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닉네임 좀비헌터-35화 (35/357)

35화

“뭐가 생겼네. 네가 한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테레사가 물었다.

비밀의 방 한편엔 새로 생긴 포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고마워. 도와줘서. 네가 아니었으면 나 아직도 거기 갇혀 있었을 거야.”

“감사받을 일 한 적 없다. 난 그저 내 필요로 널 이용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퉁명스러운 용주의 대답에 테레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을 본 용주는 작은 날숨을 내쉬었다.

“테이고른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검을 기울인 용주가 물었다.

아버지의 입으로 폐륜아란 소리를 들었으니, 마음이 편치 못한 게 정상이겠지.

“아니야. 다 사실인걸. 그치만 여기, 여기가 아픈 건 어쩔 수 없네.”

가슴에 손을 올린 테레사가 입을 앙다물었다.

“네가 한 일이 옳은 일이었는지에 대해 난 판단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네가 지금도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분명 옳은 일이었을 거다.”

용주의 목소리에 테레사가 고개를 들었다.

“난…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

“그럼 된 거다. 고개 숙이지 마.”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테레사가 물었다.

“뱀파이어도 아닌 내게 그걸 묻는 거냐?”

“그럼 여기 누가 또 있겠어.”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다고 그랬었지. 그럼 네가 책임지고 전부 바로잡으면 된다. 잘못된 문화, 잘못된 관습, 잘못된 정책, 그걸 할 수 있는 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뿐이다. 힘과 권력이 있는 군주의 자리.”

“군주….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야 모르지. 난 네가 아니니까.”

걸음을 옮긴 용주는 테레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포탈 앞에 선 용주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너뿐이라고 생각한다. 외롭고, 힘든 길이 되겠지만, 그 무게를 버티는 것도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할 일이겠지.”

“정당한 왕위 계승자…. 나 그런 말 들을 자격 있을까?”

“네 정당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자는 없을 거다. 네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는 너뿐이지. 귀족들과 네 아버지를 살해한 시해자는 나다. 그리고 넌 하룻밤 사이에 아버지를 잃은 한 명의 자식일 뿐이다.”

용주의 이야기에 테레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고 있던 흔들림은 이제 없었다.

“있잖아. 잠시만 손 좀 줘볼래?”

용주에게 다가온 테레사가 물었다.

“손?”

“잠깐, 정말 잠깐이면 돼.”

고개를 갸웃한 용주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용주의 손을 붙잡은 테레사는 손등이 위로 오게 손 모양을 조정했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나 열심히 해볼게.”

“…그래.”

왼손을 내줬던 용주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뺨을 닦아주었다.

걸음을 옮긴 용주는 포탈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또 한 소리 듣겠군.’

다시금 나타난 교대역의 풍경.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용주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현실 시간으로 생각하면 자신이 병원을 탈출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이 몰골이 됐다고 하면, 은정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눈앞에 선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잃어버린 HP를 가장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시체 뜯어먹기 스킬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번 게이트의 경우 그걸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대문짝만한 말뚝이 가슴에 남긴 상처는 아직도 벌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피곤하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니면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그런지 피로감이 상당했다.

현실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자신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단순히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룻밤을 지새운 것 이상의 피로감을 몸은 호소하고 있었다.

“아! 아악!!”

“피… 피!!! 누가 119에 전화 좀 해주세요!”

용주가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작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됐든 이전보다 강해진 건 사실인 거 같은데….

마지막은 영 똑같은 것 같단 말이다.

* * *

지이이잉! 지이이잉!

병원 침대에 신세를 지고 있던 용주는 핸드폰을 집었다.

헌터 길드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전화 받았다.”

“이용주 헌터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신지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건 나영의 목소리였다.

“그래. 무슨 일이지?”

“카오스 게이트 토벌에 참여해주셨으면 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게이트 토벌 의뢰?”

용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이런 연락이 온 경우는 전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참여해 주셨으면 하는 게이트는 D급 게이트입니다.”

“D급 게이트?!”

용주가 다시 한번 물었다.

분명 자신에게 D급 게이트를 들어갈 자격은 없었다.

“그렇습니다.”

“나한텐 D급 게이트에 진입할 자격이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된 거지?”

“거기에 관해선 직접 이야기를 전하고 싶단 분이 계셨습니다. 헌터 길드로 오시면 그분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알았다. 일단 가서 이야기 먼저 들어보지.”

“그럼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방문 일정을 말씀해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금일 15시에 방문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체크리스트를 들고 있는 은정은 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정시에 딱 도착하셨네요.”

헌터 길드로 들어선 용주에게 나영이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가영은 한발 늦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그래서 할 이야기가 있단 사람은 어디 있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기.”

용주의 시선이 그녀를 쫓았다.

1층 로비 한구석에는 익숙한 얼굴의 헌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태영.

수많은 D급 헌터들이 죽어 나갔던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D급 헌터였다.

“좀비 헌터! 역시 나올 줄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부상을 달고 사는 건 여전하신가 보네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태영이 새 커피 한 잔을 용주에게 건넸다.

자리에 앉은 용주는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래. 이야기란 걸 듣고 싶군.”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태영의 물음에 용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

딱히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뭐… 평소보단 좀 바빴지.”

