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용주는 시를 몇 번이나 되짚어 봤다.
일어나지 않던 일이 벌어진 데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고, 그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용주는 한 가지 문장에 집중했다.
무심결에 지나쳤던 시의 다섯 번째 문장.
거기 적혀 있는 사내들은 분명 제단에 바칠 것들을 들고 평소와 같은 걸음을 옮겼다고 적혀 있었다.
‘설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는 두 개의 궤짝이 들려 있었다.
놈들이 나타난 시점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될 것도 없었다.
놈들이 나타난 시점은 자신이 두 번째 믿음의 증거를 챙긴 시점.
형만이 이미 하나의 궤짝을 회수했다고 가정했을 때 바쳐야 할 마지막 증거였다.
‘여기 걸어보는 수밖에 없나?’
믿고 걸기에 너무도 위험한 도박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두 개의 도박.
용주는 그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멈추느냐. 아니면 걷느냐.
‘후우.’
머금고 있던 호흡을 내뱉은 용주는 급격하게 속도를 줄였다.
두 가지 방법 중 용주가 택한 방법은 평소대로 걷는 것.
앞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평소처럼 걷는 게 생각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용주에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끼기긱!!
용주의 급브레이크와 함께 삽시간에 좁혀지는 거리.
두근두근!
양손에 하나씩 궤짝을 들고 있는 용주의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고 있었다.
몸 어디에 대동맥이 지나는지까지 다 느껴질 정도였다.
뒤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는 용주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주는 그러지 않았다.
언노운들의 소리가 바로 한 걸음 뒤까지 따라온 그 순간까지도.
용주는 ‘평소와 같은 걸음’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런 용주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용주는….
베이지 않았다.
‘성공한 건가?’
자신을 앞질러 가는 언노운들의 행진에 용주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인간이기에.
겪어보지 않은 죽음의 위협이었기에 용주의 호흡은 평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심호흡을 한 용주는 서둘러 이동을 계속했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소리들은 앞서 나간 것과는 별개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휴우. 두 분 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태영이 식은땀을 닦아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안인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 개의 궤. 이제 이걸 바치기만 하면 되는 거네.”
두 사람이 가져온 나무 궤짝을 바라본 수지가 이야기했다.
나무 궤짝 안에 든 금괴를 다시 한번 확인한 헌터는 그중 하나를 자신의 품속에 숨겼다.
그가 이 금괴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마음속에 욕심이나 탐욕이란 단어는 없었다.
죽음 앞에 그런 건 아무런 가치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삶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 그에게 이 금괴는 거부할 수 없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하나는 황금이고, 나머진 뭐가 들은 거야?”
금괴 하나를 품에 슬쩍한 헌터가 궤짝을 닫으며 물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그였다.
하지만.
퍽!
그와 동시에 그의 면상으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컥!”
주먹의 주인은 외팔이 된 형만.
남아 있는 왼손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쥔 형만은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돈이 그렇게 좋다면 가져가도 좋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는 두고 가야 할 거다.”
형만의 한마디에 헌터는 금괴를 떨어뜨렸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뭐가 들었든 달라질 건 없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안에 든 걸 확인하는 게 아니야.”
땅에 떨어진 금괴를 집어 든 형만은 그걸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금괴가 든 궤짝을 집어 든 형만.
걸음을 옮긴 그는 그걸 제단에 올려놓았다.
예물을 위한 세 개의 제단 중 남은 건 이제 두 개였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용주와 태영은 나머지 두 개의 궤짝을 들어 올렸다.
세 개의 궤가 바쳐진 제단은 놀라우리만큼 고요했다.
“저희가 뭔가 놓친 걸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태영이 물었다.
“어쩌면… 이걸 가져온 사람이 두 명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생각에 잠겼던 용주가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이긴 했지만, 싱크로율이 100%가 되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어?!”
변화가 생긴 건 그때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의 빛이 피라미드 앞으로 떨어진 것이다.
“아저씨! 저기 보세요! 빛이에요!”
빛의 존재를 확인한 태영이 외쳤다.
빛을 잃어버린 게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건만.
저 앞에 떨어진 빛은 눈물 날 정도로 반갑게만 느껴졌다.
한 지점으로 떨어진 빛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갔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빛이 뻗어 나가는 건 오직 일직선.
길의 끝은 이내 벽에 닿았고, 빛이 닿은 벽면에선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출구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출구… 출구다!!’
다른 네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헌터는 곧장 뛰쳐나갔다.
경사진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하아!”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뛰쳐나간 헌터의 모습에 태영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욕이 절로 나오네요. 정말로….”
수많은 욕을 삼켜낸 태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저희도 가죠. 게이트를 닫진 못했지만,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어요. 이 일을 길드에 보고하면….”
“잠깐.”
제단을 내려가려는 태영을 형만이 붙잡았다.
시에 적혀 있는 내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의심이 사실이란 건 저기 가고 있는 헌터가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응? 왜 그러는데요?”
