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안뜰에 들어서면 이 꽃 리본을 풀어. 그럼 주변 인형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가는 게 한결 수월해지겠지. 다른 뱀파이어나 인형들 눈에 들지 않고 저택에 들어가려면 저택의 후문을 이용해야 할 거야. 오래된 별채에 후문이 있어. 인형의 몸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손가락을 움직인 테레사는 저택에 대략적인 구조도를 그려 보였다.
정원의 대략적인 구조도와 별채에서부터 이어진 저택 내부의 구조도.
두 가지 구조도를 그린 테레사는 용주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테레사의 물음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동자에 핏기 짙은 피부. 넌 우리랑 다른 거지? 그치?’
“적어도 난 박쥐로 변신하지는 못하지.”
‘역시 그렇구나.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하다 싶었었거든. 있잖아. 저택에 무사히 도착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
‘응. 내 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좀 할까 해서. 언제까지고 이 몸에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냥 내가 준 걸 내 몸이 삼키게 해주면 돼. 어때? 네가 날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줄게.’
▷ 사이드 퀘스트 - 테레사의 부탁 2
- 인형이 된 그녀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의뢰했습니다.
- 수락하시겠습니까?
* * *
“날 도와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 거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용주가 물었다.
테레사가 말한 도움의 시점은 잠입 이후의 시점이었다.
잠입 이후 어떤 일이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암살일 수도, 강도일 수도 있고, 그냥 거기서 퀘스트가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 반역.
심하면 폐륜까지 될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응, 알고 있어. 뭐가 됐든 각오하고 있어.”
“…그래?”
용주가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인형의 눈에서 각오가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원래대로라면 미친 소리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알았다. 도와주지.”
“와아, 정말이야? 정말 고마워.”
“단 성공을 보장할 순 없다. 최악의 경우….”
“응. 괜찮아.”
용주의 이야기를 가로챈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용주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용주의 이야기가 끝나자 수락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난 뭘 가져가면 되는 거지?”
용주가 물었다.
“음…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준비해 줄게.”
가볍게 움켜쥔 테레사의 손에서 불길 한 점이 일렁였다.
불꽃은 곧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고, 이윽고 도깨비불이 되었다.
조그마한 인형의 손과 대비되어 그런지 도깨비불은 상당히 커 보였다.
“자, 받아. 이게 내가 부탁할 물건이야.”
테레사의 손을 떠난 도깨비불은 용주의 손에 들어왔다.
▷ 테레사의 영혼 정수
- 테레사의 영혼이 담겨 있는 정수입니다.
용주의 앞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출력되고 있었다.
‘영혼 정수…. 이걸로 인형으로 옮겨 왔단 건가?’
도깨비불을 바라보던 용주의 시선이 테레사 인형으로 향했다.
석관에 걸터앉아 있던 인형은 힘없이 안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 * *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는 언덕.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용주는 손에 들린 인형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인형은 아기자기한 여자 인형이었다.
자기가 직접 변신하는 방법인 줄 알았다면, 적어도 남자 인형을 골랐을 텐데 말이다.
‘뭐 하는 수 없지.’
저택으로 향하는 뱀파이어를 발견한 용주는 인형을 사용했다.
시야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풀, 나무 그 모든 게 거대한 게 순식간에 거인국으로 끌려온 기분이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태가 안 좋은데?’
용주는 손발을 움직여 보였다.
손발을 움직일 때마다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인형을 잘못 고른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관절을 이끌고 수풀을 빠져나온 용주는 인형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꺄르륵!”
테레사의 말처럼 이상을 감지한 이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머! 거기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죠? 어서 대열 맞추세요!”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것도 잠시.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에 용주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형이 늘어났다는 건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녀의 규칙에서 벗어난 행동은 곧장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다른 인형들을 살핀 용주는 눈치껏 자리를 잡았다.
여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정문으로 당당하게 입성한 용주는 무리에서 떨어질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택에 제법 다가간 용주의 눈에 다른 인형들이 보였다.
인형들은 세 명의 여인과 함께 있었다.
인형은 자신까지 대략 30개.
용주는 리본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어떻게 움직이고 또 누구를 만날지는 용주가 계산할 수 있는 범위 밖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난리 치는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용주는 꽃 리본을 꺼내 들었다. 테라사가 인형들을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며 건네준 리본이었다.
용주가 리본을 잡아당기자 인형들이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것들이 왜 이래?”
“당장 자리로 돌아와요! 명령이에요!”
여인들이 통제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형들은 미친 사람마냥 웃으며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공격성을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인형들의 웃음소리에 정체를 숨긴 용주는 조용히 시야에서 벗어났다.
통제를 벗어난 인형들의 소동에 저택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상당수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인형의 몸이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란 게 그런 소리였나?’
경비 하나 없는 후문에 도착한 용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닐까 싶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다.
저택의 문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인간의 몸이면 통과할 수 없는 작은 틈이었지만, 인형의 작은 몸으로 거길 통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폭군 테이고른의 저택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 대항력이 1 상승합니다.
저택 내부로 들어서자 퀘스트 성공 알림이 용주를 반겼다.
