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장 시끄러운 녀석을 가장 먼저 배치한 용주는 태영과 수지의 손을 차례대로 잡아끌었다.
그자가 반발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속도를 높인 녀석들은 무서운 기세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용주가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일을 강행한 건 아니었다.
용주는 그가 절대 소리를 지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헌터가 무기를 버린다는 건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살기 위해 무기까지 내려놓은 D급 헌터가.
그것도 이미 한 번 정신줄을 내려놓았던 그가 그 정도 판단도 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게 용주의 판단이었다.
체스판 위의 체스 말처럼 하나하나 옮겨지는 사람들.
머릿속에 그린 안전한 자리에 세 사람을 배치한 용주는 머릿속에 남은 두 위치를 떠올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기준으로 두 거리는 비슷해.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 하날 선택할 시간은 없을 거야.’
용주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챙기지 못한 마지막 한 사람.
형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형만이 쓰러진 위치까지 달려가 그를 확인하고 그를 인도할 시간은 없었다.
‘녀석이라면 분명 눈치챘을 거야. 믿는 수밖에.’
왼쪽을 힐끔 쳐다본 용주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두 위치는 비슷했다.
하지만 형만이 쓰러졌던 위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거리 차이는 명확했다.
한 발판에 위치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
그를 믿는다면, 자신이 가야 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자리가 겹치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죽음을 감내해야만 할 테니 말이다.
‘쓰러진 석상이 두 개. 그다음 오른편에 있는 석상을 끼고 옆으로 세 타일.’
생각한 그대로의 걸음을 옮긴 용주는 오른손 끝으로 땅을 짚었다.
생각한 대로 타일엔 악기가 조각되어 있었다.
‘여기까진 오케이. 그럼 남은 건….’
몇 걸음을 더 옮긴 용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일을 짚었다.
그리고… 타일을 짚은 용주의 눈빛은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타일이, 악기가… 그려져 있어야 할 타일이… 부서져 있었다.
‘이게 왜… 대체 언제 부서진 거지?’
당황스러움을 서둘러 삼킨 용주는 눈을 감았다.
이게 언제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지금 해야 할 건 부서진 타일로 인해 바뀔 놈들의 경로를 계산하는 것.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부분은 이 타일이 앞선 세 개의 타일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위치에 있단 것이었다.
‘계산해야 할 건 내가 서 있을 자리와 형만이 있는 자리….’
정신을 집중한 용주는 계산을 다시 했다.
점이 하나 사라진 건 얼핏 보면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의 변화로 인해 변하는 것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형만이 있는 위치에 대해 계산한 용주는 이 변화가 그가 있는 곳에 영향이 주지 않을 거란 걸 확신했다.
적어도 자신이 모르는 붕괴가 더 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남은 건 이제 하나.
‘내가 있으려고 했던 곳은 일단 안 돼.’
놈들이 움직일 새로운 경로를 예측해 낸 용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계산이 맞는다면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공간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한 개의 타일조차 되지 않았다.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타일의 정중앙.
놈들의 낫이 삼각형을 이루며 교차할 그곳이었다.
놈들의 낫은 부서진 타일을 밟으려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악기로 가려면 적어도 세 명의 언노운은 그 자리를 지날 것이다.
‘해보는 수밖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몸이 갈가리 찢길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용주는 여기 걸어보기로 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끼이익!
땅을 깎는 날카로운 소리는 헌터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입을 틀어막은 헌터는 전력을 다해 숨을 참고 있었다.
헌터를 지난 소리는 순차적으로 태영과 수지를 지났다.
형만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자리 근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비명이나 살점이 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용주 하나.
삼각형을 그리며 죄어 오는 소리 속에서 용주는 최대한 몸의 부피를 줄였다.
어둠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공포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용주의 정신은 전혀 흐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서 팔 하나가 날아가는 상황 정도까진 각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끽!! 끼기기긱!!
곁을 스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바람.
언노운들이 곁을 떠났음을 인지한 용주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형만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던 그곳.
어둠을 가른 용주의 시야에 들어온 건 붕대로 절단 부위를 감싸고 있는 형만의 모습이었다.
“생각을 듣고 싶군.”
많은 것들을 생략한 용주가 그에게 물었다.
거두절미한 용주의 물음에도 형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끝에 도달한 녀석들이 처음부터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말란 법은 없다. 반대쪽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고 가정하면….”
용주는 손끝으로 타일을 짚었다.
놈들이 지난 타일 중 일부는 손상의 정도가 심했다.
만약 이런 게 수십 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경로를 바꾼다고 생각하면….
대응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
“일단 제단으로 가야겠군.”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역시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거기라면 녀석들이 몇 번을 같은 행동을 취해도 안전한 사각일 것이고, 시의 내용을 생각해 봐도 가야 할 곳이었다.
“같은 생각이다.”
용주의 주장을 수긍한 형만은 그의 눈빛을 살폈다.
용주의 시선은 자신의 오른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쯧! 차라리 죽는 편이 더 좋았겠군. 고작 E급 애송이 따위에게….”
혀를 찬 형만은 고개를 돌렸다.
“팔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이 어둠 속에서는 이제 찾지도 못할 물건이니까.”
