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체력이 올라간다고 HP가 올라가는 방식은 아닌가 보군.’
HP란 개념은 보통 생명력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었다.
레벨에도 능력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마 생명력 수치는 고정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긴, 그런 걸로 명줄이 길어진다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하지.’
용주는 어깨에 남아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첫 교전 때 할퀴어졌던 상처였다.
62.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HP의 수치와 함께 상처 또한 아물어가고 있었다.
‘의료 헌터가 없어도 회복할 수 있다라…. 이거, 내가 생각한 것보다 굉장한 스킬일지도.’
용주는 3개의 여분 능력치를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사용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레벨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능력치도 오르니, 필요한 상황이 오면 필요한 만큼 사용할 생각이었다.
네 개의 주요 스탯이 올라갔다고 해서 뭔가 변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지도, 더 민첩해진 것 같지도, 체력이 더 좋아졌다든가, 더 똑똑해졌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상승 폭이 너무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도 들었다.
프로그래밍 된 게임도 아니고, 단순한 숫자놀이로 사람이 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고민해 봐야 더 나오는 것도 없겠지.’
용주는 오르지 않은 다른 하나로 시선을 옮겼다.
대항력.
레벨이 상승하는 걸로 오르지 않고, 스탯의 영향 역시 받지 않는다면, 아까처럼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남은 건….’
용주는 스테이터스창을 닫았다.
2골드.
생각해야 할 건 이제 그거였다.
‘일단 가상의 화폐 단위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현실에서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아니었다.
아마 현금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왜 녀석을 잡으니 이런 게 나오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진짜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골드란 것의 사용처.
용주는 거기에 대해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저 놀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 물건을 살 수 있을 리는 없는 것 같고…. 물건을 파는 상인 같은 누군가가 존재하는 건가?’
생각에 잠겼던 용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메뉴 패널에 이전에 없던 뭔가가 생겨 있었다.
상점.
그렇게 명명된 메뉴가.
‘상점?’
몇 번을 되짚어 봐도 없던 메뉴였다.
용주는 상점 패널을 활성화했다.
패널 내부는 크게 구입과 판매 메뉴로 나뉘어 있었다.
구입은 ‘소모품’과 ‘무기’, ‘랜덤 박스’, ‘기타’ 등으로 나뉘어 있었고, 아무런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텅 빈 창도 존재했다.
소지금은 2골드.
용주는 우선 구입 가능한 장비를 확인해 보았다.
▷ 놀의 송곳니 롱소드 - 100골드
▷ 놀의 갈퀴 클로 - 90골드.
▷ 놀의 어금니 창 - 50골드.
판매하고 있는 무기는 현재 3종류.
세 무기의 금액에 비해 현재 용주가 가지고 있는 골드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50에 90에 100. 2골드론 어림도 없군.’
무기마다 착용 가능한 레벨과 스탯, 공격력 따위가 표기되어 있었다.
시선을 옮긴 용주는 이번에 구입 가능한 소모품을 확인했다.
▷MP 회복 물약 (5) - 10골드
- 사용 시 MP를 5만큼 회복시킨다.
▷투기의 보석 - 5골드.
- 사용 시 30초 동안 공격력을 20% 증가시킨다.
‘MP 5 회복에 10골드인가?’
HP와 관련된 상품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건 MP와 공격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켜주는 물약뿐.
‘한 마리에 2골드씩 준다고 가정하면 10골드면 5마리. 내가 총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앞으로 두 번. 타산 안 맞는 장사군.’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소모품조차도 용주가 얻은 골드로는 살 수 없었다.
MP의 회복은 HP에 비해 상당히 더딘 느낌이 있었다.
제한시간은 24시간.
‘물어뜯기’ 스킬에만 의존했다가는 아마 제시간 안에 클리어하지 못할 것이다.
‘그다음은….’
랜덤 박스.
이름만 들어도 썩 와닿지 않는 품목이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둬야겠지.’
▷ 무기 랜덤 박스 - 100골드.
▷ 소모품 랜덤 박스 - 10골드.
