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이 상태로도 불러지겠지?’
용주의 앞에 여러 패널들이 나타났다.
크기가 아담해져서 그런지 나타난 패널의 크기 또한 상당히 아담했다.
뭔가를 살 수 있는 건 상점 패널이지만 상점에서 구입 가능한 소모품 목록엔 독 같은 건 없었다.
용주가 누른 패널에 적힌 글자는 ‘랜덤 박스’.
누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게 지금 용주가 걸어볼 비장의 카드였다.
소모품 랜덤 박스의 가격은 10골드.
용주의 소지금은 35골드.
기회는 총 3번이었다.
여기서 뭐가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게 해줘.’
간절함을 담은 용주가 박스를 돌렸다.
박스의 개봉 이펙트는 상당히 요란한 편이었다.
요란하게 돌아가던 룰렛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 촉촉한 초코칩
- 겉의 바삭함과 속의 촉촉함이 일품인 초코칩.
- 훌륭한 비상식입니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건 용주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언가였다.
“…….”
용주는 말이 없었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촉촉한 초코칩은 개뿔….’
아이템의 설명을 확인한 용주는 미간을 짚었다.
차라리 안 보는 편이 나았을 정도였다.
‘이딴 걸 넣어놓고 10골드에 판다고? 아니, 애초에 여기서 이런 게 왜 나오는 건데?!’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효과 하나 없는 평범한 과자.
꽝이라고 적어놓지만 않았지 이건 그냥 꽝이지 않은가.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상점에 없는 물건도 나온단 건 이걸로 확인한 거잖아. 기회는 아직 있어.’
남아 있는 두 번의 기회.
용주는 다시 한번 랜덤 박스를 돌렸다.
▷ 질풍의 보석
▷ 상큼상큼 감귤 쥬스
‘질풍의 보석은 그나마 활용도가 있으니 꽝은 아닌데….’
하나는 그래도 아는 물건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써도 밥값은 하는 물건임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름까지 신경 써서 적어놓으니까 더 열 받네.’
처음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멋진 아이템이었다.
퀭한 눈동자를 깜빡인 용주는 다시 한번 인벤토리 목록을 확인했다.
용주의 눈엔 지금껏 신경 쓰고 있지 않던 하나의 목록이 들어왔다.
▷ 골드록의 트로피
골드로 정산할 수 있는 정산품이었다.
‘이거야….’
잊고 있었던 비상금을 발견한 용주는 곧장 상점으로 들어갔다.
트로피의 정산가는 10골드.
야박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의 룰렛을 더 돌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마지막 랜덤 박스.
마른침을 삼킨 용주는 결과를 기다렸다.
▷ 조명탄 MK1.
- 폭발하며 일정 시간 빛을 방출합니다.
- 강한 자외선에 주의해 주십시오.
‘조명탄?’
랜덤 박스 결과를 확인한 용주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기다리던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기다리던 것보다 더 굉장한 게 나온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상황에 이게 나왔다면 아마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조명탄.
카오스 게이트의 이형 신호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 퀘스트 게이트에 진입하고 지금 이 순간까지 제대로 된 ‘밝음’은 없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로 뱀파이어들에게 자외선은 천적.
이들에게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고 하면, 이건 마른하늘에 떨어질 원자폭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
용주는 조명탄을 바라보았다.
딱 하나.
이 방법에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테레사.
테이고른의 필요대로 움직이고 있을 그녀의 육신에 관한 게.
연회장에 만약 그녀가 나타난다면….
“고귀한 피의 선택을 받은 여러분. 모두 즐기고 계십니까?”
테이블 바깥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
큰 호응이 이어졌고, 수많은 인형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자! 그럼 본격적인 연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잔을 채워주십시오!”
테이블보 아래에 계속 몸을 숨기고 있던 용주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늘 이 자리의 축하 담화는 특별히 군주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 명하셨습니다. 모두 군주님께 예를 갖추십시오!”
