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5일이라고?”
“네, 그래요. 원하시면 구체적인 시간까지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은정은 링겔을 확인했다.
링겔의 반대편 끝은 용주의 왼손으로 이어져 있었다.
“게이트는 어떻게 됐지? 혹시 알고 있나?”
2주.
지금 시점이 그 후로 2주나 더 지났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건이 진행됐을 게 분명했다.
“군인들이 용주 씨를 발견했을 때 게이트는 닫혔다고 들었어요. 본인이 가장 마지막까지 있으셨으니 저보단 더 자세히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닫혔다고…?”
용주는 기억을 더듬었다.
게이트를 닫으려면 게이트 보스를 쓰러뜨려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쓰러뜨리기는커녕 놈의 얼굴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게이트는 닫혔다.
‘그렇다는 건….’
희미했던 기억을 더듬던 용주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몸이 벌집이 되고, 죽음이 왔음을 확신했던 그때 보았던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
그곳엔 분명 적혀 있었다.
‘히든 게이트 클리어’라고.
‘그렇다는 건 그때 봤던 계승자니 뭐니 하는 것도 헛것은 아니었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나, 게이트가 닫혔다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계승자가 뭐고, 뭘 하는 것인지나.
그때 봤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듣고 있으니까.”
“비문증의 증상으로 보이던 형상이 혹시 변할 수도 있나?”
“물론이에요. 나이에 따라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안과 질환에 의해 유리체 내에 혼탁이 생기면 또 변화할 수도 있죠. 보이는 것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에요. 동그란 모양일 수도 있고, 지렁이 같은 모양, 아니면 날벌레 같은 모양일 수도 있죠.”
체크리스트를 손에 든 은정이 몇 가지 사항들을 기록했다.
“읽을 수 있는 글자처럼 보일 때도 있나?”
“읽을 수 있는 글자? 글쎄요. 그런 경우는 제가 들어본 적은 없는데, 혹시 지금도 보이세요?”
용주와 눈을 마주친 은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니.”
그때 보았던 글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보고 싶다고 보이는 증상도 아니긴 했다.
“비문증의 증상이면 분명 비슷한 모양이 보일 거예요. 다음번에도 같은 증상이 보이면 말씀해 주세요. 일정 잡아드릴 테니까.”
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을 잡을 일은 아마 영영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때 봤던 그 글자는 분명 변화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봤던 그 글자는 뭘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답을 알 수는 없었다.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때 그 사람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만….’
이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자라면 역시 그 사람뿐이었다.
‘그자는 대체 누구였던 거지?’
게이트가 닫힌 지금 그자를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언노운들만 있어야 할 그곳에 사람이 있는 것 자체부터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생각에 잠겨 있는 용주에게 은정이 물었다.
헌터가 아닌 자신은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안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에도 은정은 이 물음을 던졌다.
개인으로서도 의사로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내 상태를 봤으면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란 건 알고 있을 텐데?”
자신의 상태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살아 있는 게 맞는 건지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상태?”
“그래. 내가 여기 왔을 때 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용주 씨 여기 왔을 때, 지금 모습 그대로였어요. 평소 피범벅이 돼서 오시는 거랑은 정반대였죠. 구급대원 분들도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었어요.”
“지금 이 상태였다고?”
용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니까요. 제가 왜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모습인가.
거기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S급 의료 헌터의 도움이 있는 경우.
그거라면 자신의 손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거까지 설명이 되었다.
확률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고 있는 바가 맞다면, 한국에 남은 S급 의료 헌터는 한 명뿐이었다.
그런 높고도 귀하신 분이 고작 E급 헌터 중 하나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급하게 시간을 내줬을 리는 얼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것뿐이었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치료된 건 게이트가 사라지기 전.
자신이 의식을 잃은 직후였다.
“이거… 잠시만 봐주실래요?”
생각에 잠긴 용주에게 은정이 서류 한 장을 건넸다.
CT 촬영지였다.
용주는 딱히 이상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전문 분야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용주 씨 심장… 무언가에 꿰뚫렸던 흔적이 있어요. 뭐가 됐든 치명상이었겠죠.”
은정의 이야기에 용주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신의 심장.
그곳에서 피가 솟구쳤던 게 다시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뭔가로 메꿔져 있어요.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용주 씬 지금쯤 저세상 사람이겠죠. 혹시 뭐 짚이는 거 없으신가요?”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그 사내를 떠올렸다.
그자가 자신의 심장을 쥐었을 때 뭔가가 흘러들러 온다는 느낌이 있었다.
“글쎄…. 딱히 기억이 나는 부분은 없군.”
“기억이 없다니…. 분명 거짓이에요! 그렇죠? 이런 상처가 기억나지 않을 리 없잖아요!”
은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정이 담긴 그녀의 외침에 용주는 눈을 깜빡였다.
“의료 헌터….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자의 작품일 거다.”
용주가 이야기했다.
거짓말이었다.
정확히는 사실을 아주 조금 섞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용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최선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녀석이 날 회복시켰었다. 그것도 아마 그때 생긴 자국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음…. 그래요?”
은정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의사의 치료와 의료 헌터의 치료는 근원적으로 많은 부분이 달랐다.
의사는 의학을 기본으로 삼지만 의료 헌터는 아니었으니까.
그치만 은정도 의료 헌터가 치료한 환자를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봤던 환자들 중엔 이런 흔적이 남아 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알고 있을게요.”
