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핸드폰을 연 용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교차로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정말 청구서 같은 거 때문에 부른 거면, 한 소리 단단히 해주겠어.’
만나기 전부터 불쾌함을 머금은 용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A급 의료 헌터였다.
첫 만남이 그런 식이어서 그런지 무게감이나 인식은 별로 없긴 했지만, 어찌 됐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건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웅성웅성.
용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술렁거림이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용주는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는 거리에는 다섯 사람 정도의 모습이 보였다.
“휘오~휫!”
“이왕 용기 낸 거 조금만 더 내라고, 짜식아!”
“그래. 사내자식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다섯 중 넷은 남자였다.
그리고 그중 셋은 한 명의 등을 떠밀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잡이 같기도 했고 말이다.
앞으로 나선 남성은 여성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제법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남성의 경우도 제법 외모가 훤칠했다.
옷도 말끔하게 입은 게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여성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단순한 길거리 헌팅 정도였던 모양이다.
결과는 뭐….
번호도 못 따고 보기 좋게 차인 거겠지.
여성은 용주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그리고 용주의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뭐지?’
눈동자를 굴린 용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약속 장소가 겹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거리가 좀 가까웠다.
어쩌면 자신을 누군가와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빨리 왔네. 일찍 온다고 온 거였는데.”
용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그때.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주는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확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썼던 이전의 모습과는 크게 달랐지만, 이 목소리를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안수지.
A급 의료 헌터인 그녀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개중에는 방금 대시에 실패한 사람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작은 목소리는 아닌 걸로 봐선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억울하다는 뉘앙스였다.
어딜 봐도 자신이 못한 게 없다는 것 같았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수지가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반응은 태연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용주가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란 말이 있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이 변화는 꽤 놀라웠다.
“그래서 건네줄 거란 건?”
약간의 거리감을 둔 용주가 물었다.
“음…. 여기.”
에코백에 손을 넣은 수지가 작은 쇼핑백 하나를 꺼냈다.
백화점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고급 쇼핑백이었다.
‘뭐지? 청구서는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용주는 손을 뻗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수지는 봉투를 다시 집어넣어 버렸다.
용주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말이 눈빛에 묻어 있었다.
“그전에 가보고 싶은 데가 있는데 괜찮지?”
“가보고 싶은 곳?”
“응.”
용주가 내키지 않는단 입 모양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 게이트 진입 전에 조금이라도 부상을 더 회복할 테니 말이다.
“가자.”
수지가 용주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용주는 당혹감을 표했지만, 수지는 거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수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아쿠아리움이었다.
대기 줄은 길지 않았다.
용주는 팸플릿을 보고 있는 수지의 얼굴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이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도 알 수 없었고.
그렇지만 딱히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즐거워 보였으니 말이다.
“성인 2명.”
차례가 된 수지가 카드를 건넸다.
보통의 디자인과는 다른 검은색 카드였다.
카드를 건네받은 직원은 놀란 것처럼 보였다.
용주는 카드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따로 계산해 달라는 신호였다.
용주의 카드는 머지않아 품을 떠났다.
직원에 의해선 아니었다.
용주의 카드는 수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이건 내가 잠시 빌릴게.”
카드를 흔든 수지는 그걸 에코백 안에 넣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아까 그 쇼핑백 안에 넣은 것 같았다.
“어이. 너 뭐 하는 거냐?”
용주는 불쾌함을 표했다.
상당히 직설적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음… 커플이시면 할인가 적용되는데, 혹시 커플이신가요?”
눈치를 살피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꼭 두 사람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수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바로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결제를 마친 직원이 영수증과 카드를 건넸다.
수지는 카드를 받았지만, 직원의 손은 아직도 카드를 붙잡고 있었다.
“아…! 아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한 모양이에요.”
화들짝 놀란 직원이 손을 놓았다.
카드를 챙긴 수지는 또 한 번 앞장서고 있었다.
“아쿠아리움 와본 적 있어?”
배치도 앞에 선 수지가 물었다.
“한 번… 와봤던 것 같군. 아마 여긴 아니었을 거다.”
용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쿠아리움에 오지 못하란 법은 없었지만, 굳이 오고 싶은 장소도 아니었다.
용주가 아쿠아리움에 왔던 건 어릴 적 부모님의 손을 붙잡고서였다.
당연하게도 뭔가를 볼 수는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소리뿐.
당시엔 상실감과 부러움이란 감정이 앞장섰던 것 같다.
남들이 뭘 보고 좋아하는지, 신기해하는지, 환호하는지 자신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왜 이런 곳에 데려왔나 원망스럽기도 했다.
가던 곳만 가고, 하던 것만 하면 비교당할 거리도 없는데 하면서.
그럼에도 부모님은 자신을 데려왔었다.
그런 경험들이 언젠가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났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분이 묘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어디부터 가볼까?”
“그런 건 데려온 사람이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정해봐. 자! 여기!”
수지가 팸플릿을 보였다.
내키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인 용주는 팸플릿을 살폈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부모님이 서둘렀던 건 분명….
“특별한 시간에만 볼 수 있는 관람부터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물개라든가 돌고래라든가, 펭귄 같은 거.”
“그래? 그럼 여기 물개부터 보러 가자. 시간 거의 다 된 거 같은데.”
팸플릿에 적힌 시간표를 보던 수지가 앞장섰다.