식탁보 아래로 보이는 좁은 시야에 꿇린 무릎들이 보였다.
인형들은 아예 고개를 땅에 박고 있었다.
용주는 숨을 죽였다.
단 한 번의 호흡도 하지 않은 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애초에 인형이기에 호흡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지만.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들었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당당하고, 권위적이며, 힘이 느껴지는 발소리.
용주는 조명탄을 움켜쥐었다.
발소리는 단 한 명의 것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렇게 기쁜 날 모두 함께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동안 그대들이 보인 충성과 노고가 오늘을 있게 만들었다.”
테이고른의 연설이 시작되자 꿇고 있던 무릎들이 펴지는 게 보였다.
아마 일어나라는 손짓 같은 걸 보낸 모양이다.
“짐은 오늘을 불멸의 밤이라 선언하고자 한다. 짐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며, 너희의 군주 또한 영원할 것이다. 짐과 뜻을 같이한다면 함께 잔을 들자.”
‘지금이다!’
기다렸던 완벽한 타이밍에 뛰쳐나온 용주는 테이고른이 서 있는 발코니를 향해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용주가 기다린 타이밍은 건배를 올리기 바로 직전.
쉽게 말해 ‘위하여!’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때라면 모든 사람의 이목이 딱 한 군데로 집중되어 있을 테니까.
조명탄은 순식간에 빛을 뿜었고, 연회장은 빛에 잠식되었다.
조명탄이라기보다는 섬광탄 같은 최초의 폭발이었다.
쨍그랑!
여기저기서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난무했고, 겁에 질린 인형들의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빛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잦아들었다 해도 눈도 뜨기 힘든 최초의 상태에 비해서 그렇단 거지, 정오의 태양 같은 빛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후작 제크먼을 쓰러뜨렸습니다.
▷백작 레이먼을 쓰러뜨렸습니다.
▷백작 부인 세세를 쓰러뜨렸습니다.
▷자작 테리얼을 쓰러뜨렸습니다.
▷남작 티론을 쓰러뜨렸습니다.
…….
▷자작 롤밤을 쓰러뜨렸습니다.
▷남작 니드빈을 쓰러뜨렸습니다.
▷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200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 대항력이 1 상승했습니다.
용주의 눈앞으로 수많은 이름들이 지나갔다.
단번에 다섯 계단이나 오른 레벨.
전투가 아닌 방법으로 정말 쓰러뜨릴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단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한 번에 합산된 골드는 대략 200골드.
여태껏 쥐어본 적 없는 양이었다.
퀘스트 클리어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는 테이고른이 서 있었을 발코니를 올려다보았다.
발코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엔 공허함이 맴돌았다.
바닥엔 깨진 유리조각과 흘러내린 포도주가 흥건했다.
용주는 백작이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의 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마다.
뱀파이어 귀족들이 서 있던 자리 자리마다 회색의 가루들이 쌓여 있었다.
인형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이도 있었고, 테이블보 아래로 숨는 이도 있었다.
▶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 폭군 테이고른의 정수를 파괴하십시오.
- 제압되어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한 경우 남은 HP에 관계없이 퀘스트에 실패하게 됩니다.
- 테이고른의 ‘순혈의 잠식’ 스킬에 저항하기 위해선 최소 2 이상의 대항력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거기까지 가야 끝나는가 보군.’
새롭게 부여된 퀘스트.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용주는 숨을 골랐다.
막연하기만 했던 이 퀘스트 게이트에서의 일이 이제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올라가던 이름 중 테이고른의 것은 없었다.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분명 자외선에 직격당했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제한 시간은 따로 적혀있진 않아. 대신….’
퀘스트에 제한 시간은 없었지만, 무력화라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력화는 병사들에게 제압당하는 것.
귀족들은 전멸했지만, 아까 백작 부인을 에스코트했던 자나, 저택 1층에서 보았던 경비병들은 아직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회장에 창문은 없었다.
