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세계수의 고백
세계수, 앨리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상태였다.
'진소진 씨와 진소혜 씨에게 임신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저에게 임신을 해달라고 하다니··· 이건 분명 고백인게 분명합니다!'
앨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실리안이 자신의 몸을 깔고 뭉갠 채 사랑을 속삭이던 그때를 말이다.
처음 앨리는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했다.
실리안의 곁에는 실리안을 사랑하는 여자, 진소진과 진소혜가 꿋꿋하게 있는데 앨리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리는 딱 하나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섹스.
실리안과 같은 남성과 한 번 몸을 섞어 보고 싶어 봤다.
초월자가 될 때까지 아무런 남성과도 몸을 섞어본 적이 없는 앨리는 그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실리안과 몸을 섞는 여성들은 모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침을 흘리기 마련이었다.
거의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가 점점 붕 뜨는 걸 보면 저절로 앨리의 몸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서였다.
처음 실리안이 앨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마사지를 할 때.
앨리는 이미 눈치를 채고도 남았다.
실리안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앨리의 생각은 정확했다. 실리안은 앨리와도 같은 미녀를 놓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앨리는 여기서 고민했다. 과연 자신이 모른척하며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손을 쳐내며 날카롭게 거절을 해야 할지 말이다.
고민은 잠시였다.
'실리안 씨는 딱히 여성과 몸을 섞을 때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 몸을 섞는 거라면··· 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때는 어차피 진소진과 진소혜가 실리안이 자꾸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다는 걸 약간씩 알아차리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앨리 역시 조금은 섞어봐도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진소혜와 진소진에게 실리안을 만날 기회를 준 장본인이기도 하니까.
끝끝내 자기 합리화를 마친 앨리는 그만 실리안에게 몸을 맡겼다.
평소에 거추장스럽기만 한 가슴을 폭군처럼 어루만지고 아기새처럼 자신의 혀를 탐한다.
자신을 원한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 손길은 어떤 여성이라도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깔고 뭉갠 채 임신을 속삭이던 그때는.
'임신, 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도 해야 하니까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몸을 섞는 건 실리안이 쾌락을 주입하는 게 얼마나 큰 지 궁금해서 섞었더라면 임신은 절대 호기심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앨리는 거절했다.
끝까지 거절을
하려고 했었다.
자신의 자궁에 계속 퍼붓는 정액과 귀를 정성스럽게 핥아주던 실리안의 행동과 말뿐만이 아니었으면 말이다.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 마력을 두루는 것도 점차 허물어졌다.
정액 때문에 허물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가 점점 마력을 허물게 만든 것이다.
앨리는 거기서 진지하게 임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만약 실리안 씨가 제 몸만 노리고 몸을 섞은 거라면 임신해 달라는 말을 했을까요?'
진소진과 진소혜에게는 얼핏 듣기론 나중에 해 준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에게도 역시 꼭 피임을 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반대로 자신에게는 정반대였다.
끝까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보지를 망가트리도록 무자비하게 쑤셔대는 자지는 반드시 임신시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혹시 그건 앨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로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요. 분명 그럴 거예요.'
"임신, 할게요··· ♡"
앨리의 생각이 맞든 틀리든 그건 상관없다.
딱 한 가지.
실리안이 자신을 원하고 아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결혼을 하자는 것과 같은 이야기.
아기를 베고도 결혼을 안 한다는 건 앨리에게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그건 지구의 문화에서도 같은 이야기다.
앨리는 끝내 실리안의 임신, 즉 결혼을 하자는 속삭임을 받아들였다.
*
"서방님, 그래서 저희 결혼은··· 언제 하나요? 네?"
분명 내가 원하는 것까지 온 것은 확실했다.
세계수가 나를 원하고 엘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이끈 것은 세계수의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세계수님. 일단 조금 대화를···."
"아이 참. 서방님 저번처럼 '앨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말도 놓으시라니까요···."
앨리는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웃음 뒤에는 협박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그, 그래 앨리."
"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세요 서방님! 저희는 무려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요."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니.
설마 내가 저번에 임신해 달라고 말을 한 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인가?
'이거 만약 결혼을 거절한다면 쓰레기 같은 자식이 되는 거잖아?'
내가 세계수를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자신의 곁에는 소진과 소혜가 있으니까 함부로 생각할 만한 결정은 아니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인 엘프의 인식 개선에 대해 한 번 물어보도록 했다.
"앨리, 혹시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볼게."
"서방님이라면 뭐든지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앨리의 두 눈동자가 밝게 빛난다.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눈동자가 양심을 찔러댔다.
"지금 엘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진지하게 답해줘."
"지금의 엘프에 대해서··· 말인가요."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조금 대답을 피한 기분이 들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세계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걸 진지하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서방님··· 서방님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야 앨리.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나는 너의 편이니까."
내 손등 위에 올라가 있는 세계수의 손을 돌려서 깍지를 끼게 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본 세계수가 조금 당황하더니 곧 기쁨에 찬 얼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제 아이들은 너무나도 변했습니다. 과거에 저를 경외하던 대족장 엘프들은 저를 경배하기보다는 자신들을 경배하기를 원하죠. 물론 처음에 제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품었습니다."
대족장이 자신들을 경배하길 원한다고?
처음 깨달은 사실이다.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사실이다. 대족장이란 직업은 그 누구보다도 세계수를 경배해야 할 사람이니까.
"대족장 들은 곧 저에 대해 거짓된 소문들을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가호를 건네주는 것은 세계수가 아니라 대족장이라는 소문이나 세계수는 사실 무능한 존재라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 말입니다."
아랫입술을 물고 말하는 세계수는 말하기 고통스러워 보였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손을 꼭 잡고 말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동안 정말 고통스러웠겠네. 별 자식 같지도 않은 자식들에게 계속 가호를 나눠주고 있었으니 말이야."
