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가능할 리가 있는 모양인데요?”
벙어리가 되어 버린 바람머리 헌터에게 태영이 이야기했다.
“말도 안 돼….”
바람머리 헌터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동감입니다.’
태영 역시 눈앞에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나름대로 많은 게이트를 다녀봤고.
많은 헌터들과 많은 언노운을 만나봤지만, 오늘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만, 두 사람처럼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른 두 헌터에게 안정감과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넌 이제부터 한 마리의 무리 어미다. 내려가서 네 무리를 만들어라. 최대한 많은 알을 부화시켜라.”
용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언노운이 바닥을 찢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엔 점액질이 고여 있는 커다란 부화장이 보였다.
부화장으로 내려간 언노운은 알들을 부화시키기 시작했다.
수많은 유충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저항은 없었다.
“알을 전부 부화시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은데요.”
아래 상황을 지켜보던 태영이 이야기했다.
알 하나하나의 부화 시간만 보면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걸 전부 부화시킨다고 가정하면 못해도 몇 시간은 걸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노가리나 까고 있자고. 아니면 낮잠 한 번 조져도 괜찮을 것 같고. 껌껌하니 잠도 잘 오겠구만.”
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바람머리 헌터가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받아들이시는 게 엄청 빠르시네요. 순식간에 엄청 태평해지신 거 같은데요?”
물범 문신 헌터가 뺨을 긁적였다.
“뭐 어쩌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 버렸는데. 인생 너무 힘들게 살지 말자고.”
바람머리 헌터가 자리를 깔고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태영의 제지로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간을 그냥 허투루 사용할 순 없죠.”
바람머리 헌터를 일으켜 세운 태영이 이야기했다.
“음? 뭐 어쩌려고?”
“무리만으론 군단을 상대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군단을 상대하라면 우리도 군단이 되어야죠.”
“하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부화장 하나론 부족하단 소리입니다. 아직 한 군데 안 돌아본 루트가 있지 않습니까?”
태영이 어깨를 들썩였다.
“아직 안 돌아본 루트?”
“혹시 아까 거길 말씀하시는 건가요?”
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2 : 2로 갈라져 수색을 했을 때, 수색하지 못한 루트가 하나 있었다.
“용주 씨는 여길 봐주세요. 다른 언노운이 부화를 방해하려 나타난다거나 하면 일이 복잡해질 테니까요.”
태영의 이야기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만! 그럼 우리 셋이 가자는 이야기잖아? 맞아?”
바람머리 헌터가 놀라 물었다.
“그럼 여기 우리 말고 누가 더 있겠습니까?”
“설마… 저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물론입니다.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 변수를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물범 문신 헌터의 물음에 태영이 대답했다.
“그럼 이 윗길로 가잔 소린데, 가능하겠어? 우리끼리 움직이다간 100% 미아행이라고. 되돌아가는 것도 되돌아가는 거고,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마 불가능할걸?”
길은 미로나 다름없었다.
이상한 능력이 있는 용주가 있다면 또 모를까 자신들끼리 움직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듯했다.
“두 분이 불안해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저라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이런 말씀을 꺼낸 건 아닙니다.”
“준비?”
의문을 표하는 바람머리 헌터에게 태영은 수첩의 한 페이지를 보였다.
페이지에는 두 지점을 잇는 길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 설마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루트를 표시해 둔 거야?”
“대체 언제 그리신 거예요?”
태영의 수첩에 놀란 두 헌터가 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그려뒀었습니다. 지도가 있으면 적어도 미아가 되진 않지 않겠습니까?”
“대단하구만. 근데 그 숫자는 뭐야? 길마다 적혀 있는 숫자 말이야.”
“제 보폭으로 잰 걸음 수입니다. 실제 거리 비례로 그려진 지도는 아니니,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도록 적어 봤습니다.”
태영의 답변에 두 헌터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용주도 용주지만, 이쪽도 장난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부족합니까?”