소리로만 보았던 아쿠아리움.
이건 용주에겐 낯선 여유로움이었다.
“음… 재밌었다.”
아쿠아리움을 나선 수지가 팸플릿을 집어넣었다.
꾸깃꾸깃 구겨지고 용도도 다했을 텐데,
수지는 그걸 끝까지 챙겨 나왔다.
“가보고 싶은 데는?”
“음… 일단 오늘은 끝났어. 자!”
수지가 쇼핑백을 건넸다.
“열어봐도 돼.”
종이테이프를 뜯은 용주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뺏겼던 카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비닐 포장된 무언가.
청구서는 아니었다.
‘뭐지?’
용주는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비닐 안에 들어 있는 건….
다름 아닌 핸드폰 케이스였다.
“단종된 지 좀 오래된 모델인 것 같더라. 몇 군데 둘러봤는데 그거 딱 하나 남아 있었어. 디자인은 썩 마음에 들진 않는데, 아마 지금 것보단 나을 거야.”
수지가 옆머리를 넘겼다.
“이걸 왜….”
예상치 못한 선물에 용주가 말끝을 흐렸다.
수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용주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주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손 좀 줘볼래?”
“손?”
“그래. 그리고 눈도 좀 감고 있어 줘.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내가 왜….”
“그래 줄 거지?”
수지의 눈빛에 마지못해 용주는 손을 내밀었다.
“눈 감으라니까?”
“…그래.”
용주는 눈을 감았다.
용주의 얼굴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보던 수지는 다른 한 손으로 용주의 손등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손엔 은은한 형광빛이 맴돌고 있었다.
“이제 떠도 돼.”
1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용주의 손을 잡고 있던 수지가 이야기했다.
용주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늘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너… 어떻게?”
“부상을 입고 있단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었어. 가슴 쪽에 뭔가 닿는 거 특히 경계하고 있었잖아.”
“…….”
“왜? 혹시 치료하면 안 되는 상처였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치료해 줄 이유 같은 건 없지 않았나?”
“가족이니까. 그 이상 더 필요해?”
자연스럽게 나온 수지의 한마디에 용주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많은 게 달랐지만, 그녀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순간순간 다른 사람이 겹쳐 보였다.
수지는 용주의 손을 놓아주었다.
“좀비는 감정이 있을까, 없을까?”
수수께끼 같은 말을 꺼내놓은 수지가 걸음을 옮겼다.
원을 그리듯 걷는 그녀의 시선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좀비 드라마에서 물어보더라. 주인공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만 하고 답은 안 알려줬어.”
수지가 걸음을 멈췄다.
“난 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욕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왜냐하면….”
호흡을 삼킨 수지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내가 본 좀비는 그랬었으니까.”
수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갈게. 또 봐.”
작은 손 인사를 건넨 수지는 멀어져 갔다.
용주는 그녀가 건넨 케이스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수지의 곁으로 또 한 무리의 남성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무리였다.
용주는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일행 있다.”
작업을 걸던 사내들 앞에 섰다.
용주의 한마디에 사내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 * *
게이트 토벌이 예정되어 있던 12시 정각.
일렁거리는 카오스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던 태영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괜찮은 거냐?”
태영의 상태를 살피던 용주가 물었다.
창백해진 태영의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수십, 수백 번 마인드 컨트롤 하고 왔으니까요.”
품에 지니고 있던 강철 케이스를 연 태영은 청심환 하나를 삼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이번 게이트 토벌의 리더를 맡은 한태영이라고 합니다.”
목청을 가다듬은 태영이 목소리를 냈다.
게이트 앞은 평소보다 훨씬 잠잠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난번 D급 게이트 토벌 당시 모였던 인원은 12명.
이번 게이트 토벌에 모인 인원은 그것의 1/3에 불과한 4명이었다.
“저기 리더, 정말 인원이 이게 끝이에요?”
“D급 게이트 토벌 임무에 헌터가 4명뿐이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은데.”
토벌에 참여한 두 헌터가 이야기했다.
바람머리를 한 헌터와 물범 문신을 한 헌터.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상황이 낯설었다.
“확실히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침착하게 대응하면 게이트 공략엔 문제없을 겁니다.”
“그중 한 명이 E급인데도 말이냐?”
어깨를 들썩인 바람머리 헌터가 용주를 바라보았다.
“문제없을 겁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자신감을 표한 태영이 수첩을 펼쳤다.
“조사된 정보에 따르면 게이트 내부에서 발견된 언노운은 순각류로 분류되는 종입니다. 독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생명력이 질겨서 머리가 잘려도 한동안 움직일 수 있으니 전투에 유의하셔야 할 겁니다.”
태영의 침착한 브리핑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용주는 눈썹을 기울였다.
태영은 스스로를 마인드 컨트롤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지난번 그때와 확연하게 달랐다.
“후. 시작이네요.”
카오스 게이트 내부로 진입한 태영은 안경을 고쳐 썼다.
가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낸 태영은 매뉴얼을 정리했다.
“탐색.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지형의 파악과 수색. 그리고 적의 규모와 배치 등을 측정하는 작업입니다.”
입구에서 이어진 길은 내리막이었다.
빛이 머물고 있었기에 어둡지는 않았다.
“움직이죠.”
선봉에 선 태영은 무기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