연회장의 출입구 역시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바깥에선 안쪽의 상황을 아직 인지하고 있지 못하단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마 시간문제일 것이다.
예정된 연회 시간이 끝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면, 분명 누군가 이상을 감지할 테니까.
그다음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테이고른에게 제압당하는 것.
테이고른은 테레사의 육체를 지배했다고 했었다.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 자신 역시 같은 처지에 처한다면 그거 역시도 퀘스트 실패였다.
용주는 퀘스트의 마지막 문장에 다시 한번 눈길을 주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가장 시선을 사로잡았던 문장이었다.
‘대항력…. 드디어 언급되는군.’
언급된 ‘순혈의 잠식’이란 스킬은 필히 한 번에 자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스킬일 것이다.
거기 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 언급된 게 바로 대항력.
그동안 사용처를 알 수 없던 이 기묘한 능력치가 처음으로 언급된 순간이었다.
▷ 테레사의 변신 인형의 지속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 변신이 해제되었습니다.
용주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가자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많은 수의 인형들이 용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혼란 속에서 익숙함에 의존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뱀파이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출입구를 열지 않고 여길 나갈 수 있는 장소는 한 군데뿐이야.’
용주는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용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건…?’
보랏빛의 불꽃.
조명탄의 빛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불꽃은 점점 구의 형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비슷한 걸 본 적 있었다.
테레사가 자신에게 건넨 영혼 정수.
한 점으로 집중되는 속도에서 큰 차이가 있었지만, 저건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영혼의 정수?’
2층 테라스에 있던 이는 테이고른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건 테이고른의 영혼 정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러했다.
‘이렇게 쉽게 끝내준다고?’
첨예검을 꺼낸 용주는 망설임 없이 검을 집어 던졌다.
직선으로 날아간 검은 그대로 영혼을 꿰뚫고 있었다.
불꽃을 꿰뚫은 칼날은 벽에 처박혔다.
후욱!
칼날에 찢긴 영혼 정수는 소멸하지 않고 안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칫!”
테이블 위로 뛰어오른 용주는 곧바로 분수를 향해 도약했다.
흘러넘치는 물결을 짓밟는 용주의 발.
분수의 가장 높은 곳에 발을 올린 용주는 다시 한번 힘껏 뛰어올랐다.
‘잡았어!’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은 용주는 난간을 타고 넘었다.
테라스엔 검은 망토를 두른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이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용주는 상황을 단번엔 이해할 수 있었다.
퍼즐 조각은 가지고 있었다.
테레사의 인형.
테이고른의 영생.
그가 말한 불멸의 밤.
여기 쓰러져 있는 건 테이고른이 새로 손에 넣은 인형의 육체였다.
인형들은 빛에 타죽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도 확인된 바였다.
다만, 뱀파이어인 그의 정수는 이야기가 다른 모양이다.
소멸은 피했지만, 더 이상 인형의 몸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
지금 녀석의 영혼은 육체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용주의 눈동자는 곧장 테라스 안쪽으로 향했다.
도망치기 시작한 영혼 정수는 벌써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놓칠 줄 알고!”
거칠게 검을 뽑아낸 용주는 속도를 높였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던 영혼은 급하게 코너를 돌고 있었다.
* * *
팡!!
울려 퍼지는 거친 소리.
닫혀 있던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용주는 사방을 경계했다.
테이고른의 정수를 따라 들어온 이곳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20… 아니, 40은 족히 되겠군.’
테이고른의 영혼 정수가 향할 곳이라면 필히 그의 육신이 보관되어 있는 곳.
그 장소는 테이고른과 아무리 신뢰가 두터운 자라고 할지라도 알 수 없을 장소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있다면, 지배당한 테레사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군. 저 녀석들도 지배당한 녀석들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용주는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저기 서 있는 뱀파이어들은 어떠한 반응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