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게… 정답이었던 건가?’
몇 번을 다시 봐도 글자가 보였다.
그자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놨을 거란 생각이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단서 하나도 일러주지 않는 불친절함은 덤으로.
용주는 출입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복도를 다니는 사람의 모습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제한시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땅의 지도? 땅의 열쇠? 이것들이 대체 뭐지?’
암호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추측할 만한 단서 같은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땅의 열쇠란 단어에서 씨앗 정도의 이미지 정도는 떠올려 볼 수 있었지만, 그건 그저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용주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역시 이것만으론 뭔가를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 제한시간 71시간.
바로 그때 남은 시간을 가리키던 숫자가 변화했다.
‘생각 중이잖아. 면전에 대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용주는 이 창이 잠시 보이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기대를 한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문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데.
“!”
창은 실제로 비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패널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며 나타났다.
‘이건… 대체….’
패널의 머리글자는 ‘메뉴(menu)’였다.
아마 이게 이 패널들을 불러오는 명령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메뉴에는 몇 가지 패널들이 존재했다.
‘스테이터스’, ‘스킬’, ‘인벤토리’….
‘퀘스트’는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용주는 퀘스트 창을 닫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메뉴창을 닫았다.
허공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메뉴.’
용주는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용주의 앞에는 조금 전 보았던 패널들이 다시금 일렁이고 있었다.
‘비문증은 역시 아닌 것 같고….’
용주는 패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그대로 패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헛것도 아니야.’
용주는 미간을 좁혔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뭘 원하는 거지?’
대답 없는 물음을 던진 용주는 가장 앞선 패널에 시선을 집중했다.
‘스테이터스’라고 정의된 패널이었다.
기존의 것이 사라진 허공엔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름 : 이용주.
직업 : 계승자
레벨 : 1
HP : 100
MP : 15
힘 10
민첩 10
체력 20
지능 10
새로운 창을 확인한 용주는 눈썹을 기울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역시 이름이었다.
거기엔 어떠한 의문도,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직업에, 레벨에, 능력치…인가? 이게 내 정보라고?’
나머지는 아니었다.
태클을 걸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자신의 직업은 헌터였고, 레벨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으며, 사람을 저런 네 가지 사항으로 정의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콧방귀를 뀌거나, 부정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순간부터.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이미 벗어나 있었으니까.
‘계승자’라는 단어에 한 번 더 시선을 준 용주는 패널을 닫았다.
용주의 시선은 다음 패널로 향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경 쓰였던 패널이었다.
패널의 이름은 ‘스킬’.
A급 헌터인 형만이나 의료 헌터였던 수지가 사용했던 힘과 같은 이름이었다.
스킬창은 100%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그런 스킬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 돌연변이 (Lv. ???)
▷ 재생 (Lv 1)
- 패시브
- 계승자의 자연 회복력을 끌어 올린다.
-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 더 많은 상처를 회복할수록 스킬 레벨이 상승하며, 스킬 레벨이 상승할수록 회복 속도가 상승한다.
▷ 전투 속행 (Lv max)
- 패시브
- 머리를 제외한 급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더라도 즉사하지 않는다.
- 머리를 제외한 절단된 신체 부위를 빠르게 수복할 수 있다.
단, 이때의 회복된 신체는 불완전하며, 온전한 회복을 위해선 적절한 후속 조치를 필요로 한다.
▶ 물어뜯기 (Lv 1)
MP 소모량 : 5
- 상대를 물어뜯어 공격한다.
- 적에게 입힌 피해에 비례해 HP를 회복한다.
스킬은 분명히 있었다.
‘스킬이… 있어?’
의아한 부분이었다.
고르지 않은 스킬 레벨은 둘째 치더라도 그냥 존재 자체가 의아했다.
자신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다 계승자니 뭐니 하는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스킬 설명에 떡하니 계승자라고 붙어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헌터에게 스킬이 생겼다는 건 억만금을 얻은 것만큼 기쁜 일이건만, 당혹감에 삼켜진 용주에게 기쁨이란 감정은 작동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스킬이란 게 헌터들이 사용하는 스킬과 같은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고 말이다.
‘그런데….’
용주는 다시 한번 스킬창을 바라보았다.
가장 상단에 있는 스킬의 이름은 ‘돌연변이’.
레벨도 설명도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스킬이었다.
용주는 자신의 손을 힐끔 쳐다봤다.
‘돌연변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이러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히어로물에 나오는 몇몇 히어로들 정도였다.
어느 쪽이든 ‘기존의 것과는 다르다’라는 정의에선 벗어나지 않았다.
외관상 보이는 차이는 없었다.
심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달라진 건 크게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런 접근이 맞다는 확신도 없었다.
이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존재 유무와 이름 정도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변했다고 하면, 변하긴 변했지. 이런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기존의 것’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있긴 했다.
애초에 이런 게 보이는 시점에서 정상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더 생각해봐야 나오는 것도 없겠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용주는 다음 스킬을 살펴보았다.
패시브라고 적힌 두 개의 스킬이었다.
‘전투보단 회복에 특화된 느낌이라고 봐야 하나?’