3초 정도 용주와 눈싸움을 벌이던 은정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도 거짓말하신 건 맞네요. 그때 상황을 기억하신다면, 그 이전 상황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단 소리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둘을 곧장 연관 짓지 못했을 뿐.”
“음…. 그래요? 뭐, 좋아요! 아무튼 이 상처는 용주 씨가 의식을 잃은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렇게 봐도 되는 거죠?”
“그럴 거다.”
은정은 들고 있던 체크리스트를 내려놓았다.
차분하게 의자에 앉은 그녀의 눈높이는 용주와 같아져 있었다.
“의료 헌터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죽었을 거란 소리네요, 그럼.”
“…….”
“제가 피투성이로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거, 이런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니었어요. 이렇게 오실 바엔 차라리 좀비처럼 오세요. 사람들이 놀라도, 간호사분들이 기절해도 괜찮으니까….”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용주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은정을 차갑게 대해 왔었다.
은정은 헌터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해왔었다.
왜? 라는 물음에 정확한 답은 제시할 수 없었다. 다만 추측은 해볼 수 있었다.
은정과 만나고 있는 자신이 언제나 헌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처음 그렇게 꿰어진 단추를 다시 꿸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참견이란 거 알아요. 그래도 그래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적어도 살아계신단 소리니까. 제가 뭐라도 해드릴 수 있다는 소리니까.”
체크리스트를 챙긴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말씀드린 거 같은데, 또 말씀 드릴게요. 당분간은 절대 안정하셔야 해요. 적어도 며칠간은 퇴원은 꿈도 꾸지 마시라고요.”
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다운 도리로 해야 할 말이 있었지만,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럼 쉬세요.”
멀어지는 은정의 뒷모습.
자신의 왼손을 바라본 용주는 손을 움켜쥐었다.
“저….”
나지막한 한마디 중얼거림에 은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게 그러니까…. 고맙다….”
용주의 눈은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그 눈에 담겼던 차가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보단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천만에요.”
싱긋 웃어 보인 은정은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실을 나선 용주는 테라스로 나왔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 조금은 머리가 맑아질까 싶었다.
‘게이트는 클리어되었고, 신체는 회복되어 있었다….’
자판기 앞에 선 용주는 카드를 찍었다.
타랑! 타라랑!
굴러 나온 수정과 캔이 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계승자…. 역시 걸리는 건 그것뿐인가.’
캔 뚜껑을 딴 용주는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을 더듬었다.
정체불명의 사내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계승자가 될 거냐는 물음에 자신이 던진 대답은 YES였다.
설명할 수 없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 그것과 연관되어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근데 계승자란 게 대체 뭐야? 난 뭘 계승한 거지?’
여전히 수수께끼인 부분이었다.
신체의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가 바뀌었다는 인식도 전혀 없었다.
계승자라는 이름이 자신이 아는 사전적 의미와 부합한다면, 뭔가가 변했을 텐데.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용주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봤던 문자들이 다시 한번 나타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캔을 다 비울 때까지도 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빈 캔을 구긴 용주는 캔을 버렸다.
그렇게 쉽게 정답에 도달하게 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뭔가 있을 거야. 분명 뭔가가….’
하지만 분명 어떠한 식으로든 단서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자신을 살려뒀다는 건, 자신을 통해 뭔가를 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단서를 뒀을 것이다.
병실로 돌아온 용주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조금은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내게 주어졌던 선택지…. 그건 분명 생각에 반응했었지.’
계승자의 자격을 받아들였던 건 사인도 터치도 아닌 시선과 생각이었다.
그게 자신이 한 첫 행동이었고,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거기서부터 단서를 쫓기 시작하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 있는 거냐?’
허공을 응시한 용주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냐?’
다른 곳을 주시한 용주가 한 번 더 물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접근법이 아닌 건가?’
상대를 부르는 소통의 방식은 일단 실패였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쌍방이 아니라면 일방통행.
저쪽에서 먼저 나타나 지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이미 장치를 해뒀을 수도 있었다.
자신은 그저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뿐.
‘계승자? 체크리스트? 임무? 미션? 의뢰?’
용주는 생각나는 단어 몇 가지를 나열했다.
반응은 없었다.
‘목적, 이상, 대가, 거래, 니드(need) 원트(want).’
용주는 단어를 더 나열했다.
마찬가지로 반응은 없었다.
‘이것도 아닌가…? 분명 뭔가 있을 텐데….’
용주는 나열했던 단어들을 점자로 생각해봤다.
특이점이었던 점자라면 혹시 반응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것도 아닌 모양이다.
용주는 핸드폰을 집었다.
힌트가 될 만한 단어가 혹시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검색창을 연 용주는 임무와 미션을 차례대로 검색해봤다.
헌터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다.
용주는 화면을 내렸다.
만족할 만한 결과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용주의 눈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었다.
두 단어 모두에서 보인 연관검색어였다.
‘퀘스트(QUEST)?’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도 아니었고.
사전적 의미로는 뭔가를 찾는 일.
그러니까 탐구를 말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 외 중세 기사 문학이나, 현대문학,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밑져야 본전이겠지. 퀘스트!’
찔러봄 직한 단어라고 느낀 용주는 그 단어를 외쳤다.
그러자.
▷ 땅의 지도가 가리키는 곳에서 땅의 열쇠를 사용하십시오.
- 제한시간 : 72시간.
용주의 앞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이건….
거기서 봤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