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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좀비헌터-45화 (45/357)

45화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수많은 지부를 관리하는 헌터 길드의 본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헌터 길드의 최상층에 오른 동제는 넥타이를 한 번 더 바르게 정리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원형 테이블에 앉은 십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남성도 여성도 있었고, 나이대도 상당히 다양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전부 A급 이상의 일류 헌터들이었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렇게나….’

서둘러 걸음을 옮긴 동제는 자리에 앉았다.

남아 있는 빈자리는 총 셋.

이 정도 사람들이 모인 것치고 회의실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다.

노트북을 켠 동제는 서류들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리고.

“특별조사관이라길래 어떤 사람일까 했는데, 완전 꼬꼬마였잖아?”

그런 동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동제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꼬꼬마라는 말…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단어인데 말입니다.”

자신의 왼편에 앉아 있는 사내와 눈을 마주친 동제가 이야기했다.

이 사내의 이름은 ‘오성덕’.

본래 이명보다 ‘꼰대’라는 뒷말로 더 유명한 A급 헌터였다.

“잘 안 쓰는 단어는 무슨? 잘만 알아듣는구만, 뭘?”

의자를 좀 더 바짝 당긴 성덕이 동제의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요즘엔 자료를 이런 식으로 준비하나 보지? 많이 펀해졌네. 나 때는 종이 한 장 한 장 인쇄해서 나눠줬었는데 말이야.”

“헌터들이 그런 업무까지 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헌터가 되고 나서는 물론 그랬지. 그렇지만 헌터가 되기 전엔 나도 서류 준비도 하고, 커피도 타오고 그랬었어.”

“그렇습니까? 헌터가 되시기 전엔 평범한 직장인이셨나 보군요.”

“평범하다면 평범했지. 직업군인이었으니까. 말이 안 통하는 상관들 때문에 아주 진절머리가 났었어. 자기 때는 이랬고, 또 자기 때는 저쨌고 부조리가 얼마나 심하던지….”

성덕의 푸념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그의 말을 적당히 한 귀로 흘려버린 동제는 모니터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선 꼰대라고 불린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꼬마 친구. 내 말 듣고 있어?”

한참을 모니터만 보고 있는 동제에게 성덕이 물었다.

동제의 행동들이 상당히 불쾌했단 말투였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사람 말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그러니 발전이 없지.”

동제에게 시간을 주지 않은 성덕이 곧장 말을 이어 붙였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동제는 변명 대신 자세를 낮추었다.

하지만 거기에 돌아온 건 또 다른 잔소리들뿐이었다.

“그쯤하고 자리로 돌아가지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성덕의 잔소리가 끊긴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낯이 익은 남성의 목소리에 성덕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형만이었다.

“흐음~ 이게 누구야? 꼬리 내리고 도망갔던 셀러맨더 아니신가? 아니지. 이제 꼬리 잘린 도마뱀이라고 해야 하나?”

피식 웃어 보인 성덕이 형만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도 형만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녹슬어도 그렇지. 어떻게 A급 헌터가 D급 게이트에 팔을 두고 오냐 이 말이야. 왜, 미래에 두고 왔다, 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

“애송이도 안 할 짓을 하다니. 다른 헌터들이 우리 A급 헌터를 뭐라고 보겠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성덕이 형만의 신경을 또 한 번 긁었다.

그리고.

“그만하지 그래?”

상황을 지켜보던 목소리 하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돌하고 잔잔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지였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끼어들어? 그리고 어디서 반말이야? 가정 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았길래. 음~ 쯧쯧!”

“경험해 보지도 못했으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거긴 평범한 D급 게이트가 아니었다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수지의 태도에 성덕은 불쾌함을 표했다.

“평범한 D급 게이트가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그건 어떤 의미야?”

“너희 말은 너희 주장일 뿐이야. 점자? 제단? 암전? 사신형 언노운? 그런 게 어디 있지? 증명할 수 있는 건 결국 아무것도 없잖아.”

성덕이 목소리를 높였다.

“실은 D급에서 그 많은 사상자를 내고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입을 맞춘 거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거겠지. 자존심도 지키고. 안 그래?”

“……!”

쾅!

성덕의 한마디에 엄청난 소음이 일었다.

순식간에 테이블을 건너뛴 수지는 성덕의 멱살을 붙잡았다.

“방금 그 이야기, 사과해.”

떨리는 목소리의 수지가 중얼거렸다.

평소와 달리 상당히 감정선이 드러난 수지의 얼굴이었다.

“사과?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거기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다 내 가족이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뭐? 가족?”

성덕이 눈썹을 들썩였다.

수지의 말이 어이없다는 눈치였다.

“두 분 다 조금만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난리에 동제가 노트북을 덮었다.

“안수지 헌터님, 그 손 놓아주시길 바랍니다. 오성덕 헌터님께서도 근거 없는 억측은 지양해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시길 권유 드리겠습니다. 지금 앉아계신 그 자리는 박형만 헌터님의 지정석입니다.”

“그래, 그래. 그쯤 하라고. 너무 시끄러워서 노랫소리가 안 들리잖아.”

턱을 괴고 있던 한 헌터가 동제의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성덕은 그를 쏘아보았다.

앳돼 보이는 외모와 달리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센 백발의 남성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C급 꼬꼬마가 어디서 이래라저래라 끼어들어?”