“아니, 납득했어. 괴짜가 한 명인 줄 알았더니, 실은 두 명이었단 사실에 놀랐을 뿐이라고. 끼리끼리 논다더니만 그 말이 사실이었어.”
바람머리 헌터의 이야기에 태영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움직이죠. 여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을 이끈 태영은 처음 위치로 되돌아갔다.
혼자 남은 용주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언노운을 따르는 언노운 무리는 점점 더 규모를 더해 가고 있었다.
* * *
“무사 귀환! 하아~ 힘들구만.”
바람머리 헌터가 다리를 털었다.
3시간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왔음에도 위쪽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한 번도 안 헤매고 돌아올 수 있었잖아요. 그거 아니었으면 배가 걸려도 못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요.”
태영의 지도는 생각 이상으로 정확했다.
미탐색 구역.
그러니까 갈림길에서 어느 구역을 탐험하지 않았는지까지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던 덕분에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성과는?”
태영을 바라본 용주가 물었다.
“아직 부화하지 않은 부화장을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규모도 나름 크더군요. 근처에 언노운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동선이 겹치진 않을 겁니다.”
“나쁘지 않군.”
“도움이 될까 싶어 약도도 그려왔어요. 아! 물론 아래쪽 루트지만요.”
태영이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보였다.
“어떻게, 이쪽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태영의 물음에 용주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태영은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태영의 눈동자에 비치는 무리 어미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저건….”
태영은 시선을 좀 더 집중했다.
한 마리는 살아 있지 않았다.
점액에 반쯤 담가진 채로 유충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일부러 가게 두신 겁니까?”
“무리의 통제는 이미 확인했다. 새롭게 부화시킨 개체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던 유충들도 대부분 통제 범위 안에 들어왔다.”
용주가 휘파람을 불자 무리 어미 언노운이 천장을 타고 올라왔다.
“타라.”
언노운의 첫 번째 갑피에 자리를 잡은 용주가 이야기했다.
“타라니…. 언노운을?”
“아… 아무리 그래도 거부감이 너무 강한데요.”
말을 듣는 언노운이라고 해도 행동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언노운은 베어 죽여야 하는 적이기만 했지, 아군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타죠.”
태영이 망설이는 두 사람을 떠밀었다.
물범 문신 헌터는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근데 저 아래 안전한 건 맞죠? 이 녀석은 그렇다고 해도 다른 녀석들은 평범한 언노운이잖아요. 우릴 보자마자 공격하지 않을까요?”
아래를 내려다보던 물범 문신 헌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을 겁니다. 공격해오면 뭐 어떻습니까? 실력 있는 헌터가 넷이나 있는데.”
“큭!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창피하냐?”
태영의 말에 바람머리 헌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가 보죠?”
“물론 내 실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 난 최강이라고.”
바람머리 헌터가 언노운의 등에 올랐다.
태영은 물범 문신 헌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물범 문신 헌터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내려간다.”
용주의 신호가 떨어지자 언노운이 천장을 거꾸로 기었다.
“으아악!! 뭐야?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떨어져요! 떨어진다고요!”
“다들 꽉 잡으세요. 떨어지면 끈 없는 막타워를 하게 될 거라고요.”
갑작스러운 180도 회전에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헌터들 중 다행히 낙하하는 이는 없었다.
“하….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간신히 추락을 면한 바람머리 헌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면 진작 말 좀 해주라고. 내 주니어들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거꾸로 보이던 풍경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나저나 이놈들 진짜 공격…하지 않는 것 같네요?”
물범 문신 헌터가 이야기했다.
언노운 유충들은 자신들의 등장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정말로 여기 있는 언노운이 전부 아군이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여기 있는 알들은 모두 부화가 끝난 모양이네요. 어쩔까요? 제가 길 안내를 해드리는 편이 더 나을까요? 지상으로 이동하실 생각이신 거 맞죠?”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상황을 정리한 태영이 물었다.
