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목적 (1)
진 자매와 지안 누나가 마왕을 토벌하러 간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앨리의 집에서 뒹굴뒹굴 질펀한 삶을 산 것이나 가끔씩 토벌군에 합류해서 진 자매와 지안 누나의 멘탈 캐어 정도가 됐다.
한 달 동안 진군한 결과 놀랍게도 초반부를 넘기고 이제 막 마왕의 거처, 중반부로 돌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훨씬 약한 몬스터의 상태는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지안 누나의 역할이 꽤 컸다고 한다.
진 자매의 말로는 없는 길을 창조하거나 지상이 아닌 공중에서 전투를 펼쳐 지형에 이점을 들고 싸운 등, 전장을 수십 년간 누벼온 사람답게 놀라운 점만 보였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든든했는지. 이대로 착착 진행된다면 반년 안에 마왕 토벌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한 달 동안 내가 앨리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언제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르는 진 자매와 지안 누나 때문이다.
이제 안정적인 토벌을 진행하고 있다면 앨리의 집에 계속 있는 것보단 엘라시움으로 가고 싶었다.
"서방님, 어디 가세요?"
침대에 누워있던 앨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의 가슴께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던 이불이 사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우유빛깔의 새하얀 피부가 남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커다란 젖가슴과 핑크빛 함몰유두가 절로 손을 가게 만들었지만, 밤새 만져대던 것이니 참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앨리는 나를 원하고 있고, 나 또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녀가 옆에 있는 데 굳이 지구로 복귀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우린 매일 한 침대에서 자고 생활했다. 신혼부부가 있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앨리가 매끼 밥을 만들어 주는 것은 물론이며, 집 앞에 있는 숲으로 나가서 산책하거나 아니면 호수 속에 들어가 같이 수영을 하는 등. 놀고먹는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기 그지없는 삶을 즐겼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성적인 생활 역시 포함된다. 앨리는 나를 이리저리 이끌면서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몸을 섞는 걸 원했다. 섹스의 참맛을 알아버린 앨리 덕분에 거처 안에 내 정액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서방님, 혹시 엘라시움으로 내려가실 생각이신 건가요? 그러면 저도 함께···."
"아니, 이번엔 나 혼자 갈게. 앨리와 함께 가는 것도 좋지만, 내가 불안해. 아무리 몸을 감춘다 해도 앨리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더라고."
"······."
앨리는 이불을 꽉 쥐며 손을 파르르 떨었다.
사실 그녀와 함께 엘라시움을 2번 가본 결과, 나는 그녀를 데리고 가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밖으로 나갈 때 망토로 전신을 가릴뿐더러 얼굴까지 후드로 꾹 눌러써서 갔지만 아주 약간의 관심을 덜었을 뿐, 세계수의 미모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세계수는 강하다. 거처 안에 있을 경우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강력한 힘이 작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거처 안. 그 밖으로 나간다면 한 명의 소녀가 되는 것이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다.
만약 몸매도 얼굴도 뛰어난 그녀가 무방비하게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가장 최악의 경우 강간이다.
엘프가 강간을 한다는 모습을 쉽게 생각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엘프의 성욕은 적긴 해도 없는 게 아니다. 각자의 개성을 갖추고 있듯, 성욕이 적은 엘프도 있고 성욕이 흘러넘치는 엘프도 있는 법이다. 당장 나만해도 하프 엘프긴 하지만 하루 5번이나 자위를 할 정도의 성욕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엘프를 관리하는 사람이 세계수가 아니라 대장로로 바뀐 지금, 범죄율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더는 평화롭고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보다는 점점 인간의 색을 갖춰가고 있는 엘프가 있을 뿐이다.
"그럼 다녀올게.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울상 짓지 말고."
"네에···."
앨리가 뺨을 부풀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마치 천사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거기에 같이 갈까 마음이 훅 기울었지만 만약 앨리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친구나 하나 볼까.'
내가 평생을 있던 곳은 노역장. 친구 따위야 있을 리가 없다. 단지 지겹도록 잡아왔던 곡괭이 정도가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친구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 있다.
'노예 감시관. 예나 지금이나 싸가지 없는 건 똑같았는데 그 싸가지를 죽일 기회가 왔군.'
나는 저번에 노예 감시관을 만났던 장소로 향했다.
*
엘라시움의 마을은 겉보기로 보기엔 생명이 흘러넘치는 성역과도 같았다.
자연은 사람에게 경이로운 공포를 줄 정도로 웅장했고 동물들은 한 곳에 모여 노래하는 듯 아름다움을 속삭였다.
엘프들은 식물에게 아주 깨끗한 물을 선물해주고 동물들에게는 먹이가 부족하지 않도록 채소를 줬다. 육식계 동물들 역시 엘프의 숲에 길들여져서 고기와 채소를 같이 먹을 수 있는 잡식이 됐다.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과 친구 같은 동물들. 하지만 붓을 잡고 합작을 하게 된 엘프들까지 아름답다는 건 아니었다.
분명 옛날에는 그 환경에 걸맞은 인물들이었으나 지금은 외부의 압력과 대족장이 만들어낸 엘프의 탈을 쓴 괴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였다.
'역시 조금 눈에 띄는 것 같군.'
나는 후드를 조금 더 깊이 눌렀다.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아마 내가 뒤집어쓴 후드가 눈에 띈 것도 있겠지만, 내 외모가 가린다 해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니까.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광터와 네 갈래로 갈라진 길. 그리고 가장 왼쪽, 노역장에 가는 골목으로 향하는 중간에 분명···.
