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연결 고리
시간이 흘러 3달이 지나갔을 때다.
“언니, 우측!”
진소혜의 다급한 주의에 진소진이 우측으로 냉기를 흩뿌렸다. 냉기들은 즉시 얼음이 되어 그녀들을 보호하는 하나의 벽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무색하게, 진소진의 얼음을 단 3초 만에 녹일 정도로 강력한 화염이 쏟아졌다.
마왕의 입구를 수성하는 견종, 케르베로스. 몸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고, 머리는 3개나 있는 몬스터다. 덩치가 매우 커다래서 체중으로만 싸워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몬스터.
3개의 머리에서 나오는 화염구가 엘프 군단을 태워버렸다.
“소진아, 마나 얼마나 남았어?!”
“아직 여유롭지만, 이 상태로 가면 위험해요!”
대화할 틈도 없이 빠르게 쏟아지는 화염구. 냉기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지안은 매 싸움에 있어 불리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전선에 서서 정보도 없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약점을 수집하고 후세를 이을 헌터들에게 알렸다.
그 과정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사지가 날아갈 뻔한 기억도 있었고, 목이 잘려 죽기 직전까지 왔다 간 경험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항상 눈앞의 몬스터를 분석하고, 또 변수를 창출해서 싸움을 해왔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다.
불리하기 그지없는 싸움이라 생각하는 엘프 군단들이지만, 이지안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빛이 났다. 그녀는 항상 하던 것처럼 분석했다. 케르베로스의 행동, 급소 패턴을 분석해서 최선의 결과를 생각했다.
진소진의 냉기가 한 점에 모이더니 커다란 창을 만들었다. 그 창은 케르베로스의 화염구를 뚫어 중앙 머리에 직격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케르베로스. 고개를 흔들고 다시 화염구를 모았다.
상성도 통하지 않아 보이는 몬스터. 생채기 하나 없는 게 엘프 군단도, 진 자매 일행에도 절망감을 줬다.
하지만 이지안은 달랐다.
‘소진의 빙결창이 왼쪽 머리에 꽂히기 직전,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급하게 틀어서 막아냈어. 가운데 머리는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하는 쪽인가? 아니면··· 왼쪽 머리가 약해서?’
뭐가 됐든, 수상하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크다. 가끔 지능이 높은 몬스터는 약점처럼 보이게 해서 역으로 낚는 경우가 있지만, 케르베로스는 본능에 맡겨 싸우는 몬스터. 그 정도의 지능은 보이지 않는 놈이다.
그런 판단을 내린 이지안은 곧바로 지휘를 내렸다.
“소진아! 왼쪽 머리를 노려!”
“알겠어요!”
진소진은 이지안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지안이 지금까지 세운 혁혁한 공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전투를 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됐던 이지안이다. 배신 또한 할 이유가 없는 그녀였기에 진소진은 그녀를 믿고 왼쪽 머리를 향해 달려갔다.
왼쪽 머리를 향해 달려가는 진소진을 보고 진소혜는 양손을 합창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신성한 기운이 솟아나더니 진소진을 향해 나아갔다.
“고마워, 소혜야!”
“언니! 상처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에게 맡기세요!”
진소혜가 걸어준 건 상시 회복과 근력, 체력, 민첩이 모두 올라가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진소진의 전투 스타일이 매우 과격하게 바뀌었다. 흡사 그녀의 모습은 광전사와 같았다.
케르베로스의 오른쪽 머리가 단단한 이빨로 콰득, 물려고 했지만 놈이 문 것은 거대한 기둥이었다. 덕분에 입천장과 아래턱이 뚫리며 상상도 못 할 고통을 줬다.
오른쪽 머리가 깨갱 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며 발버둥을 치자, 나머지 2개의 머리가 몸의 균형을 잃었다. 가운데 머리가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고 화염구를 사방으로 뿜어댔지만, 소진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이익, 진소진이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으면서 돌격했다. 몸이 불타는 고통은 느끼지 않았다. 냉기로 피부를 감싼 채 화염을 뚫어냈다.
그걸 알아챈 가운데 머리가 빠르게 고개를 숙여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거대한 화염구를 모으기 시작했다. 분명 저 공격을 맞는다면 냉기도 상관없이 몸이 불탈 것이다.
태양과도 같은 열기에 잠깐 주춤한 진소진, 단 1초라도 망설인다면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오는 상황.
그녀가 한 판단은 돌파였다. 어쩌면 팔, 아니면 다리. 사지 한쪽이 불에 탈 수도 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뒤로 뺄 경우 뒤에 있는 진소혜가 위험했다. 엘프 군단 또한 활을 쏘고 있었지만,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나 됐다.
가운데 머리가 그의 이명에 걸맞게 지옥에서 끌어올린 불꽃이 한계까지 모였을 때.
상상도 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진소진을 향해 쏘아졌다. 마치 탄환처럼 쏘아지는 화염구는 대지를 녹이며 날아갔다. 지금까지 봐왔던 화염구의 속도는 진소진의 동체시력으로도 충분히 회피할 수 있었기에 돌파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 쏘아진 화염구는 예상외. 그리고 소진의 잘못된 판단이 죽음을 향해가고 있었다. 사지 한쪽이 아니라 온몸이 불타기 직전.
진소진의 눈앞에 무형의 포탈이 생겨났다.
그녀가 지구와 엘라시움을 건널 때 봐왔던, 익숙한 형태의 포탈. 설마 시안이 여기로 넘어온 건가 싶었지만.
“달려! 왼쪽 머리를 통째로 베어버려요!”
이지안이 진소진의 뒤에서 외쳤다. 이지안의 능력은 변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세계수의 포탈을 어쭙잖게 따라한 것이다.
거의 만능과도 같은 그녀의 힘이 세계수의 포탈을 구현하는 데 절반을 성공한 격이다.