“그래. 부탁하지.”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이 보여준 약도는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도움 없이도 거의 근접하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그의 공로를 인정해주고 싶었다.
“이동할 거다. 무리를 정렬시켜라.”
“키이이익!”
용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언노운의 포효가 부화장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집결하기 시작하는 언노운의 유충들.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한 유충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군대를 연상케 했다.
“와~ 미친! 이거 장관인데?!”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바람머리 헌터가 박수를 참지 못했다.
헛웃음이 터질 정도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정말이에요. 살다 살다 이런 걸 다 보네요.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겨두고 싶을 정도예요. 이거 다른 헌터들한테 말하면 분명 웃기지 말라고 할 거라고요.”
물범 문신 헌터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감탄인지 모를 물범 문신 헌터였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어떻게, 제가 직접 말하면 되는 건가요?”
태영이 물었다.
“네가 길을 알려주면, 내가 전달하는 식으로 하겠다.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내 말과 행동뿐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무리 어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충들의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 * *
이동 끝에 도착한 두 번째 부화장.
무리 어미 언노운은 먼저 유충들을 정리했다.
복종한 것들은 무리로 규합시켰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전부 도살했다.
“이거 엄청나잖아.”
전투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유충들의 사체는 다른 유충들의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먹이를 먹은 몇몇 언노운들은 탈태를 하기 시작했다.
무리에 합류하기 시작하는 아성체 언노운.
무리는 부화장 안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져 갔다.
“또 한참 시간이 걸릴 거 같은데? 어쩔 거야? 우리 또 움직여?”
바람머리 헌터가 물었다.
여기 있는 알들을 부화시키려면 그래도 최소 1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아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용주가 대신 대답했다.
“해야 할 일?”
“그게 뭔데요?”
두 헌터가 물었다.
“규모를 확보했으니, 이제 힘에 집중해야겠지.”
“힘?”
“너희도 직접 겪어 알고 있겠지만, 유충들의 전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E급 언노운보다 못하다고 보는 게 객관적인 판단이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죠. 숫자가 많아서 그랬지. 하나하나로만 놓고 보면 확실히 약했으니까요.”
물범 문신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충들이 이렇게 때로 있어 봤자, 전투력의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다. 말벌 앞에 꿀벌들처럼 속수무책으로 찢기겠지.”
“뭐야? 그럼 우리가 여태까지 한 일이 다 소용없던 일이었단 거야? 큰 전력이 되어줄 거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바람머리 헌터가 따지듯이 물었다.
“난 분명 이제 힘을 키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규모를 키운 건 이를 위한 첫 발판이었다.”
용주가 태영을 바라보았다.
“아까 분명 근처에 언노운들이 있다고 그랬었지?”
“네. 분명 그랬었죠. 여기서 몇 블록 안 떨어진 장소였어요. 규모는 대략 15마리 정도.”
태영이 수첩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용주는 무리 어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화에 집중하고 있던 언노운은 용주의 시선에 동작을 멈추었다.
“아성체들을 집결시켜라.”
용주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무리의 움직임이 변화했다.
용주의 앞에 집결한 아성체들.
아성체는 다섯 마리 정도였다.
“아성체들에게 무리를 배정해라. 너 스스로를 지킬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을 편성시켜라.”
다음 명령이 떨어지자 유충들이 아성체들 뒤로 정렬했다.
한 마리의 아성체와 일부 유충들은 부대에 편성되지 않았다.
편성되지 않은 병력들은 무리 어미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녀석들을 치실 생각이신가 보죠?”
태영이 물었다.
“그래. 많은 수를 잃게 되겠지만, 그편이 전력으로 더 쓸모가 있을 거다.”
“아까 저희보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던 건?”
“평소처럼 그냥 언노운들을 제거해주면 된다. 먹고 성장하는 건 이 녀석들이 알아서 할 테니.”
태영이 수첩을 덮었다.
다른 두 헌터 역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