“의도는 간단해. D급 게이트에 그런 이변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반복해서 검증하면 자연스럽게 D급 헌터들이 업무에 복귀할 거란 거지.”
“반복 검증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인원을 당겨 쓸 거면, 차라리 그편이 좋지 않겠어? 대신 실력 검증을 확실하게 해야겠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안의 주장에 시우가 손을 들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요. 아저씨 입장에선 E급이나 D급이나 전부 같아 보이겠지만, 아래에서 보면 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픽 하고 전부 죽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요.”
“그건 C급부터 A급까지 전부 경험해 본 헌터로서 하는 경험담인가? 진 각성을 경험한 우리 시우군?”
“우리 시우라니… 그 호칭 싫다고 분명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한쪽 이어폰을 뺀 시우가 징그럽단 표정을 지었다.
그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이안은 대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핫! 그래. 아무튼 그래서 검증이 철저해야 한다고 말을 했던 거였어. D급 토벌 경험이 있는 자들. 그러니까 D급 게이트에 가서 활약을 해봤다든가, E급 게이트의 보스를 혼자 쓰러뜨렸다든가. 그런 경험이 있는 자들을 모아서 테스트를 거치는 거지. 일명 ‘슈퍼스터 - H’라고나 할까?”
이안의 가벼운 농담에도 회의장은 고요했다.
“난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가장 먼저 침묵을 깬 수지가 이야기했다.
“역시 우리 수지 양. 그렇게 나와줘야지.”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딱 붙인 이안에 수지를 가리켰다.
“대신 테스트장마다 의료 헌터가 동반된다는 가정하에서야. 심각한 부상을 방조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래. 그래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다른 의견을 기다렸다.
형만을 비롯한 몇몇 헌터들과 의견을 주고받은 이안은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첫 번째 주제는 이걸로 일단락하고,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이안은 자기 지정석으로 돌아가 있었다.
“최근 누군가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을 제압하고, 게이트에 들어가 헌터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진 길드 차원에서 정보를 차단하고 있지만, 결코 묵인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사회자가 신호를 보내자 화면이 넘어갔다.
화면엔 가면을 쓴 검은 옷차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역병 의사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길드에서 명명한 이들의 이름은 ‘까마귀’. 길드는 이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형만이 물었다.
“아직까지 정체도 목적도 불투명합니다.”
“무장한 군인도 모자라 헌터를 쓰러뜨린다는 건 녀석들도 평범한 민간인은 아니란 소리네.”
시우가 히죽 웃어 보였다.
이야기에 제법 흥미가 있다는 눈치였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헌터와 같은 힘을 구사한다고 합니다.”
“스킬을 쓴다는 거네. 그럼 그냥 헌터잖아? 사설 헌터라도 있다는 건가?”
“헌터 중에 그런 일을 겸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안 그래?”
시우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싹 굳어졌다.
“헌터 사냥을 하는 헌터…. 단순 유희라 하기엔 질이 상당히 안 좋네요.”
“정말로 헌터 중에 그런 자들이 있는 거면 당장 색출해 내야 합니다. 그런 인간 말종들은….!”
“왜? 나는 그 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우의 기분 나쁜 미소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뭐?”
“언노운보단 사람 쪽이 상대하기 재밌을 것 같잖아. 머리 쓰는 맛도 더 있고, 난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하고도 한판 붙어보고 싶은데. 다들 그런 맘 없어? 나만 이상한 거야?”
“제정신이야?”
“그걸 말이라고.”
“너 설마….”
한층 격해진 분위기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다들 거기까지. 증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 지금은 토론을 하기엔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해.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도로만 해두자고.”
이안은 형만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한마디 거들어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치였다.
“같은 생각이다. 지금은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다.”
“들었지? 지금은 까마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서 경계하는 게 최선이야. 저쪽이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 쪽에서 먼저 찾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눈썹을 들썩인 이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조금 더 진행된 회의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 * *
길드 내부에 자리 잡은 수련장.
그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용주는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등록해 놨던 드랍품은 다행히 낙찰된 모양이네.’