'찾았다. 분명 노예 감시관이야.'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듯이 배가 볼록 튀어나온 것과 광산에 오래 있다 보니 거뭇거뭇한 피부. 거기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오만한 얼굴이 노예 감시관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집 앞, 현관문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도 다녀오겠소. 요즘 마을이 흉흉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아무한테나 문을 열어주지 마시오."
"자릴도 참. 제가 누구한테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면서. 다녀오세요."
노예 감시관한테서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울리지도 않는 목소리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 집에서 같이 나온 것을 보면 노예 감시관의 아내인 것 같다. 나는 골목길에 숨어있는 상태에서 노예 감시관의 뒤를 쳐다봤다.
'이대로 저 뒤통수를 후려갈긴 다음 어디로 끌고 가서 패는 것 또한 괜찮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기분이 드는데.'
조금 더 속이 뻥 뚫리는 그런 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문득 멜리나가 생각났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진 잘 몰라도 분명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상태로 헤어졌는데.
나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그 좌절감에 물든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멜리나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카닐 역시.
그들의 미래를 보진 안았지만, 딱 봐도 대판 싸우고 헤어졌겠지. 멜리나는 이미 나에게 속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나는 노예 감시관이 나간 곳을 봤다. 거기에 아내와 대화하던 다정다감한 대화가 생각났다. 생각보다 부부애가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더 자세한 건 깊게 파고들어야 알 수 있지만.
그리고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나는 지금 노예 감시관이 나온 집 앞에 섰다.
똑똑, 나무로 된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안쪽에서 꽤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대부분의 엘프는 1000살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이상 '늙었다'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노예 감시관과 결혼을 할 정도라면 최소 몇 백 살을 먹었을 게 분명한 자였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엔 '늙었다'라기 보단 '젊다'라는 느낌의 목소리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최근 치안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아서 말입니다. 작게나마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협력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엘프 경비병 인척 해서 천천히 접근했다. 최근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만큼 이보다 좋은 변명거리는 없을 것이다.
- 물론이에요. 그럼 안으로 들어오···.
문이 열리며 노예 감시관의 아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새하얀 눈꽃을 연상케 하는 흰색의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거기에 오뚝한 코와 뽀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엘프라는 종족이 아니더라도 확실한 미녀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그녀의 미모에 놀란 듯, 그녀 역시 내 외모에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입을 작게 벌리고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건 이제 익숙한 상황이었으니까.
'노예 감시관 그 새끼한테 이런 예쁜 아내가 있을 줄이야. 어쩐지 다정하게 대하더니 그럴 만도 하군.'
노예 감시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다. 적어도 하이 엘프에게 걸맞을 정도의 외모였다.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안으로요? 여기서 가볍게 문답을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 저희 경비원들에게 남는 것이 시간이니까요. 몬스터들이 적어지고 나선, 외부보단 내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시다면···. 안으로 들어오세요. 가볍게 마실 것이라도 드릴게요."
진입은 순조로이 해결됐다. 방안을 둘러보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방을 따스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외에는 가족끼리 식사하는 테이블과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이쪽에 앉아 계세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노예 감시관과 그녀 둘이서만 지내는 것 같다.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준비하는 뒷모습엔 경계하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
그녀가 쉽게 집안으로 들이보낸 것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한테 있어서 그녀는 내 손바닥 위다.
내가 마왕 토벌에 있어 도움이 안 된다 해도 지구에서는 나름 A급 각성자로 불리는 헌터다.
엘라시움에 있는 엘프들의 평균 수준은 D~C급. 마을 경비병이 B급 정도고 하이 엘프와 대족장이 A, S급이다.
최소 이 마을에 있어 나를 상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눈앞의 여성은 방심을 무기 삼아 공격할 줄 아는 자였다. 최소 C급. 높게 친다면 B급일 수도 있다.
'내가 싸우러 온 건 아니긴 하지만 보통이 아닌 자다. 잘못하다간 역으로 당할 수도 있겠어.'
어째서 이런 여자가 노예 감시관의 아내인지. 사연이 있나 궁금할 정도였지만 남의 개인사를 캐묻을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다.
곧 노예 감시관의 아내가 흥얼거리며 두 잔의 차를 내왔다. 찻잔 속에 녹색의 차가 모락모락 김이 나오고 있었다.
"그럼,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입고리는 웃고 있지만, 눈은 자신의 천적을 만난 뱀처럼 빈틈과 급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는 형식적인 질문만을 해왔다
.마을 내에 수상해 보이는 자는 없었는지, 아니면 치안 개선을 위한 대안이 있다면 들어줄 수 있다던지.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모두 생각해 왔던 것들이다.
우선 그녀와는 얼굴만 익히고 차츰차츰 진도를 나아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경계하는 자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간 토끼굴에 숨어버리던가 아니면 이빨을 들이밀고 공격하던가 둘 중 하나다.
"대안은.. 글쎄요.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잠시만, 저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나 질문해 봐도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혹시 이름이랑 어디 경비단인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푸란 나무 등대의 3사단, 가필 입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가명을 댔다. 내가 실리안이란 걸 알려도 괜찮았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가필, 가필..."
노예 감시관의 아내는 눈을 감고 내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팟, 하고 떠진 눈.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눈 뿐만이 아니다.
떠진 눈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손. 그 손에는 차를 타면서 가져온 식칼이 내 목을 향해 쇄도했다.그 시간은 겨우 눈을 깜빡이는 찰나였다.
"너는 누구지? 아니, 목적이 뭐지?"
미간을 좁히며 묻는 그녀. 새하얀 목엔 핏방울이 나오며 식칼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