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목적 (3)
퍽, 놈의 머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푸석푸석한 머리가 휘날리며 가닥이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놈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나, 날 여기서 꺼내라!”
자릴의 하반신은 땅에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진처럼 빙결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면 고문이 편할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난 그의 앞에 가서 쭈그려 앉았다. 자릴의 머리는 이미 만싱창이었다.
머리를 꾹꾹 밟는 것도 기분 좋지만, 난 그의 머리카락을 뽑는 걸 선호했다. 대부분의 엘프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장발을 하고 다녀서 빡빡이 엘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첫 빡빡이 엘프가 돼라.”
“끄아아악! 제, 제발 멈춰!!”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은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단단히 박혀서 잘 뽑히지 않았다. 덕분에 피부가 쭉 늘어나며 상당한 고통을 유발했다. 머리카락에서 피가 나오는 건 덤이었다.
그의 비명을 악기로 삼아 정수리에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뽑자니, 지구에서 노년층에게 볼 수 있던 ‘원형탈모’가 슬슬 완성됐다. 이대로 엘라시움에 보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아마 많은 사람의 관심을 사지 않을까.
“자릴. 오랜만의 재회다. 내가 이렇게 고생해 주는 데 너도 뭐, 선물해 줄 거 없나?”
“제, 제발··· 그만해, 아니 그만해 주세요···.”
고개를 푹 숙인 놈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모든 걸 포기한 눈치였다.
처음, 놈이 저항한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머리에 정면으로 한 방. 그걸로 놈의 거대한 체구는 기능의 절반을 잃었다. 정수리를 아래로 한 방 찍었을 때. 놈의 턱이 땅과 마주하면서 이빨이 갈려나갔다.
그 정도로 놈과 나의 차이는 명확했다. 지금, 내가 땅을 딛고 있는 것과 놈이 땅에 처박힌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로제가 오기 전까지 모두 뽑아 버릴까, 아니면 이대로 둘까···.’
모두 뽑아버리면 더는 고통을 줄게 없다는 것과 원형탈모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섭섭함이 있었고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대머리 엘프를 못 본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있었구나.”
뒤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제였다.
“시간이 조금 걸렸군. 혹시 마을까지 직접 인도한 건가?”
“아니. 보다 정확한 설명을 마치고 오는 길이다. 만약 그들이 길을 잃는다면 평생을 헤멜 수도 있으니까.”
로제가 상당히 기쁜 기색의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자릴과 대화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로제 역시 자상한 목소리를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자릴의 대가리를 보더니 풋, 하고 웃었다.
“저, 저기에 박힌 놈은 자릴인 건가? 처음 봤을 땐 어디 두더지가 나온 줄 알았는데.”
“로···로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자릴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지며 곧 화색에 물들었다.
“로제! 이 미친놈으로부터 날 구해다오! 아니, 로제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소! 이놈, 생각보다 가진 힘이···.”
“그만. 내 이름을 멋대로 부르지 마.”
“로, 로제?”
퍽, 다시 한번 자릴의 머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정수리가 파여 있어서 듣기 좋은 미색이었다. 자릴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로제를 바라봤다. 아마 그의 입장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잘 모를 터다.
로제가 그의 행동을 처음부터 지켜봤다는 것도 말이다.
“자릴. 너의 실상을 지켜봤어. 넌 내게 말했지? 하프 엘프들을 존중해주는 건 물론이고 정당한 대우를 해주는 걸 약속해 놓고서는 왜 거짓말을 한 거지?”
“로제? 너 설마 처음부터 여기를···? 아니, 어떻게···.”
“부정할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
“아, 아니! 로제 사실 이건, 아아악!”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당황한 자릴은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도 잊었다. 뒤늦게 거짓말을 해보며 자신의 추함을 드러냈지만, 그것도 곧 로제에게 제지당했다.
자릴의 구레나룻을 쭉 잡아당기며 입을 다물게 했다. 그의 입에선 말이 나오지 않고 비명이 튀어나오며 적막했던 숲을 소음으로 꽉 채웠다.
로제는 생각보다 훨씬 과격하게 행동했다. 그의 머리를 잡아당겨서 땅에서 꺼내더니, 사지를 구타했다.
급소를 가격하는 것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그동안 자릴이 로제에게 베풀었던 자비가, 또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오면서 부메랑처럼 자릴을 가격했다.
그녀가 하프 엘프라서 더한 배신감을 느낀 것도 있을 터다. 동족이 고통받는 현장을 보고 더한 화를 부른 걸 수도 있고.
“끄읍, 끄으으읍···.”
“실리안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더 심하게 다룬 것 같군. 너의 복수일 텐데.”
자릴은 급소를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질척한 흙바닥이 흙탕물을 만들 정도로 말이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머리카락이 땅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나보다 더 시원하던데? 하지만 조금 더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멈춰줘.”
나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자릴의 앞에 섰다. 이 지독한 인연을 끝내기 위해서.
길고도 길었다. 수십 년간 그의 밑에서 일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탈출은 곧 죽음이라 알려지는 이곳에, 어쭙잖은 탈출 계획을 세울 정도로.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가지면 가차 없이 등을 때리던 채찍과 고함.
잊을 리가 있겠는가.
지구에서 엘라시움에 있었던 일에 대해 눈을 돌리며 여자들의 품에 도망쳤던 날들을 난 아직 기억한다.