“그럼 그쪽은 C급이랑 같이 임무 나가는 걸 보니, C급이신가 보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뺀 사내가 피식 웃어 보였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나 때는 말이야. 이런 건 상상도 못 했어! 알아?!”

“그건 아저씨 때고. 나는 알 바 아니지. 그때가 그렇게 좋으면, 스마트폰 대신 삐삐나 차고 다니시든지.”

“뭐야?!”

“마음에 안 들면 한판 뜨던가? 난 언제든 환영이니까. 그런데 괜찮겠어? 그렇게 무시하다 지면 쪽이 좀 팔릴 텐데?”

“이런 건방진…!”

인상을 구긴 성덕이 이런저런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는 분명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상황이 더 엉망이 되어 버렸네요.”

상황을 지켜보던 동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같은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저흰 싸우려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 그래. 다들 조용히 좀 해달라고.”

동제의 이야기에 백발 헌터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이시우 헌터님께서도 장작에 기름을 들이붓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래서야 진화될 불도 다시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아~ 뭐야?! 내 잘못이라고?! …그래~ 뭐, 그런 걸로 치자고.”

어깨를 들썩인 시우는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안수지 헌터님. 혹시 제 이야기가 안 전해진 겁니까?”

동제가 물었다.

수지는 아직도 성덕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아직 받아야 할 사과를 받지 못했어.”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안수지. 자리로 돌아가라.”

상황을 지켜보던 형만이 수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수지는 형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분노를 곱씹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그러나 이내 표정을 지운 수지가 손을 놓아주었다.

동제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작 시각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리에 모여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빈자리는 총 2개.

참여 의사를 밝혔던 S급 헌터들은 아쉽게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된 이유는 최근 일어난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싶어서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D급 헌터들의 미션 기피 현상. 두 번째 주제는 최근 발생하고 있는 헌터 피습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각 사람들의 자리에 있던 패드에 똑같은 화면이 공유되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첫 번째 주제로 들어가죠. 화면을 봐주십시오.”

새로운 화면 첫 장에 적힌 이름은 ‘F-33-350 사건’. 그 옆에는 ‘비밀의 방 사건’이라는 부재가 달려 있었다.

“그럼 사건 개요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최근 D급 헌터들의 임무 패싱 현상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시발점을 말씀 드리자면, 바로 이 ‘비밀의 방 사건’입니다. 비밀의 방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아! 잠깐, 잠깐!”

말을 가로챈 시우가 턱을 괴었다.

화면엔 비밀의 방 사건에 대한 것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따로 설명할 필요 없잖아. 시간 낭비라고.”

시우의 항의에 사회자가 동제를 바라보았다.

동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설명은 넘어가도록 하죠. 어찌 됐든 그 일로 인해 헌터들 사이에 막연하게 퍼진 공포심이 헌터들을 위축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과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게 뭔 큰 문제라고. 그런 거라면 그냥 강제로 동원하면 되잖아. 헌터 일이 무슨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턱을 괴고 있던 시우가 이야기했다.

그의 고개는 음악에 따라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그렇게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동원령엔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동반되니까요.”

사회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덕이 손을 들었다.

“오성덕 헌터님 발언해 주세요.”

“그런 거라면 간단하잖아. 당사자들이 사실을 밝히는 거지. 마침 잘됐네. 여기 두 명이나 있으니까.”

“크크큭. 또 아까 그 이야기 하려고, 아저씨?”

콧방귀를 뀐 시우가 웃음을 참았다.

“사실이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말 그대로지. 그 사건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라고. 군인들 사이에선 제법 자주 있는 일이야. 책임 회피를 위한 그런 거짓말은.”

“내가 했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게 진실이다.”

잠자코 있던 형만이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겠지.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어디 있지?”

“생존자가 네 명이나 있어. 증언이 모두 일치하는 게 증거잖아?!”

입술을 깨문 수지가 따지듯이 물었다.

“듣자 하니 나머지 둘은 D급이랑 E급이라지? 돈으로 매수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신감을 표한 성덕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은 너무 간단한데 요즘 것들은 왜 이렇게 머리들이 안 돌아가는지, 원. 모순에, 모순에, 모순에, 모순이라고.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들어봐. 어떤 경로로든 헌터들이 죽어 나갔고,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급 헌터들을 돈으로 매수했다. 어때? 이게 제일 자연스럽지 않아?”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형만의 미간이 실룩거렸다.

“아니면, 이런 추측도 있는데…. 아까 말한 두 번째 주제에 있던 헌터 피습 사건…. 실은 네가 거기 연루되어 있다던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한 성덕은 다리를 꼬았다.

“그건 또 무슨 망상이지?”

“시체가 없다는 건 부검할 수 없다는 거고. 부검할 수 없다는 건 어떻게 사망했는지 검증할 방법 또한 없다는 거지. 어쩌면 언노운에게 죽은 게 아닌 걸지도….”

“…대답할 가치도 없군.”

“넌 분명 일선에서 물러난 퇴직 헌터였다, 박형만. 하지만 넌 그날 하필 그 게이트에 갔지. 그것도 A급 의료 헌터를 동원한 채로. 어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형만을 저격한 성덕이 물었다.

그리고.

“아니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동제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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