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난 녀석의 판단에 걸겠다.”
손을 움켜쥔 형만은 계단을 내려갔다.
태영과 수지는 그 뒤를 따랐고, 용주는 대열의 가장 후미에 자리 잡았다.
형만이 빛의 길 위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지와 태영이 올라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피라미드를 내려온 용주는 마찬가지로 길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문제가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용주의 발이 피라미드를 떠나는 순간 안정적으로 떨어지던 빛이 순식간에 희미해져 버린 것이다.
끼이익~!!
사방에서 언노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선봉에 선 형만을 덮친 언노운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첫 공격을 피한 형만은 왼손만으로 두 번째 언노운을 매쳤다.
A급 헌터다운 노련한 동작이었다.
“파이어 월!”
자신의 마력을 한데 집중시킨 형만은 지면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서 시작된 불길은 빛이 밝히던 길의 벽이 되었고, 사원부터 출구까지 이어진 길은 하나의 복도가 되어 있었다.
“뛰어!”
무릎을 땅에 붙인 형만이 외쳤다.
“리더! 그치만….”
태영은 선뜻 그러지 못했다.
형만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이 스킬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형만을 지나쳐 달린다는 건 곧 그를 여기 버려두고 간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어서 가! 시간 없다! 이러다간 우리 다 죽어!”
수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직감한 형만이 외쳤다.
빛은 희미해졌지만, 출구까진 아직 이어져 있었다.
형만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안수지! 내 눈 똑바로 봐라! 명령이다! 지금 당장 뛰어!”
망설이고 있는 수지를 향해 형만이 외쳤다.
수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수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굵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았어.”
마음을 굳힌 수지는 태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지는 형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저런 눈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마음을 굳혔단 소리였다.
저 고집스러울 만큼 독선적인 성격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죽지 않았었으니까.
“좀비 애송이!! 공포에 귀가 먼 거냐?! 아니면 다리가 굳은 거냐?! 쓰레기처럼 있지 말고 뛰어! 어서!”
더 뒤쪽으로 시선을 돌린 형만이 외쳤다.
뭔가 혼자만의 깊은 고뇌에 잠겼던 용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명령이다! 애송이! 내 말에 복종해!! 네가 한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협박에 가까운 형만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뒷걸음치던 용주의 신발은 제단의 첫 번째 계단 위로 돌아가 있었다.
상황이 또 한 번 바뀐 것은 그때였다.
옅어지던 빛의 세기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맹공을 가해 오던 언노운들도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역시… 그런 건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단 걸 깨달은 용주는 주먹을 쥐었다.
시에서 나간 인원은 세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탈출을 감행한 인원은 넷.
엄밀히 따지면 수지는 사내가 아니었지만, 아마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그쪽이 아닌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여기 남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냐? 제정신이야?’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용주는 헛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뭔지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헛웃음이 나왔다.
헌터는 혼자일 텐데….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래야만 할 텐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물러났다.
‘지금 안 가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알아? 알면서도 지금 이러는 거냐고! 네 죽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며!’
귓가에 울리고 있는 건 자신의 목소리였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용주는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저 녀석들 누군지도 잘 모르잖아!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아니야? 왜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을 위해서 목숨을 던지려는 건데? 동생 험한 꼴 보게 하기 싫잖아? 네가 구해줬다고 놈들이 책임져 줄 것 같아? 감사 인사 한마디라도 할 것 같냐고?’
녀석의 말이 맞았다.
이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는 석판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저기 있는 세 사람 역시 앞서 죽은 놈들이랑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도 있고, 나머지도 크게 다를 거 없었다.
정이나 의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알고 있었다.
‘대체 왜! 왜 그러는 건데!!’
자신조차도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몸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고,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판단이 자신이 내릴 결정이란 것만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말하는 ‘옳은 판단’과는 다른 결정.
근거도 없는 그 결정에 마음을 굳힌 용주의 눈동자는 무섭도록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니, 여긴 내가 남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밀쳐낸 용주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세 사람의 시선은 용주를 향해 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E급 주제에 어디서 감히!”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근거라고?”
“시간 없으니 짧게 설명하겠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건 단 세 명뿐이다. 그리고 내가 남아야 하는 이유 또한 크게 세 가지다.”
용주는 세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는, 이 어둠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둘째는 암호였던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셋째는 이 이후에도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세 개의 손가락을 접은 용주는 품에 가지고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상당한 구형 모델이었다.
게다가 상처도 많았다.
제대로 작동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용주의 손을 떠난 핸드폰이 허공을 갈랐다.
비행이 멈춘 곳은 수지의 손안이었다.