그때를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아직도 내 손에 곡괭이를 쥔 것 같다. 그것을 높이 들던 때, 몸의 움직임과 근육이 수축과 팽창을 하는 그 느낌. 그리고 내려 찍을 때 반작용으로 되돌아오던 힘. 그건 아직도 몸에 박히듯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양쪽 구레나룻을 잡아당겼다. 엘프는 남녀노소 불과하고 장발을 하고 다닌다.
“끄, 끄으윽··· 제발, 멈춰, 주세요···.”
그건 자릴의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다. 잡아당겼을 때 그의 얼굴 길이는 넘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땅에 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나는 그가 최대한 고통을 받다 죽는 걸 원하므로.
자릴이 내가 나무를 탈 때마다 끅끅 거리며 소리를 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한 높은 곳으로, 이 구역에서 제일 높은 나무로 올라갔다. 아침을 알리던 해가 어느덧 생명력 넘치는 주황색의 빛을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다.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노을이다. 그에게는 조금 아까울 정도로.
나는 최정상에서 그의 양쪽 구레나룻을 묶었다. 밧줄 대신에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에서 꾸드득 소리가 나며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릴의 머리가 위로 들리며 꺽꺽 거렸다. 팔과 다리는 이미 부서진 지 오래. 그를 도와줄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엘프의 머리카락은 피부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 이 정도로 뽑히지 않는다.
만약 이 자리에서 산다고 해도 산 것이 아니며, 어쩌다가 탈출한다고 해도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기에 낙사한다.
나는 마무리를 장식하며 나무에서 내려왔다.
죽어도 시원찮은 자식이다. 마음속에서 그동안 나를 괴롭혀 오던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마무리를 지었나.”
“로제.”
아래로 내려가니 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기다릴 이유는 없을 텐데. 그녀도 자릴을 패면서 울분을 털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로제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리안, 너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지? 세계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마왕을 토벌하러 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너는···.”
“로제. 너는 세계수를 어떻게 생각하지?”
“세계수님에 대해서···?”
현재 엘프들은 모두 세계수에 대해 경외심은커녕 경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프 엘프를 혐오하지 않는 로제는 세계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경배까진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앨리에 대해 적의를 품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로제가 앨리를 싫어한다면···
그녀 또한 내 적과 같으니까.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실리안. 너는 세계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로제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단순히 내 생각을 묻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겠지만, 난 세계수에 대해 경배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그래. 신적인 존재에게 보내는 사랑이 아니라, 한 여자한테 보내는 사랑으로.”
로제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묻는 것처럼 눈썹을 내리깔았다. 아마 그녀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네가 말했다시피 나는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몸, 당연히 세계수를 직접 두 눈으로 봤다.”
“세계수님을··· 직접 뵙다고?”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됐지. 세계수 또한 나와 미래를 약속했다.”
로제는 이어지는 내 말에 더더욱 황당해했다. 모든 엘프들의 우상이자, 경외의 대상을 직접 본 것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누가 들어도 황당해할 만한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묻는다. 너는 세계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조금씩 기세를 끌어올렸다. 아직 몸에 남아있는 마나는 충분하다. 그녀를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다.
“잠깐! 나, 나 역시 세계수님을 경배한다. 단순히 궁금했을 뿐이야. 요즘 엘프들은 모두 세계수님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혹시 세계수님의 선택을 받은 너까지 그렇다면···. 조금 머리가 복잡할 것 같아서.”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아 보였다.
“로제, 내 목적에 대해 물었었지? 어쩌면 네가 살았던 곳, 하프 엘프 마을 사람들이 엘라시움으로 올 수도 있겠군.”
“뭐, 뭐?! 그게 가능해?”
“충분히 가능하지. 현재 엘프들, 세계수와 하프 엘프를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죽는다면 말이야.”
“너, 너는 그게 지금···.”
로제가 어버버 거리며 말을 절었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이미 거의 다 실현된 꿈이다.
“이미 세계수의 허락은 받았어. 그녀 역시 엘프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 세계수님은 절대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다.”
“네가 앨리에 대해 알고는 있나?”
나는 로제의 눈을 바라봤다. 푸른색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앨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지.
“경외심 하나 보이지 않는 엘프는 숲을 좀먹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 마땅히 경배해야 할 세계수한테 예우를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신경도 쓰지 않는 존재들이라니. 그런 자들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너무 과격한 방식이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바꿔나간다면···.”
“로제.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하프 엘프야. 엘프보다 수명이 적은 존재들이라고. 만약 우리의 수명이 다할 경우, 그땐 어떻게 할 거지?”
“·········그렇다면 후세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라시움도 그렇지만, 거의 모든 마을엔 엘프가 대다수다. 그들 모두가 죽는다면 분명 후세를 이을 길도 사라질 거다.”
“아니, 후세는 이어갈 수 있다. 숲을 좀먹는 벌레들을 죽이고 하프 엘프가 뒤를 이은다면 된다.”
로제가 미쳤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가 말한 모든 건 진심이다. 복수도 복수였지만, 무엇보다도 난 앨리가 잘됐으면 한다. 내가 죽어서도 말이다.
그리고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다. 곧 이뤄질 현실이었다. 단지, 이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갑작스러울 것이다.
무자비한 학살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을 테고, 아니면 나를 따라서 학살을 추진하는 사람 역시 있을 거다. 하지만 이미 길은 정해져 있다.
나를 위해서도, 또 앨리를 위해서도.
‘엘프를 죽이는 건 옳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