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정표…. 그래. 그건가?’
생각에 잠긴 용주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그 정도면 확실히 이정표라 할 만했다.
‘만약 내가 시간 내에 이걸 하지 않으면?’
그렇게 가정하면 대략 세 개의 단어 정도가 발에 걸렸다.
차가운 죽음.
별들의 끝.
심장.
이 세 가지 단어 말이다.
별들의 끝이라는 건 추상적이기에 지금으로선 해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두 개는 달랐다.
용주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배신자….
본인을 그렇게 지칭한 이가 심장을 움켜쥐었던 때가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때 느꼈던 섬뜩한 죽음이 느껴졌다.
이건 모종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의무를 이행하며 자신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
‘선택지는… 이번에도 없는 것 같군.’
작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팔을 늘어뜨렸다.
따라야 할 강제성이 없다던 자신의 생각이 이토록 빨리 부정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런 용주의 눈에 한 문장이 다시금 들어왔다.
‘나와 같은 것을 기억하는 자’라는 문장이.
‘같은 것을 기억한다…. 그건 내 죽음을 의미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게다가 그다음 문장 역시 수수께끼인 건 마찬가지였다.
“오빠?”
생각에 잠긴 용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용주의 눈동자엔 교복을 입은 동생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놀란 동생의 얼굴에 용주는 순간 굳어졌다.
아뿔싸 싶었다.
메시지 남겨놓으려고 했었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는 이상한 화면 같은 게 떠 있었다.
이런 걸 누군가 본다면, 이야기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아….”
“자… 잠깐만 기다려! 사람 데리고 올 테니까!”
“잠깐!”
용주가 급하게 외쳤다.
병실을 뛰쳐나가려는 예은의 모습은 아까 봤던 간호사의 반응과 데칼코마니였다.
“내 상태라면 이미 병원에서 알고 있어. 따로 부르지 않아도 돼.”
놀란 동생의 눈에 용주가 이야기했다.
“먼저 연락 못 한 건 미안해. 걱정하고 있었을 텐데, 어떤 핑계를 대도 그건 내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핑계라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었다.
지금 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럼 선생님들도 알고 계신 거야?”
“응.”
예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옆으로 온 예은은 간병인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있길래, 뭔가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아…. 그건 혼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인 용주는 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을 끼쳤으니, 그에 동반한 무언가가 올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꾸중이든, 울음이든, 원망이든 간에.
“그래? 다행이다. 혹시 오빠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고. 왜, 드라마 같은데 보면 기억 상실증 같은 거 있잖아?”
하지만 예은의 반응은 용주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안도감 섞인 옅은 미소.
오히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침착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당연히 나왔어야 할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멍을 때리고 있었다.
동생은 자신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다른 사람들의 눈엔 저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디 아픈 덴 없어? 불편한 곳이나.”
“아…. 응. 없는 것 같네.”
“다행이네. 그래도 퇴원은 며칠 걸리겠지?”
“아마 그럴 것 같네.”
“아! 저녁은? 혹시 식사 관련해서 얘기 나온 것도 있었어?”
“아니. 따로 뭐 얘기 들은 건 없었어.”
동생의 눈치를 살피던 용주는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메뉴창이 떠 있던 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더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네.”
“왜? 뭐라고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용주의 반응에 예은은 깊은 심호흡을 해보였다.
“사과할 거라면 아까 사과했잖아. 거기서 내가 뭘 더 어쩌겠어. 그리고… 간만에 오래 좀 자면 어때. 난 그런 걸로 걱정 안 했다고.”
“…….”
용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승자가 어쩌고.
의무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밥 먹으러 갈까?”
* * *
“길드에서 그 뒤로 따로 말 나온 거 있어?”
초목이 우거진 매력적인 안뜰.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던 수지가 물었다.
그녀의 앞엔 외팔인 형만이 앉아 있었다.
“추가적인 조사는 불가능하다더군. 게이트가 완전히 닫혀서 시체 회수도 불가능하다고 하고.”
“음…. 다른 건?”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게이트의 내부…. 그런 게 목격된 경우는 지금껏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리퍼 형태의 언노운도 마찬가지고.”
“조사된 적도 없고, 조사할 수도 없다라…. 길드도 완전 답답한 상황이겠네. 우리처럼.”
“모든 헌터들에게 전달사항이 내려갔다고는 하더군. 그런 걸 발견하면 절대 진입하지 말고, 길드에 보고하라고.”
“음. 그랬구나. 그거 나도 받았던 거 같아.”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는 조직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조직은 분명 힘도 권위도 있었지만, 헌터들이 그 명령에 어떻게 따를지는 확신할 순 없었다.
“이용주. 그 애송이 녀석한테는 사람이 갈 거라고 하더군. 게이트가 어떻게 닫혔는지,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아, 그렇다는 건 깨어났다는 거네?”
“생채기 하나 없이 팔팔한가 보더군.”
