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쉬익!
왼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소리만으로 빗겨낸 용주는 녀석의 얼굴을 힘껏 걷어찼다.
찼다는 감촉은 확실하게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잠깐 사이에 쏟아진 보이지 않는 참격들은 용주의 몸에 무수히 많은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용주의 몸 여기저기에선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용주는 쓰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직 치명상이라고 할 만한 상처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동물적인 감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시야가 마비된 그곳에서 급소를 지켜낸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촤악!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눈썹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는 상처에 눈동자론 피가 떨어졌고, 허벅지를 도려내는 깊은 상처에 용주의 다리는 비틀거렸다.
용주의 움직임은 적어졌고, 극한으로 치달은 고통은 더 이상 아픔이란 감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팔랐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었고,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헌터가 되면서 상처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큭…!’
정면에서 휘두르는 참격을 느낀 용주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용주는 느낄 수 있었다.
손목 아래의 감각이 사라져 버린 것을.
‘젠장….’
남아 있는 왼손으로 언노운의 어깨를 붙잡은 용주는 그대로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인간의 치아는 생각만큼 강도가 높지 않았다.
인간의 악력 또한 다른 동물들의 악력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용주의 이빨은 녀석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초인적인 힘인지, 아니면 그저 언노운의 그 부위가 약하기 때문인지는 용주로선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한 번이지만 녀석들에게 되갚아 줬다는 것.
그리고 용주의 몸 여기저기가 수많은 낫에 관통당해 있다는 것 정도였다.
“쿨럭….”
입술을 타고 강한 쇠 맛이 느껴졌다.
등과 허리를 꿰뚫은 낫 날은 가슴을 뚫고 나왔고, 그 반대로 들어간 날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의식은 급속도로 흐릿해지고 있었다.
‘여기…까진가?’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했다.
즐거운 것들보단 아프고 아쉬운 것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인생의 마지막에 본다던 파노라마가 이런 건가도 싶었다.
터질 것 같이 뛰던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과 먼 곳에서부터 한기가 돌았다.
죽음이었다.
“…….”
죽음 속에 잠겨 가던 용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반응이었다.
‘저게… 뭐지?’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언노운의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저 앞에 무언가 보였다.
‘사람…?’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사람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젠 헛것도 보이는 거냐?’
반쯤 감긴 눈으로 용주는 사람 같아 보이는 형상을 쫓았다.
사내가 보이는 곳은 자신이 있는 곳보다 한참 아래였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둠이 없고, 언노운들이 없다고 해도 피라미드 꼭대기인 이곳에서 저곳이 보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세 개의 석판을 지난 사람의 형상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라왔다.
언노운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자의 등장에 물러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언노운들의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제단을 잠시 바라보는 그자는 서서히 제단으로 다가왔다.
보다 가까운 곳에 선 그자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용주의 눈에 들어왔다.
일단 남자였다. 그것도 제법 나이가 있는 중년의 사내.
또 두 눈이 있는 자리에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다. 아마 앞을 보진 못하는 것 같았다.
“…….”
용주의 앞에 선 사내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용주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청각이 제 기능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사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입 모양을 읽어 보기 위해 용주는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한마디도 읽을 수가 없었다.
청각과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도 상당수 마비된 모양이었다.
한 발 더 다가온 사내는 용주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용주의 심장을 꿰뚫고 있던 언노운의 낫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젠장 뭐라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내가 자신의 심장을 쥐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서 있던 사내는 천천히 손을 뽑았다.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용주에겐 그 시간이 1시간도 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내의 손에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는 아니었다.
피보다는 좀 더 검고 탁한 느낌이었다.
검게 물든 자신의 손을 바라본 사내는 그 액체를 흩뿌렸다.
눈에 들어간 대량의 액체에 용주는 한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
용주의 시야가 회복된 건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시각.
시야를 회복한 용주의 시야에 더 이상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어디 간 거지?’
사라져 버린 사내를 찾기 위해 용주는 눈동자를 굴렸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눈뿐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읽을 수 없는 형상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보이는 거냐?’
비문증의 일종일 거라던 그 현상이었다.
지금껏 겪어왔던 질병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또 재발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ㅎㅣ>
지금껏 단 한 번도 읽을 수 없었던 형상들 사이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완전한 문장은.
읽을 순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히든 게이트 클리어 : 계승자의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 당신의 시간은 현재 이곳에 묶여 있습니다.