물품을 확인한 용주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들어있길래. 가격 측정이 이리 돼 있는 거지?’
물품의 리스트나 확률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가격은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무기와 소모품의 최고가격과 동일.
어지간해선 건드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용주는 상점창을 닫았다.
기타 항목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 * *
▷ ‘놀 투사’를 쓰러뜨렸습니다.
▷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3골드를 획득했습니다.
“퉤!”
난잡하게 뜯긴 살덩이가 땅을 뒹굴었다.
부패한 듯 보이던 용주의 입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첫 교전 이후 몇 차례의 교전이 더 있었다.
용주의 현재 레벨은 4.
동시에 3마리를 상대했던 탓에 용주의 몸 여기저기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물어뜯기를 사용했기에 이 정도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스킬들이 상처를 회복시켜준다고 해서, 상처가 생기는 순간과 그 이후와 고통을 줄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건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불만은 없었다.
전투의 지속력 면에서도.
고통이 지속되는 시간적인 면에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동시에 3마리는 역시 좀 버겁군.’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용주는 잠시 시간을 가졌다.
다른 상처는 그렇다고 쳐도 동그랗게 뜯겨나간 허벅지는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3마리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곳에 있는 놀이라는 개체는 E급 언노운과 얼추 비슷했다.
E급 언노운을 동시에 3마리를 상대한다….
원래 같았으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남은 시간은… 15시간….’
이곳에 들어선 지도 언 9시간이 흘렀다.
전투와 회복의 비율은 대략 1:9 정도.
한 번의 전투 이후 회복에 필요한 시간은 압도적으로 길었다.
‘재생’의 레벨은 이제 3.
레벨이 올랐다고 해서 뭔가가 체감되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첫 교전 이후 용주는 자신을 관찰해왔다.
그 결과 스킬의 사용 유무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은 전투의 난이도가 크게 달라졌다.
검을 이용해 한 녀석을 제거하기 위해선 많은 계산과 동작을 필요로 했다.
자신이 평소 하던 그대로의 방식이었다.
전투는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동등 혹은 그 아래의 존재로서 도전장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물어뜯기를 사용한 전투의 흐름은 기존과 많이 달랐다.
한번 물어뜯으면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만난 놈들과의 전투는 그러했다.
자신이 녀석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 포식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건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다른 하나는 회복에 관한 부분이었다.
‘물어뜯기’ 스킬엔 HP 회복 효과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체감은 즉발적이었다.
비유하자면 적의 살점을 뜯어내는 즉시 내 상처가 아무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 효과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텍스트로만 스킬을 접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실전에서의 그 효과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건 신경 써야겠어.’
눈동자를 굴린 용주는 세 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한 구의 시신에는 검이 남긴 상처가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구는 아니었다.
두 구의 시신의 치명타를 날린 건 목덜미가 뜯겨나간 잇자국.
놈을 물어뜯는 순간 용주는 또다시 그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강렬한 살육의 충동 말이다.
‘그래도 녀석들을 상대하는 게 처음보단 좀 쉬워진 것 같아.’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녀석들의 움직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그냥 느낌일 수도 있고.
하지만 방금은 조금 다른 생각이 함께 들었다.
상승한 레벨이나 능력치….
혹시 그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뭐가 됐든 제대로 찾아오긴 한 모양이니 괜찮겠지.’
찢겨 나갔던 허벅지의 상처가 회복된 걸 확인한 용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하려고 한다면 피할 수도 있는 전투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교차로의 한쪽 벽면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색을 머금고 있었으니 말이다.
밝은 갈색을 띠는 골목.
그 안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간 용주는 자세를 낮췄다.
바위 너머로 보이는 오르막길엔 수많은 뼈가 흩어져 있었다.
‘사람의 두개골은 아니군.’
얼핏 봐도 그러했다.
인간의 두개골이라기보다는 늑대나 하이에나의 두개골에 더 유사했다.
이 굴에서 다른 생명체는 목격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정보만으론 놀의 두개골이라고 이해하는 게 맞으리라.