그리고.
▶ 다음 제시된 타깃들을 제거하십시오.
1. 후작 제크먼
2. 백작 레이먼
3. 백작 부인 세세
4. 자작 테리얼
5. 남작 티론
- 제한 시간 2시간.
새로운 퀘스트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이게 대체 몇 명이야?’
새로운 퀘스트를 마주한 용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막연함이었다.
‘백작 부인…. 이자 정도는 누군지 알겠는데….’
다섯 명 중 한 명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름은 몰랐지만, 백작 부인이란 타이틀을 아무나 가지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 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다.
제시된 타깃은 총 다섯 명.
제한 시간은 2시간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만 해도 23분 전후로 한 명씩은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단순 계산으론 턱도 없었다.
저들이 저택에 모여 있다는 건 한 명만 제거해도 최고 수위의 경계 태세가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저들은 수많은 호위 속에 대피하게 될 테고.
하나라도 놓치면 퀘스트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컸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하나씩 처리한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나마 떠오르는 방법이라면 알아채는 이 없이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는 방법이었다.
타깃 암살 게임의 암살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가능성이 커 보이지는 않았다.
‘한 곳에서 동시에 처리하는 것도 쉽진 않을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스킬이 있다고 해도 저택에 있는 전원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지금은 일단 움직여야 해.’
정보를 가장 자유롭게 모을 수 있는 시간은 이 변신 인형이 지속되는 동안이었다.
용주는 테레사가 그려준 저택의 구조도 떠올렸다.
빠른 시간 안에 공략을 위한 단서를 잡아야 했다.
* * *
별채를 지난 용주는 본관으로 들어섰다.
청소하는 인형들이 있었기에 별채도 그리 지저분한 편은 아니었지만, 본관의 화려함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본관에는 경비 인력이 대거 배치되어 있었다.
면적 대비 수로 계산하면 바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숫자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는 수많은 인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형들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나르는 개미들을 연상케 했다.
왕복하는 두 개의 차선이 있었고, 저마다의 머리 위에는 어깨보다 넓은 접시들을 이고 있었다.
덥석!
용주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찰나의 순간.
손목을 잡는 강렬한 손길이 용주에게 전해졌다.
깜짝 놀란 용주는 옆을 바라보았다.
용주를 붙잡고 있는 건 어느 한 뱀파이어였다.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고 그래요! 연회 준비가 늦었어요! 빨리 이거 가져가요!”
강제로 접시 하나를 들게 된 용주는 대열로 던져졌다.
아마 용주가 처음부터 여기서 일하던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회라고?’
용주는 대열을 따라 이동했다.
연회라 하면 높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란 뜻이었다.
제거해야 하는 타깃들도 높은 확률로 모일 터.
방법만 찾는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 퀘스트를 성공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오늘도 멋지십니다.”
“아름다운 연회네요.”
“다 테이고른 님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1,000년 숙성한 와인으로 하는 건배. 벌써 기대되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핫!”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이야기들이 귓가를 오갔다.
연회장의 크기는 엄청났다.
붉은 분수가 피어오르고, 은은한 빛을 머금은 샹들리에가 천장을 수놓았다.
바닥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고, 테이블마다 접시가 가득했다.
접시의 대부분은 고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생고기 말이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와인 글라스였다.
와인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모양이다.
‘백작 부인…. 일단 한 명은 찾았고.’
다른 인형들을 따라 움직이며 용주는 타깃을 색출해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건 백작 부인.
그녀는 단안경을 낀 사내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백작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단 가능성은 있다고 봐도 좋았다.
용주는 연회장을 총 3번 왕복했다.
연회장에 모인 인원 중 유독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자.
연회장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자.
활동 범위가 넓고,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자.
대화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언급된 자.
그런 나름의 시선에 입각해 분석해 본 결과 특출나게 눈에 띄는 인원이 총 7명 있었다.
3명은 이름이 확실하게 거론된 인물이었다.
타깃 중 나머지 둘이 누군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하지만 용주는 저들 중 그 2명이 있을 거라고 100% 확신하고 있었다.
‘5명을 처리할 방법이 있으면 같은 방법으로 7명을 처리할 수도 있을 거야.’
3+4를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타깃에 대해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녀석들을 어떻게 잡느냐 하는 건데….’
생각에 잠긴 용주의 머리에 아까 들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연회장을 오가며 들었던 수많은 대화들.
그중에 한 가지 이야기가 용주의 머리를 때렸다.
이야기 중엔 분명 건배 타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와인에 독을 섞을 수 있다면?’
여러 의문이 들었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세 가지였다.
독은 어디서 구하는가?
뱀파이어에게 독이 효과가 있는가?
전투 이외의 방법으로 정말 저 녀석들을 죽일 수 있는 건가?
저택 내부에 그런 맹독이 구비되어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시간 안에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물음은 첫 번째 물음이 해결되면 자연스레 답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연회의 개최도 인형의 변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여기 걸어볼 거면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수밖에 없어.’
조용히 대열을 이탈한 용주는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비장의 카드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쪽도 이쪽만이 꺼낼 수 있는 카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