▷ 당신의 죽음은 현재 99% 진행되었습니다.
▷ 당신이 이 자격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망합니다.
▷ 당신이 이 자격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히든 게이트는 클리어되지 않으며, 곧장 안정화됩니다.
▶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
‘이게 뭐야….’
허공에 떠다니는 글자들을 읽은 용주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히든 게이트?
계승자?
시간이 묶여 있다?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죽음 직전엔 이런 헛것도 보이는 건가?
‘잠깐만….’
용주는 다시 한번 문장들을 읽었다.
그리고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걸 수락하지 않으면 나는 죽고, 게이트는 곧장 안정화된다고?’
두 문장 모두 모순이 있었다.
죽음은 절대적이며, 멈출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카오스 게이트가 안정화될 때까지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은 7일이었다.
하지만 저기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주는 저 말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여기 쓰여 있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죽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게이트를 나가고 있을 세 사람도.
게이트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란 소리였다.
‘선택지는… 하나뿐인 건가?’
수락할지 말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적혀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거야 완전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이지 않은가.
‘계승자니 뭐니 그런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굳힌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양손 다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선택할 수 있는 거냐?’
소리를 낼 수도 어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생각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
그 두 개뿐이었다.
‘한다. 한다고! YES!!'
선택지를 바라본 용주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그 순간.
용주의 의식은 급격하게 멀어졌다.
멈춰 있던 무언가가 급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승자의 자격을 수락하셨습니다.>
* * *
“…….”
눈을 뜬 용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 부신 빛에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조금씩 회복되자 천장이 보였다.
카오스 게이트 안쪽에서 봤던 천장은 아니었다.
자신은 누워서 그곳을 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빛에 용주는 오른손을 들었다.
빛을 가리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한발 늦게 생각했다.
이 행동으론 빛을 가릴 수 없다는 걸.
왜냐하면 자신의 오른손은 낫에 잘려 날아갔었으니까.
“…….”
그런데.
빛이 가려졌다.
없어야 할 손이 자신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의 손은 분명 절단됐었다.
그때의 기억과 그때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런데도 손은 여기 있었다.
손끝에 힘을 준 용주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하나하나 따로도 잘 움직였고,
쥐락펴락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기 있는 건 그냥 자신의 손이었고, 그게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상체를 일으킨 용주는 자신을 덮고 있던 하얀 시트를 밀쳐냈다.
하얀 이불과 하얀 침대 시트.
아무리 봐도 여긴 병원이었다.
자신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단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적어도 여긴 시체 안치실은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용주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팔, 다리, 가슴, 배.
온전한 곳이 없어야 했다.
심장에 구멍이 났었으니 살아 있지 않은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은 너무도 멀쩡했다.
상처 하나 없었고, 흉터 하나 없었다.
마치 거기서 겪었던 일련의 일들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툭!
용주는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서 들어온 한 간호사가 들고 있던 체크리스트를 떨어뜨린 게 보였다.
“잠시만 그대로 계세요! 선생님 모셔올게요!”
놀란 간호사는 서둘러 뛰쳐나갔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최은정이었다.
간호사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은정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은정의 눈동자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 상태는 좀 어때요? 아프거나 불편한 곳 있으면 말씀하세요.”
“…….”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목과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맨날 멀쩡하게… 아니, 멀쩡하게는 아니지. 아무튼 자기 두 다리로 걸어오시던 분이 의식도 없이 실려 오셔서….”
은정의 물음에 용주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의식 없이 실려 왔다고?”
몇 번의 마른기침을 한 용주가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런 설명이 정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푸석하단 느낌이 들었다.
“네. 그래요.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발견했다고 들었어요.”
“군인들이?”
“그렇다고 들었어요. 아! 그리고 헌터분들이 병문안을 오시기도 했어요. 세 분… 정도였던 거 같은데.”
은정은 침대 옆에 놓인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 위엔 카모밀레 한 송이와 박스로 포장된 음료.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동생분도 왔다 가셨어요. 시간 나실 때 전화 한 통 해줘요.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
용주는 머리를 짚었다.
기억 속에 큰 공백이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 어둠뿐인 풍경.
그 뒤의 일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14일. 아니, 오늘로 정확히 15일째네요.”
은정이 물 한잔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물을 받은 용주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이토록 물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