“여섯 개의 석판에 기록된 여섯 개의 문장. 그 끝엔 한 가지 문장이 더 남아 있다. 살아나갈 방법이라면 내게도 있다는 소리다.”
거짓말이었다.
석판에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용주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들을 납득시킬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이건 왜 던진 건데? 나가면 필요한 물건이잖아.”
용주의 핸드폰을 쥔 수지가 물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었다.
“며칠 안 돌아오면 걱정할 사람이 있다. 미안하지만 네가 연락을 좀 해줘야겠다.”
“…….”
“이예은. 동생 이름이다. 가능하면 오후 6시 이전이나 10시 이후는 피해 주길 바란다.”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넌 아무것도 아니다!”
불길을 진정시킨 형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용주에게 달려가 때려눕힐 기세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이 사라질 전조였다.
“시간 없다. 어서 움직여!”
“…쯧!”
시간이 없음을 직감한 형만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석판의 원문에는 숫자가 셋이 아니면 전부 죽는다고 적혀 있었다! 저기 두 녀석까지 다 죽일 셈이냐?!”
그리고 그런 형만을 직격한 용주의 외침.
이를 악문 형만은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 아니었다.
“…교활한 녀석.”
형만이 중얼거렸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네가 했던 말 잊지 말아라. 애송이.”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형만이 뒤돌아섰다.
“약속 꼭 지켜. 돌아온다고 말해둘 거니까.”
용주를 보고 있던 수지가 이야기했다.
“…그래.”
“가자.”
용주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 수지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아깐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리고 그런 수지의 귓가를 스치는 나지막한 목소리.
“미안했다겠지.”
“그래.”
용주를 등진 수지는 달리기 시작했다.
빛 너머로 사라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용주는 제단 정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단 정상에 도착한 용주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쏟아지던 빛은 제단에서부터 저물어가고 있었다.
빛 너머로 사라진 세 사람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 뭐야? 이용주 너 설마 영웅이라도 되고 싶었던 거냐?”
자조 섞인 웃음을 머금은 용주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영웅 같은 게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헌터가 된 이후로는 말이다.
헌터로서의 자신은 독선적이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 왔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랬다.
그런데도 지금, 누군지도 잘 모르는 남들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음에도 이 자리에 남았다.
이래서야… 이래서야 마치 아버지 같지 않은가.
‘바보 같아.’
용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모습이 더 바보 같았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용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남은 건 이제 저기 있는 언노운들과 자신뿐이었다.
무기는 없다.
그렇다고 반격할 다른 수단이 있는 것도, 탈출을 위한 열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부터의 길은 말 그대로 어둠.
이곳의 모든 지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보이는 건 없었다.
‘게이트가 열린 건 오늘로 5일 차….’
A급 헌터가 살아 나갔으니 길드에 사건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은 없었다.
A급 토벌팀….
아니, 어쩌면 S급의 헌터가 파견될지도 모르지.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을 그들이 파견되면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될 확률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까지 생존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간이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3일 내외.
게이트의 안정화까지는 약 이틀.
그렇게 단순 계산으로만 하면 굶거나 말라죽을 시간은 게이트가 안정화될 시간보다 적었다.
길드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을 최우선으로 조사하고 처리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지만,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말이지.’
그렇게 생각했던 게 불과 몇 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기대였는지 깨닫게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한 번 바뀐 언노운들의 노랫소리.
더욱 낮고 음산해진 그들의 노랫소리가 사원 주변을 포위하며 맴돌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점점 좁혀오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간을 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
예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용주는 손을 움켜쥐었다.
놈들이 공격해 온다면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었다.
자신에게 있는 무기는 두 팔다리와 이빨 정도.
이런 원초적인 무기로 놈들과 대적할 순 없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방법은….’
용주는 고개를 들었다.
밀폐된 것처럼 보이는 이 방은 실은 밀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뚫려 있는 곳을 안다 해도 뭔가 해볼 방도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헌터들로서는 도약할 수 없는 높이었고, 일반인에 가까운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으로선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용주는 각오를 다졌다.
지금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먹잇감이 될지언정, 반항하지 않는 먹잇감은 되지 않겠다.”
이길 순 없더라도, 쉬운 먹잇감은 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건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었으니 말이다.
“좀비처럼 끝까지 물어뜯어 주겠어!”
남아 있는 궤짝을 열어볼까도 싶었다.
발악을 위한 뭔가가 있다면 그나마 있을 만한 곳은 그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시간은 용주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사위를 점점 좁혀오던 언노운들은 불규칙한 바람을 만들어내며 이미 공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