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백반…인가?’
붓글씨로 직접 쓴 메뉴는 딱 3개였다.
백반.
제육볶음.
계란말이.
가격은 모두 더해봐야 1만 원 정도로 요즘 물가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오늘은 못 보던 분이랑 함께네요? 잘 생겼네. 키도 크고.”
시원은 물 한 병과 컵 두 개를 가져다준 주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아! 이분은 말이죠….”
“음음, 알아요, 알아. 나이가 몇인데 척 보면 척이죠.”
“네…?”
“멋진 선남선녀 한 쌍이에요. 정든 입장에서 아가씨 쪽이 쪼금 더 아까운 것 같긴 하지만요. 안 그래요, 영감?”
주인 할머니의 이야기에 은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아니에요! 저랑 용주 씨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은정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설마 이런 오해를 사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이름이 용주인가 보구만?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연상인가? 사귄 지는 얼마 안 됐고?”
“아니, 정말 아니라니깐요. 그리고 용주 씨 저보다 어려요. 연하라고요.”
“음~ 연하라. 역시 우리 아가씨 능력 있네. 우리 영감도 연하야. 아무것도 모를 때 내가 확 낚아챘었지.”
“할머니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새 부리가 된 은정의 입술에 주인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서 주문은 어떻게 하시려고?”
“백반 두 개에 제육 하나, 계란말이 하나 주세요.”
“영감, 들었지?”
주문이 들어가자 주인 할아버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메인 셰프는 할아버지 쪽인 모양이다.
“편하게들 이야기해요. 둘만 있다고 생각하고.”
인자한 눈웃음을 지어 보인 주인 할머니는 부엌으로 향했다.
용주의 얼굴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던 은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죄송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사과하지 마.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
물통의 뚜껑을 딴 용주는 빈 잔을 채웠다.
용주의 한마디에 은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방금 거기서 서운할 것도 딱히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나와서 같이 밥 먹는 건 처음이던가요?”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은정이 물었다.
“그런 것 같군.”
“이 집 반찬 잘 나와요. 할아버지 손맛도 일품이고, 밥이랑 밑반찬도 더 달라면 더 주시고요. 병원 식당도 물론 잘 나오지만, 전 개인적으로 여기가 더 좋더라고요.”
“의외군.”
용주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반찬의 가짓수는 대략 12가지.
제육볶음과 계란말이를 빼더라도 상당한 양이었다.
“의외라니요? 혹시 제가 막 고급 레스토랑이라도 가자고 할 줄 알았어요?”
“부정하진 않지.”
“음…. 저 그런 이미지였나요?”
“네가 그런 이미지였단 건 아니다. 그냥 내 편견이었지.”
어깨를 들썩인 용주는 물티슈를 뜯었다.
국과 밥.
그리고 주문했던 나머지 반찬들은 속속들이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짧은 기도를 올린 은정이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그런 은정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붕대로 꽁꽁 감긴 용주의 손.
은정은 그제야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은정이 집은 계란말이는 은정이 아닌 용주의 공깃밥 위에 올라가 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용주 씨 상태를 모르지도 않았는데.”
“신경 쓰지 마. 검도 쥐고 있었는데, 젓가락 하나 못 잡으려고.”
젓가락을 집은 용주는 보란 듯이 젓가락질을 해보였다.
약간의 통증은 있었지만, 이 정도면 애교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젓가락질하기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양푼 달래서 비빔밥 만들어 먹어도 맛있으니까.”
“참고하지.”
용주는 은정이 건넨 계란말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맛은 매우 훌륭.
간도 딱 맞고, 덜 익지도, 너무 많이 익지도 않은 딱 부드러운 상태였다.
“깔끔하게 다 비웠네. 잘 먹는 모습 보니 기분이 좋아.”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을 반긴 주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반찬 그릇은 하나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서비스로 나간 꼬막 무침까지 말이다.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우리 영감 솜씨 아직 쓸 만하지? 용주랬던가? 젊은이는 어땠어?”
“맛있었습니다. 집밥보다 더 집밥 같네요.”
용주의 대답에 은정의 눈초리가 변했다.
이거, 자기를 대할 때랑은 말투가 영 딴판이지 않은가.
뭐…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 딱딱한 말투로 어르신들께 반말을 했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였으니 말이다.
용주는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런 용주를 제지한 이는 다름 아닌 은정이었다.
“여기요. 잘 먹었습니다.”
카드가 아닌 현금을 내민 은정이 이야기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용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분명 자기한테 쏘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말이다.
“아~ 잘 먹었다. 완전 배부르네요. 그쵸?”
식당 밖으로 나온 은정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선선한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계산은 나보고 하라고 했던 거 아니었나?”
“처음에는 그랬는데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왜지?”
“용주 씨 목숨 걸고 죽어라 번 돈이잖아요. 쓸 돈이 있으면 본인이랑 동생분을 위해 써야죠.”
“…….”
“그리고 용주 씨 카드밖에 안 가지고 있잖아요. 여기 카드 안 된단 말이에요.”
고개를 든 은정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달은 홀로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헌터 일은 좀 어때요? 할 만해요?”