핸드폰을 확인한 용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D급 게이트의 게이트 보스를 쓰러뜨렸을 때 나온 드랍품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형 결정체.
다른 하나는 특이하게 생긴 검이었다.
게이트를 나온 용주는 태영에게 물건을 보였었다.
태영은 그 물건들의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다.
다른 두 헌터도 마찬가지.
두 물건은 오롯이 자신의 차지가 되었다.
‘모양도 성능 이랬던가? 확실히 D급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치곤 값이 높진 않네.’
길드로 돌아온 용주는 두 가지 물건을 모두 처분했다.
이형 결정체는 바로 돈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무기 쪽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경매에 부치며 가영은 이런 말을 했었다.
이렇게 징그럽고 기괴하게 생긴 무기는 가격을 잘 받긴 힘들 거라고.
유찰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말이다.
확실히 무기의 생김새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칼날을 따라 다리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자라 있어 그냥 순각류 언노운의 절단면을 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말대로 가격은 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용주에겐 이 돈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다음 퀘스트 게이트인 ‘자기장의 땅’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인 거지?’
하나의 생각을 정리한 용주는 다음 퀘스트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장의 땅 개방 시각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지이잉~!
용주가 한창 생각에 잠긴 그때.
자동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비쳤다.
이나영.
자매 중 동생 쪽이었다.
“휴식 중이라면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지?”
“메시지는 확인하셨는지요.”
“낙찰 메시지라면 방금 확인한 참이다. 170골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가던 용주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
“골드?”
“아니… 단순 말실수였다.”
용주가 서둘러 해명했다.
“그렇습니까? 그거 말고 다른 메시지는 아직 확인하시지 않으신 건지요?”
깊게 캐묻지 않은 나영이 물었다.
“다른 메시지?”
용주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확인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
메시지의 제목은 이거였다.
슈퍼스타 - H.
'발신 번호는 분명 헌터 길드인데…. 뭐지, 이 스팸 같은 머리글자는?’
의문을 표한 용주는 메시지를 읽어나갔다.
[슈퍼스타 - H
귀하에겐 이번 헌터 길드에서 개최하는 시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최종 시험에 통과한 헌터들은 ‘팀 H’로 분류되며, D급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시험에 응할 헌터는 가까운 헌터 길드에서 등록하시길 바랍니다.]
그 아래 적혀 있는 건 대략적인 시행 일자와 시간 같은 것들이었다.
세부 일정은 추후 변동될 수 있다는 문구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 E급 헌터들 중 일부를 대상으로 일종의 시험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이용주 헌터님께서 아직 메시지를 확인하시지 않은 것 같아, 이참에 구두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주가 메시지를 다 읽기를 기다리던 나영이 이야기했다.
“일부의 기준이 뭐지?”
“D급 게이트 경험이 있는 E급 헌터. 그리고 D급 언노운을 혼자 쓰러뜨린 경력이 있는 헌터입니다.”
‘그래. 그런 거라면 확실히 나도 자격이 되긴 하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나영은 대답을 기다렸다.
‘헌터 시험이라….’
용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D급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용주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 시험으로 더 얻는 게 있을 게 있을 거라는 생각.
‘시험이라 함은 그걸 지휘, 감독하는 사람 역시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 제아무리 E급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라지만, 아무나 시험관으로 나오진 않을 거야.’
시험 관계자 중 어쩌면 A급.
혹은 그 이상의 헌터와 접점을 만들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시험이니 길드에서도 대충 나오진 않을 테지.
S급 헌터.
만약 그런 자를 눈앞에 둘 수 있다면….
부모님의 죽음과 연관되었던 S급 카오스 게이트에 대해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된 건지.
왜 그렇게 돼야만 했는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물론, 시험에 적지 않은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다 한발 나아갈 수 있음은 분명했다.
그 끝에 뭐가 있든 말이다.
“그래. 그럼 참여하는 걸로 하겠다. 등록은 부탁해도 되겠지?”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두겠습니다.”
90도로 고개를 숙인 나영은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용주는 그 모습을 깊어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 번 더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험을 보는 건 괜찮은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설마 다음 퀘스트 시간이랑 겹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