‘서로가 서로를 공격했다기엔 지리적인 면에서도 상황적인 면에서도 부자연스럽군….’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영토를 두고 다툰 것이거나 서로 먹고 먹히는 식의 관계를 지닌 종족 분쟁은 아니라고 추측됐다.
두개골을 비롯한 많은 유골에는 같은 크기와 깊이를 가진 상처가 여럿 관찰되었다.
‘상위 포식자가 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으려나?’
상위 포식자.
거기에 떠오르는 한 녀석이 있었다.
우두머리 골드록.
클리어 조건으로 제시되어 있던 바로 그 녀석의 존재였다.
들어본 적 있었다.
게이트 보스 중에서도 같은 언노운을 잡아먹는 개체가 간혹 있다고.
그게 허기가 지기 때문인지, 힘을 키우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순 놀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그런 게이트 보스와 우두머리 골드록이란 놈의 성향이 비슷하다면, 녀석은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상점을 연 용주는 소모품 탭을 눌렀다.
가지고 있는 골드는 총 20골드.
용주는 그중 15골드를 투자했다.
구입한 것은 투기의 물약 하나와 MP 회복 물약 하나.
구입한 품목은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었다.
‘필요한 순간이 생길지도 몰라.’
인벤토리에서 꺼낸 투기의 보석을 손에 쥔 용주가 보석의 표면을 문질렀다.
현재 HP는 90.
MP는 9가 남아 있었다.
상점에서 무언가를 구입해 보는 것도, 그걸 꺼내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조금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 해보자고.’
보석을 다시 집어넣은 용주는 걸음을 옮겼다.
낯설어야 할 기괴한 소리가 저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오르막을 오른 용주는 탑처럼 쌓인 뼈 뒤로 몸을 숨겼다.
저 앞에 있었다.
황금색 털을 가진 생명체가.
놀 투사를 뜯어먹고 있는 거대한 녀석이.
‘종족 자체는 같아 보이는데….’
생김새나 골격을 보면 녀석도 놀의 일종으로 보였다.
이족 보행 야수형 언노운 말이다.
하지만 놈의 이빨과 발톱은 일반적인 개체보다 더 발달해 있었으며, 몸집도 1.5배에서 2배 정도 거대했다.
힘도 속도도 아마 일반 개체보다 한 수 위일 것이다.
으드드득!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살을 씹던 골드록은 먹잇감의 어깨뼈를 뽑아냈다.
고개를 돌린 골드록의 눈동자는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툭!
이윽고 그의 입을 떠난 주인 없는 외팔.
용주가 숨어 있던 뼈 탑엔 피가 흐르며 붉은 수직선이 생기고 있었다.
‘날카롭군.’
검을 움켜쥔 용주는 모습을 드러냈다.
더 숨어 있어 봤자 의미가 없었다.
일반 개체 이상으로 청각이나 후각이 발달한 개체인 모양이었다.
“꺼헝! 허허헝!!”
특유의 소리를 내지른 골드록은 남아 있던 놀의 시체를 집어 던졌다.
여기저기 널린 뼈 무덤으로 날아간 놀의 시체.
유독 긴 왼팔로 땅을 할퀸 골드록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물어뜯기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한 번.’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는 횟수를 생각하더라도 2번이 한계였다.
MP가 언제 회복되는지는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했다.
휴식과 비휴식의 차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고, 상황에 따라, 경우에 따라 복잡한 메커니즘을 띠는 것 같았다.
전투 중에라도 1이 더 회복되면 포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한 번의 사용이 더 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가용 가능한 전력으로 넣기에는 불확실성이 짙었다.
‘확실한 기회를 잡을 때까진 아끼는 게 좋겠어.’
검을 움켜쥔 용주는 놈의 손톱을 막아섰다.
놀과의 전투에서 몇 번이고 취했던 동작이었다.
스으윽!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격을 막아 내는 것 자체는 이전과 동일했지만, 용주의 발은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놀들과 비등했던 용주의 힘은 골드록의 힘에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