은정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할 만하냐 아니냐 할 일은 아니다만… 굳이 따지면 조금은 할 만해진 것 같군.”
용주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부상을 피할 순 없었지만, 계승자가 되고 나서 많은 것이 바뀐 건 사실이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뒷짐을 진 은정은 크게 심호흡을 해보였다.
은정이 보는 용주는 항상 정상 상태를 벗어나 있는 모습이었다.
찢겨 피 흘리는 고통스러운 모습.
그런 모습만 봐왔기에 용주의 말이 크게 신뢰가 가진 않았다.
하지만 용주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저 말이 진심이든 착한 거짓말이든 말이다.
“그럼 돌아가요.”
싱긋 웃어 보인 은정이 앞장섰다.
그녀를 따라 걷던 용주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교대역 인근.
사람보다 차가 더 많은 거리를 걸어가던 용주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찍힌 부재중 전화가 3통.
같은 번호로 온 문자가 5통 도착해 있었다.
- 용주 씨, 저 최은정인데요. 지금 어디예요? 왜 병실에 아무도 없어요?
- 보면 전화 받아요.
- 설마 가신 거예요? 퇴원 수속도 안 밟고요?
- 무슨 급한 사정 있으신 거예요?
- 알았어요. 더 안 물어볼게요. 대신 너무 무리하진 마요. 상처 덧나니까.
메시지를 확인한 용주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은정에게 좀 미안했지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멀리 보이는 대검찰청 건물을 배경 삼은 용주는 팔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큰 상처들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지만, 잔 상처들의 회복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 ‘폭군 테이고른의 저택 지도’
- 폭군 테이고른의 영토와 그의 저택이 표시된 지도.
- 폭군 테이고른의 영지는 지정된 개방 시간에만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개방까지 남은 시간 : 앞으로 10분.
‘10분 남았군.’
용주가 여기 있는 이유는 계승자로서의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3분이 남고, 2분이 남고, 1분이 남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방 시간이 0분을 가리키자마자 자욱한 안개가 사방을 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변화하는 주변 풍경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용주는 이미 딴 세상에 와 있었다.
잿빛 하늘과 검은 대지.
도시와는 거리가 먼 풍경 속으로 들어온 용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어느 한 구릉이었다.
언노운이나 괴물이라 할 만한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식물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생김새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식물들의 줄기는 회색이었고, 잎사귀는 야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테이고른의 영지인가?’
카오스 게이트와도, 지난번 들어섰던 퀘스트 게이트와도 다른 개방감이었다.
이전 게이트는 카오스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동굴, 혹은 개미굴이 생각나는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봐도 저택 근처는 아니군.’
조금 더 먼 곳으로 시야를 넓힌 용주가 눈썹을 기울였다.
용주의 눈동자엔 한 고성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고성의 모습은 마치 80년대 영화에 나오는 드라큘라 저택 같았다.
저택 주변엔 정원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얼핏 봐도 엄청난 크기였다.
저택의 정원이라기보다는 왕궁의 터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저택’이라는 단어를 보며 용주는 그게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었다.
이전 퀘스트 게이트에선 인위적인 건축의 흔적을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돌산 위에 세워진 바위 첨탑.
뭐, 그 정도 이미지지 않을까 싶었건만, 저기 보이는 건 용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위적인 건축물이라….’
용주는 자신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여러 상황이 그때와는 다르긴 했지만, 낯선 세계에서 보는 익숙함은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편법은… 통하지 않은 모양이군.’
마음을 진정시킨 용주는 다시금 상황을 분석했다.
지도에 표시된 저택의 위치.
대략적인 추측으로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긴 했었다.
편법이라면 편법이고, 전략이라면 전략.
도박이라고 하면 도박으로 볼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 부질없는 행동이었던 모양이다.
저택과의 거리감과 저택이 보이는 방향.
두 가지로 미루어 보건대 자신의 위치는 자신이 서 있던 그 장소와는 전혀 달랐으니 말이다.
아마 시작 위치가 정해져 있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걸 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불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머리를 긁적인 용주는 걸음을 조금 옮겼다.
시작과 동시에 퀘스트에 실패하는….
그러니까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에게 발각되는 경우의 수를 없애준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미리 말해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걸음을 멈춘 용주는 손을 뻗었다.
식물과 식물 사이에 엉킨 넝쿨에는 무언가 걸려 있었다.
‘인형?’
용주의 손안에 들어온 건 인형이었다.
적어도 용주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인형은 인간의 모습을 베이스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이 입었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인형의 얼굴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단어보다 섬뜩함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였다.
인형의 얼굴빛은 상당히 창백했다.
살구색보단 회색이나 하얀색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며, 눈동자는 짙은 빨간색이었다.
‘이런 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뭔가를 추측하기엔 단서가 너무 적었다.
용주는 인형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금은 여기 이런 게 있다라는 것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정보를 좀 더 모을 필요가 있겠어.’
잠입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아무리 작은 정보라도 좋았고.
아무리 쓸데없어 보이는 정보라도 좋았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인데….”
턱을 괸 용주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꺄르르륵!”
“히히힛!”
그런 용주의 귀에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작은 소리는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용주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