“저 녀석을 잘 봐라. 뭔가 이상한 거 못 느끼겠나?”
“이상한 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헌터의 뒷모습을 보던 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없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어디가 이상한 건지….”
“그림자가… 없어.”
태영과 같은 선상에 선 수지가 이야기했다.
“그림자?”
그녀의 물음에 태영은 다시 한번 헌터를 관찰했다.
정말이었다.
어느 방향에도 그의 그림자는 생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발아래에도 없었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저렇게 움직이는데도 그림자가 아예 없다니.”
경우에 따라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저건 확실히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하핫! 하하하핫!!”
눈앞에 보이는 출구에 헌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살아 나간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발가벗고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기분이었다.
언노운들의 무리는 자신을 공격해 오지 않았다.
빛이 있고 소리도 있었지만, 자신은 안전했다.
“살았어! 이제 여기서 나가는 거야!”
출구에 도착한 헌터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뭐야….”
손을 뻗은 헌터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곳은, 출구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막혀 있었다.
“뭐야! 이게 뭐냐고!!! 열어! 열란 말이야!”
믿기지 않는 현실에 헌터는 광분했다.
손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벽면을 때리고 또 때렸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곳은 출구가 아니었다.
‘젠장! 돌아가야겠어.’
간신히 현실을 직시한 헌터는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처럼 몇 대 뚜드려 맞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저들에게 뭔가 피해를 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방향을 돌린 헌터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도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 갈 때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단까지 이어지던 빛의 길은 사라져 있었다.
“으아악!!!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전당을 울리는 끔찍한 비명에 태영은 치를 떨었다.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저기 있는 이가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길어봤자 15초 내외의 시간 만에 헌터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린 이제 어떻게 하죠?”
시선을 돌린 태영이 물었다.
예물은 성공적으로 바쳐진 것처럼 보였다.
빛도 내려왔다.
하지만 그 결과가 저거였다.
그의 최후는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죽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시의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실된 빛을 찾으라고.”
전당의 마지막 계단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형만이 대답했다.
헌터가 갔던 빛의 길이 사라지고도 빛은 계속해서 내려왔다.
그리고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시작 부근은 같았다.
하지만 빛이 내려올 때마다 열리는 길의 방향은 각양각색이었다.
빛이 처음 내려왔을 때 형만은 생각했었다.
처음 내려온 저게 길은 아닐 거라고.
시에서 말한 거짓된 빛이란 게 먼저 나타날 거라고.
“진실된 빛…. 아! 그럼 이 중에 그림자가 생기는 빛이 그 진실된 빛이라는 거 맞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헌터의 죽음에서 얻은 정보에 의지한 형만은 때가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형만의 팔 아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보세요! 그림자예요!”
그림자의 등장에 태영이 외쳤다.
빛이 나타나고 처음 드리운 그림자였다.
“빨리 움직이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거라고요!”
“잠깐!”
서두르는 태영의 손목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용주였다.
수지의 눈동자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의견은 충분히 타당하다. 근거도 있고. 하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모순이 있다.”
“모순?”
형만이 눈썹을 기울였다.
“그게 뭔데?”
“예물을 바친 세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그림자를 구분하지?”
수지의 물음에 용주가 대답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분명 진실된 빛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용주는 과연 그게 맞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용주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렇네요.”
용주의 추리에 입이 떡 벌어진 태영이 이야기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중 트릭. 이것도 가짜란 거네. 그럼.”
“이게 아니면 진실된 빛이란 건 어떻게 찾는 거려나요.”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나타난 또 다른 문제에 태영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으로 그림자가 생겼던 빛은 사라지고 있었다.
“…….”
형만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용주의 다음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자리엔 A급 헌터가 두 명이나 있었다.
경험도 강함도 E급 헌터인 용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베테랑들이었다.
형만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빛은 가짜였고, 헌터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걸로 자신의 생각이 입증됐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E급인 녀석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모순을 정확히 짚어냈다.
어둠 속을 헤치는 능력도 그랬지만, 이 녀석의 판단력과 분석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빛을 찾는 방법이라….’
눈을 감은 용주는 형만이 했던 것을 따라 했다.
앞으로 뻗은 용주의 팔 위로 빛이 떨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가온 또 한 번의 빛무리.
그림자가 생기는 두 번째 빛에 용주의 손이 꿈틀거렸다.
눈을 뜬 용주는 손을 움켜쥐었다.
이 빛은… 지금껏 왔던 것들과 조금 달랐다.
“뭔가 있어?”
수지가 물었다.
“난 지금 이 빛이 정답일 거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묻는 수지의 물음에 용주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용주가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한 수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가 달라요?”
“글세…. 난 잘 모르겠는데.”
태영의 물음에 수지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빛은 지극히 평범했다.
어떤 점에 용주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수지는 알 수 없었다.
형만이 손을 뻗은 건 그보다 한발 늦게였다.
‘이건…. 그런 건가….’
그리고 형만은 용주가 왜 그런 판단을 내린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빛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