이지안이 도움을 줬다는 걸 깨달은 소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머리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이를 콱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이 보기엔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궁지에 몰린 것처럼 말이다.
진소진이 냉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빙결검. 하지만 그 크기가 달랐다. 한 손에 착 감기게 만들었던 빙결검이 지금은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베어낼 만큼의 크기로 변하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잡아도 부족할 만큼 커다란 손잡이. 검날의 길이는 사람도 일도양단할 수 있을 만큼 길었다. 그 검을 어디에 쓸지는 정해져 있었다.
왼쪽 머리가 뒤늦게 화염구를 모았지만···.
“개는 자고로 된장을 발라야지.”
서걱, 소진의 빙결검이 푸른 실선을 그리며 화염구와 통째로 머리를 벴다. 왼쪽 뇌가 미간, 콧등 그리고 입이 둘로 나뉘며 뇌수를 뿜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매우 느려진 듯, 케르베로스에게 나오는 피가 천천히 사방으로 퍼져갔다. 이지안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빠르게 왼쪽 머리를 훑었다.
냉기의 영향을 받아 천천히 얼어붙고 있는 머리. 고통을 호소하는 가운데와 오른쪽. 단순히 고통 때문에 왼쪽 머리를 지키는 거라면, 오른쪽 머리가 몸을 더 아꼈을 거다. 역시 약점은 왼쪽에 있다고 판단한 이지안은 케르베로스의 입 안을 샅샅이 뒤졌다.
선혈이 낭자하고 고기 조각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지안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약점이 될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핏덩이들을 거르고 걸러서 그녀가 본 것은 보라색의 마석. 목구멍 쪽에 박혀 있는 것이 무척이나 수상해 보였다. 저걸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소진아! 입 안, 목구멍 쪽에 마석이 있어! 그걸 노려!”
진소진의 판단은 빨랐다.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발밑에 얼음을 소환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갈라지고 있는 케르베로스의 입 안에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좌로, 가운데 머리와 오른 머리를 한꺼번에 베었다. 마석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머리들은 고기 조각이 되어 바닥을 점칠했다.
철퍼덕, 머리를 잃은 몸이 힘없이 떨어졌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엘프들은 살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아군이 이 정도로 쌔다는 거에 불안함을 느꼈다.
“와, 와! 언니! 언니가 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쌜 줄은 몰랐어요!”
“뭐어? 내가 시안 앞에서만 약할 뿐이지, 이런 놈한테는 무적이라고 무적.”
자랑스럽게 말하는 소진과 옆에서 언니를 자랑하고 있는 소혜.
다들 축제 분위기였다. 단, 엘프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라이만제르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자들 같습니다. 저희가 뒤를 노린다 해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바젤 경. 그래서 우리가 포기라도 해야 한 단 말인가?”
“그, 그건 결단코 아닙니다!”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강력한 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고개를 숙인다면 우리의 뒤를 잇는 엘프까지 모두 고개를 숙이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 알겠나 바젤 경?”
“알겠습니다!”
바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뒤에 다른 엘프들에게 희망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라이만제르는 턱을 짚고 고민했다.
‘그들의 사기마저 떨어트릴 순 없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서 강해지고 있는 거야. 지금은 우리를 건들고 있진 않지만, 분명 마지막엔 버림 패로 쓰이겠지.’
그는 눈을 감고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이는 건 어둠이었다. 그들의 미래는 암울했으니 말이다.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인 엘프들과 달리, 진 자매와 이지안 일행은 화목했다.
소혜는 소진에게 다가가서 작게 소곤거렸다.
“언니, 그··· 배는 괜찮은 거지?”
“배? 아···. 괜찮고 말고. 엘프의 미래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거잖아.”
소진은 작게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살짝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중심적으로 말이다. 그건 비단 소진만이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서 괜찮지만, 언니는 엄청 움직여야 하니까. 혹시라도 이상하다면 나한테 얼마든지 말해.”
“물론이지.”
소혜 역시 소진과 똑같이 배를 쓰다듬었다. 서로 사이좋게 배를 쓰다듬는 것이 마치 임산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지안이 툭, 건드리듯이 말했다.
“소진 씨와 소혜 씨.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 까요?”
“아, 아! 네. 물론이죠···.”
“혹시··· 임신하셨나요?”
“네?! 아니, 그게···.”
급하게 배에서 손을 땐 소혜였지만, 이지안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더욱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진소진이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지안 언니, 언니가 들으신다면 저희를 싫어하시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미리 사과할게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네?”
진소진은 그녀들이 사실 임신했다는 것을 밝히려 했었다. 하지만 그걸 이지안이 소진의 말을 막았다.
“그야 평소에도 배를 쓰다듬으면서 웃으시는데요. 제가 그것도 모를까요? 후후.”
“아···.”
작게 탄식을 내는 진 자매. 이미 그녀가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었다. 이지안 역시, 시안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들은 이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말이다.
좋아하는 남성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겐 큰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데.
“저를 배려하기 위해서 그러신 거라면 괜찮아요.”
어버버하고 있는 진 자매를 두고 이지안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 또한 배에 천천히 손을 옮기더니,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걸 본 진 자매는 생각이 순간 멍해졌다.
“저도 당신들과 똑같으니까요.”
배를 소중히 쓰다듬는 이지안.
무엇을 숨기는가. 그녀들 모두 한 사람의 아이를 배고 소중히 쓰다듬고 있었다.
진 자매들은 오랫동안 시안을 보지 못한다는 마음에,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배었고 이지안은 그와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작은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고 싶어 했다.
그 결과, 선택한 것은 아이를 가지는 것.
모든 사실을 밝힌 진 자매와 이지안은 그날 이후로 더욱 우정이 깊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