“음, 그래? 다행이네. 근데 왜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명된 거야? 그런 이야기라면 우리도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
“특별조사관이 파견된다고만 들었다. 나도 그 이상은 들은 바 없어.”
형만은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필요하면 주지.”
“응?”
수지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안쪽에는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좀비 애송이. 녀석의 번호다.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될 거다.”
“음….”
수지는 연락처를 챙겼다.
용주의 핸드폰이라면 수지의 수중에 들어왔었다.
잠금도 따로 되어 있지 않았기에 연락처를 추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 핸드폰을 사용한 건 오로지 그가 부탁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외의 용도론 사용하지 않았었다.
“고맙게 받을게. 그나저나 그 팔은… 그냥 그렇게 두기로 한 거야?”
분위기를 살피던 수지가 물었다.
형만의 오른팔 소매는 텅 빈 채 늘어져 있었다.
잘려 나간 팔이 있었다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원상태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형만의 팔은 여기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S급 의료 헌터.
그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형만의 팔도 고쳐놓을 수 있을 거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다. 왼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
“그래도 불편하잖아. 꼭 헌터 일이 아니더라도.”
별일 아니라는 형만에게 수지가 이야기했다.
왼팔만 가지고도 형만은 강할 거다.
적어도 B급. 그중에서도 상위 클래스의 전력이겠지.
하지만 한쪽 팔이 없다는 건 단순히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평생 살아온 모든 게 두 팔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한 번 잃은 건 돌아오지 않아. 그게 자연의 섭리지.”
“머리카락처럼?”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수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예절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물음이었다.
물론, 수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이렇게 해주는 게 형만 본인에게도 더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여러 의미로.
“…쯧!”
혀를 찬 형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하는 벽면에는 그가 쓰던 것과 비슷한 대검 한 자루가 뉘어 있었다.
* * *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용주는 병원을 나섰다.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는 상태에서 퇴원하지도 못하는 일상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이렇게 오래 붙잡혀 있었던 건 담당 의사였던 은정 때문이었다.
참 고맙게도 말이다.
용주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퀘스트의 제한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1시간.
이동과 탐색에 시간이 걸린다 해도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사이에 동생에게 온 전화와 길드로부터 내려온 메시지 한 통을 제외하면 연락 온 곳은 딱히 없었다.
형만도, 수지도, 태영도 연락은 없었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 걸 바라고 한 행동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아쉽다거나 섭섭한 건 전혀 없었다.
헌터 사회가 그런 곳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병문안을 한 번이라도 와줬다는 부분이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지.
‘집에는 딱히 들를 필요 없을 거 같고.’
발견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은 더 이상 옷이라고 할 만한 형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몸은 회복되었어도, 옷가지까지는 수복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용주가 입고 있는 옷은 동생이 가져다준 다른 옷이었다.
‘헌터 길드엔 그래도 한 번 들러야겠지. 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생각해 둔 1차 목적지는 일단 거기였다.
사용하던 무기는 거기 버려두고 왔으니 말이다.
헌터 일을 하든 아니든 무기는 구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다음에는….
‘용산. 거길 가봐야겠지.’
일의 순서를 확정 지은 용주는 걸음을 계속했다.
* * *
‘저쪽인가?’
핸드폰의 GPS를 보고 있던 용주가 방향을 틀었다.
핸드폰의 표시된 시각은 용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중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급형 롱소드.
고작 그거 하나 받는 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가 버렸다.
이가영….
쌍둥이 자매 중 언니 쪽의 호들갑 덕분이었다.
‘이 근처인 거 같은데….’
역에서부터 이어진 구름다리를 바라본 용주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좀 더 정확한 위치를 보기 위해선 지도 원본을 보는 게 최선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았으니,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었다.
지도를 펼친 용주는 보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표시되어 있는 지점은 다리의 중간 정도.
“…….”
구름다리로 들어선 용주는 낯선 이질감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오스 게이트 내부와 비슷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으며, 일대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뭔가가 일어났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용주는 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던전 ‘하이에나 굴’을 발견했습니다.>
- ‘땅의 열쇠’를 사용해 던전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땅의 열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 NO
지도가 가리킨 지점에 선 용주의 눈앞엔 하나의 메시지가 출력되고 있었다.
‘던전?’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하지만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던전이란 거, 분명 카오스 게이트랑 비슷한 점이 있었지. 클리어하려면 특정 개체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점에서.’
눈먼 그자의 모습을 떠올린 용주는 열쇠를 사용했다.
그러자.
▷ 퀘스트 클리어.
▷ 스테이터스에 ‘대항력’이 추가되었습니다.
▶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대항력이 1 상승했습니다.
- 하이에나 굴에 입장합니다.
일대에 깔렸던 안개가 일제히 퍼져 나가며 주변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빛이 머무는 밝은 동굴.
지금 용주가 있는 곳은 더 이상 구름다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