두 개 모두 그러했다.
‘재생’이란 스킬은 일단 이름대로 자체적인 회복 능력을 부여해주는 스킬이었다.
의료 헌터와 어떤 면에선 비슷할 수도 있는 능력이었지만, 본인에게 치유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별도의 MP가 소모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숙련도를 올리는 방법은 치료를 하면 할수록…. 그렇다는 건….’
얼핏 보면 엄청나게 좋은 스킬이었다.
소모값도 없고, 전투 지속력도 눈에 띄게 상승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숨어 있었다.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선 우선 다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고 베여서 상처를 입고, 그걸 치료해 숙련도를 올린다….
그게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둘 중 더 눈에 띄는 스킬은 ‘전투 속행’이라고 명명된 스킬이었다.
‘머리가 아니면 즉사하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 설명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 앞에 무력했다.
그런데도 여기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마치 좀비처럼.
‘게다가 절단된 신체를 수복해?’
이쪽은 영화에 나오는 일반적인 좀비 개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의 좀비들은 팔이 잘리면 영원히 잘려 있고, 하반신이 날아가면 상반신만으로 땅을 기니 말이다.
같은 좀비라도 이쪽이 가능한 경우는 영화의 중요 인물에 해당되는 특수 개체의 좀비.
그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험해 보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용주의 입장에선 무조건 맹신할 수도.
무조건 불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맨정신으로 즉사할지도 모르는 치명상을 스스로 만들거나, 신체 어딘가를 잘라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나머지 하나는….’
발동 가능한 유일한 액티브 스킬은 상당히 원초적인 스킬이었다.
‘물어뜯기…. 이런 것도 스킬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왜 이런 스킬이 있는 건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단순히 물어뜯는 게 스킬이라니….
형만이 사용했던 불을 다루는 기술들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이래서야 영락없는 진짜 좀비잖아.’
언노운을 물어뜯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용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안 그래도 ‘좀비 헌터’라고 불리는데, 카오스 게이트에서 언노운을 물어뜯었다간 뭐라고 불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또 들어가 볼 만한 건….’
의문투성이인 스킬창을 종료한 용주는 다시금 메뉴창을 바라보았다.
‘인벤토리.’
이번에 용주가 눌러본 창은 바로 그것이었다.
- 땅의 지도
- 땅의 열쇠
인벤토리엔 두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눈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퀘스트에서 말하던 두 가지 모두 여기 있었군.’
왜 저런 게 들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지만, 용주는 의문을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파고든다고 누가 답을 알려줄 것도 아니었고, 막연했던 명령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더 가깝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땅의 지도’라고 표시된 아이템의 설명엔 실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가상현실 같은 이세계의 지도는 아니었다.
그려져 있는 곳은 현실에 실존하는 지역.
지도의 중심엔 분명 용산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역은 아니고 가까운 주변인 것 같은데… 여기에 뭔가 있다는 건가?’
지도가 가리키는 지점은 용산역은 아니었다.
용산의 지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퀘스트란 걸 완료하려면 이곳으로 오라는 거겠지.
‘내가 자기 말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 한 건가?’
이곳에 가면 어쩌면 그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봐선 강제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 퀘스트란 걸 해야 할 의무나 목적 역시 없었다.
제한시간이란 게 흐르고 있었지만, 페널티에 관한 부분 역시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초조함은 오히려 궁금증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음?’
인벤토리를 닫은 용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패널이었다.
‘뭐지?’
패널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패널의 테두리엔 은은한 검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걸 안 누르고는 못 배길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패널은 자동으로 열렸다.
용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 안에 있는 건….
점자였다.
‘점자?’
점자와 마주한 용주는 순간 오한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용주는 침착하게 점자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것을 기억하는 자여.]
[망각 속에 남은 마지막 조각이여.]
[피를 나눈 나의 검이여.]
[나의 적을 집어삼켜라.]
[너 자신을 벼려내라.]
[너의 의무를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차가운 죽음이 널 삼킬 것이다.]
[너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이며, 그건 곧 별들의 끝을 의미할 것이니라.]
[길의 끝에서.]
[배신자의 왕좌에서 널 기다리고 있겠노라.]
[너의 심장을 쥐고.]
점자를 해석한 용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메시지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도 있었지만, 여기엔 분명 ‘나’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배신자의 왕좌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나’란 존재.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딱 한 명뿐이었다.
‘의무? 의무라고?’
계승자의 의무니 뭐니 해도 짚이는 건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자가 뭐라 하긴 했지만,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죽음 직전에 봤던 수락 메시지에도 의무니 뭐니 하는 건 적혀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짚이는 건 우선 ‘적’이라는 단어였다.
헌터에게 적이라면 기본적으론 언노운이었다.
하지만 그건 헌터로서의 의무지, 계승자로서의 의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단어는….
‘길…. 역시 이것뿐인가?’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건 이미 자신이 그와 같은 길 위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위치는 아마 시작 지점이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길에 대한 단서가 어딘가 있을 것이다.
아무 숲에나 떨어뜨려 놓고 길을 따라오라고 말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따라갈 이정표나 길잡이가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