“이야기 들었어요. 쌍둥이 게이트 보스를 혼자 처리하셨다고. 아주 대활약이었다고 그러던데요? 좀비 헌터의 명성이 점점 더 성장하고 있다고요.”

이야기를 이어 가던 태영은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용주는 그가 건넨 수첩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D급과 E급.

최근 몇 주간의 카오스 게이트에 관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을 겪고도 카오스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저는 한동안 게이트는 쳐다도 안 봤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게이트에 안 들어갔다고?”

“네. 한 번도 안 들어갔어요. 자꾸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치가 떨려요. 오한이 돌고, 지금 당장이라도 이 빛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요.”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당시의 태영은 침착했었다.

다른 D급 헌터들과 달리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이를 살리려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일을 겪었으면 누구나 그럴 만도 하지.

자신의 경우.

사건 이후로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계승자니 뭐니 하는 일련의 사건들 뒤로, 곧바로 퀘스트 게이트에 투입됐으니 말이다.

비슷한 느낌이라면 경험한 적 있긴 했다.

심장을 꿰뚫렸던 감각과 손목이 잘려 나갔을 때의 감각.

조금 다른 시기에 그런 감각들에 섬뜩함을 느끼긴 했었으니까.

“그럼 이건?”

태영의 노트를 되돌려준 용주가 물었다.

“습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었더라고요. 병이랑 습관이랑은 종이 한 장 차이라던데, 진짜 그 말이 사실인가 봐요.”

노트를 챙긴 태영은 안경을 고쳐 썼다.

“한동안은 더 잠자코 있을 생각이었어요. 기간은 정해놓지 않았지만,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는 그럴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런데?”

“D급 게이트의 상황이 영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안정화 직전까지 간 게이트의 비율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높아졌어요. 최근 몇 주 사이예요.”

“…….”

“이 변화는 D급에서만 나타나고 있어요. 원인은 분명 저희가 겪은 그 사건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A급 헌터조차 무력화시킨 D급 게이트의 ‘비밀의 방’, 거기에 대한 소문이 이미 쫙 퍼진 뒤니까요.”

“D급 헌터들이 적극적으로 임무에 임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긴급 동원령까진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요. 오로지 D급 헌터들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에요. C급 헌터들 중에서도 D급의 리더를 자처하겠다는 헌터가 눈에 띄게 줄었어요.”

“그래서 너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냐?”

“그런 거창한 거까진 아니더라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충격 요법이라도 시도해 보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눈 떠 보니 제가 리더가 돼 있더라고요.”

태영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게이트 토벌의 리더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이력서에 적힌 꼬리표가 긴 탓이겠죠. 실력은 몰라도 경력이라면 제법 있는 편이니까요.”

“…그래. 그런데 그게 네가 날 부른 거랑은 무슨 상관인 거지?”

태영의 눈치를 살피던 용주가 물었다.

태영이 리더가 됐다고 해도, 그에게 자신을 D급 게이트에 입장시킬 권한은 없을 텐데 말이다.

“이번에 어떤 특별 지침이 내려왔더라고요. D급 이상의 헌터들의 지명이 있으면 특별히 E급 헌터의 D급 입장을 허가한다는 지침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권한이군.”

“맞아요. A급 헌터들에게 있던 그것과 비슷한 권한이죠. 특별 지침이니 영구적인 권한은 아니긴 하지만요.”

“그래서 날 지명하고 싶다? 왜지? 실력이 좋은 헌터들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비밀의 방에서 당신이 보여준 판단과 행동, 그걸 높이 평가했다고 일단 말해둘게요. 그건 감히 제가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티르의 손으론 측정되지 않는 강함의 구성 요소죠.”

“…….”

“그리고 왠지 당신이랑 있으면 이 떨림이 멎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태영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다.”

용주의 머릿속에 지난번 헌터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D급 중에서 자신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면, 자신의 존재를 달가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딱히 상관없어요. 떠도는 소문이 뭐라 말해도, 제가 본 당신은 믿어도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수첩의 페이지를 넘긴 태영이 다시금 방향을 돌렸다.

“토벌 개시는 이틀 뒤 12시 정각. 좀비 헌터가 함께해주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태영의 부탁에 용주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있는가?

자신이 내린 결론은 NO였다.

“그래. 알았다. D급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다면 이쪽도 나쁠 건 없으니.”

“오케이! 그럼 집합 장소랑 집합 시간, 기타 몇 가지 전달 사항 전해드릴게요. 정리해 놓은 게 있으니 문자로 보내드리고 싶은데, 번호 하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태영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래….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지.”

태영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용주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태영은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용주는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태영에게 보였다.

핸드폰 액정엔 등록되지 않은 11자리 숫자가 표기되어 있었다.

“전달해 드릴 건 이 정도면 다 드린 거 같고… 모처럼인데, 저녁이나 한 끼 먹을까요?”

문자 몇 통을 전송한 태영이 물었다.

“정중하게 거절하지. 미리 잡아둔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던 용주가 대답했다.

“음~ 그런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에라도 한 끼 같이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태영이 쓰레기를 정리했다.

용주는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 하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수지.

녀석에게 보냈던 답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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