“…살아 있는 녀석들은 내가 데려가겠다. 혼자 가는 데 문제는 없겠지?”
“날 뭘로 보는 거냐? 난 A급 헌터 박형만이다!”
“그럼 정상에서 다시 보는 걸로 하지.”
형만을 등진 용주는 발소리를 죽인 채 달리기 시작했다.
방 끝에 도달한 언노운들의 노랫소리는 천장을 지나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속도가 아까보다 더 빨라졌어.’
머리 위를 지나는 녀석들의 속도는 심상치 않았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제단 정상으로 간다.”
수지의 손을 붙잡은 용주는 곧장 태영에게로 향했다.
다른 설명은 없었다.
태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용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용주의 말에 꼬리를 단 사람은 단 한 명.
“그래? 알았어! 근데 그 전에 내 무기부터 좀 찾아줘 봐. 그건 가져가야 할 거 아니야?”
헌터뿐이었다.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할 때입니까? 저 녀석들 벌써 다시 오기 시작했다고요!”
상황 파악도 못 하는 헌터를 향해 태영이 외쳤다.
고구마를 한 열 개 입에 쑤셔 넣어도 이것보단 속이 덜 답답할 것 같았다.
“찾고 싶으면 찾아라. 내 알 바 아니니까.”
헌터의 말을 무시한 용주는 수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용주는 수지의 팔만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수지의 반대쪽 손은 태영의 팔을 잡고 있었다.
헌터의 팔을 잡고 있는 이는 태영.
‘젠장…!’
갑작스러운 출발에 헌터의 팔을 놓칠 뻔했던 태영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들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 죽게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씨발, 진짜로 뒈지는 줄 알았네.”
아슬아슬하게 제단에 도착한 헌터가 침을 뱉었다.
땅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바로 자신의 뒤까지 따라붙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아마….
“그래도 여긴 안전한가 보네. 따라오지 않는 걸 보니까.”
자기가 뱉은 침을 짓밟은 헌터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을 추격해 오던 소리들은 다시금 되돌아가고 있었다.
“X발, 아깐 고마웠다.”
제단을 오르는 태영의 뒷모습을 쫓던 헌터가 이야기했다.
태영의 손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놓쳤었다.
그때 그가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고깃덩이가 되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제가 말씀드렸었죠. 도움이 되지 못할 거면 방해라도 되지 말라고.”
“…….”
“이번엔 잡아드렸지만, 다음이 온다면 저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 앞서 부디 한 번 더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헌터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태영은 앞만 보며 나아갔다.
차분하고 이성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분노가 담겨 있는 태영의 목소리에 헌터는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다섯뿐인가? 처참한 숫자군.”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만이 네 사람을 맞이했다.
상황이 좋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고 해도 처참한 건 처참한 거였다.
“리더! 무사하실 줄 알았다고요.”
형만의 목소리를 들은 태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할 줄 알고 있었다는 사람치곤 상당히 감정적인 태영의 목소리였다.
“팔은? 오른팔 어떻게 했어?”
형만의 상태를 훑어보던 수지가 물었다.
압박을 통한 지혈의 상태는 제법 양호했다.
당연히 후속 조치를 더 취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었을 최선의 조치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복구에 중요한 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S급 의료 헌터 중엔 잘린 팔다리와 망가진 장기까지도 복구할 수 있는 자가 있다고 한다.
이는 수지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급 의료 헌터인 수지로서는, 사라진 팔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어딘가 있겠지. 아까 놈들이 지날 때 갈기갈기 찢겼을 수도 있고.”
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형만의 이야기에 수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련은 없는 모양이네. 팔 줘봐. 제대로 치료해 줄 테니까.”
“아니, 치료는 나중에 받겠다. 네 손에 깃들 빛을 보며 녀석들이 반응할 여지가 있다.”
수지의 치료를 거부한 형만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이봐요! A급 헌터! 이게 대체 무슨 난린지 설명 좀 해봐요! 벌써 7명이나 죽었다고요! 나도 지금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형만의 앞까지 다가온 헌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길드에서 대체 뭐라고 했었죠? 뭔가 들은 거 맞죠? 이딴 게 정말 D급 카오스 게이트라고 말하려고 하려는 건 아니겠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믿을지 말지는 자네 자유다만, 길드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따로 없었다. 이곳에 대해서도, 저 언노운들에 대해서도.”
“그럼… 우리가 살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요? 구조 신호는? 구조 신호는 보낸 거겠죠?”
“바깥에서 사람이 더 들어와 봤자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사망자만 늘어나는 꼴이 되겠지.”
“그럼 뭐 어떡하자고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팔도 잘렸으면서! 무기도 다 잃어버려서 더 싸우려야 싸울 수도 없다고요! 설마 맨손으로 저것들을 때려잡자는 미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헌터가 언성을 높였다.
형만의 설명도 판단도 도무지 이해가 가는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게이트가 안정화되면 어차피 다 끝이라고요! 저것들이 밖으로 나가면 어차피 똑같다고요! 제 말이 틀려요?!”
“살아나갈 방법이라면 있다. 그게 게이트를 닫아줄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험을 알릴 순 있을 거다.”
“살아나갈 방법? 그게 뭔데요?!”
헌터의 물음에 형만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시선을 좇은 헌터의 시선은 용주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