"······서방님."
앨리가 무척 감동한 것처럼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끌고 갔다.
절대 야릇한 것이 아니었다.
앨리는 심장이 있는 곳으로 내 손을 가져가더니 홍조를 비췄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 방금 알았어요.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지금이라면 어떤 고난이든 역경이든 실리안 씨랑 함께 한다면 무섭지 않아요."
"그러면 지금까지 혼자 있었던 거야? 정말 아무랑도 대화하지 않고?"
"그전까지는 대족장이랑 대화를 나누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죠. 그들은 곧 대화를 끊고 거짓된 소문만을 부풀렸으니까요. 저는 제 아이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계속되는 거짓된 정보에 그만 현혹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처럼 아무런 경외심도 보이지 않는 거고?"
"···그렇습니다. 곧 저는 대족장의 말처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힘도, 가호도 못 내는 무능한 존재로 말이죠."
"······."
모든 원인은 대족장에게 있었다니.
그것도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엘프라면 경배를 해야 하는 존재인 세계수에 대해 의심하는 것도 이상했다.
즉 대족장도 그렇고 엘프들도 그렇고 전부 그놈이 그 놈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수의 심장이 점점 뛰고 있는 걸 손으로 느꼈다.
"지금의 엘프들은··· 더 이상 제 아이들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변했습니다. 이젠 '엘프'였던 존재들로 변했다고 말하는 게 옳겠죠."
세계수의 인식이 변했다.
그 누구보다도 엘프를 사랑하는 세계수, 엘프에게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내던 세계수는 돌아오지 않는 믿음
에 지쳐버렸다.
앨리는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엘프들을 믿고 보살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앨리. 혹시 대족장들을 치워버릴 생각은 없었어? 너에 대해 반역하는 존재들이잖아."
"···차마 제 손으로 그들을 죽이는 건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힘을 원한다고 해서 아이들을 죽이는 건 잘못된 길이니까요."
"아니지.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앨리."
"네? 그게 무슨···."
"이제는 너의 아이들이 아니잖아.'엘프'였던 무언가의 존재들이지."
내가 봐도 지금의 엘프는 잘못됐다. 마을을 잠깐 거닐기만 해도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세계수에 대해 짓씹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제국으로 따지자면 현 국왕을 모욕하는 말을 대놓고 해도 잡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들이 과연 너에게 필요 있을까?"
"···서방님. 그래도 저는 엘프들이 경외하는 세계수···."
"그니까 앨리."
"네? 앗···."
나는 앨리의 가슴속에 있던 손을 빼서 끌어안았다.
자연을 품은 듯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그 체온은 세계수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너도 어엿한 사람이야. 너는 지금 자신을 속박하고 있어.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엘프들의 우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관념에 갇혀 있다고."
"······."
"가끔은 힘든 선택이라도 해야만 하는 때가 있어. 나는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해."
"서방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만···."
"지금 대족장을 싹 다 바꾸고 엘프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그렇다면 너를 믿는 엘프들을 제외하고 다른 엘프들을 없애버리면 어떨까."
"네?! 서방님 아무래도 그건···."
내가 하는 말은 지극히 극단적이었다. 앨리를 믿는 엘프를 제외하면 소수의 인원들만 남을 테니까.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건 바라던 바다. 쓰레기를 쓰레기 통에 버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상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하는 말이 극단적인 건 알아. 하지만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 이게 결코 나쁜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지금 가장 빠르게 실천하고 있는 건 너잖아 앨리."
"무, 무슨 소리입니까 서방님!"
"마왕의 근거지에 엘프들을 보낸 것도 어느 정도 노리고 보낸 것 아냐?"
"········아닙니다."
앨리가 아니라고 말한 순간 그녀의 몸에서 흰색 연기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증거.
앨리는 자기의 몸에서 나오는 흰색 연기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 서방님! 저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내 앞에서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 앨리. 나는 누구보다도 너를 믿고 원하는 사람이니까."
"으윽, 서방님··· 서방님···."
앨리는 이미 변했다. 단지 그것을 아직 깨우치지 못한 것일 뿐이다.
나는 앨리에게 그걸 알려주고 있는 것뿐이고.
앨리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내 몸을 더욱 끌어안으며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들을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고해성사를 받아주는 사람처럼 묵묵히 앨리의 고백을 들어줬다.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나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눈물이 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세계수의 거처는 그녀의 마음에 대변하듯 점점 우중충하게 변했다.
곧 앨리의 눈물처럼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씩 툭툭 떨어지더니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흐으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군요. 같이 나아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군요··· 모든 걸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군요···."
녹색의 머리카락이 축 처지고 있었다.
앨리의 등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올라갔다 내려간다. 지금까지 애써 무시했던 감정들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앨리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괜찮다는 말만 반복해 줬다.
폭풍같이 쏟아지는 비가 슬픔을 자아내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보듬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을까.
흐느끼는 앨리의 숨이 점점 고르게 변하기 시작하면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구름들은 점점 물러나가며 더할 나위 없이 밝은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빛은 축복이라도 건네는 듯 무지개를 뿜어내며 호수 위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나는 여전히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앨리에게 물어봤다.
"괜찮아졌어?"
"···."
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어깨에 대고 조용히 끄덕일 뿐이다.
나는 앨리의 등을 토닥이면서 진정되길 기다렸다.
'세계수의 거처는 앨리의 마음에 대변하는구나. 지금까지 화창하기만 해서 잘 몰랐어.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잘 모른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자기의 마음마저 숨길 정도라는 거니까. 그동안 앨리가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꽁꽁 감싸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방님··· 안아주세요."
"응? 이미 안아주고 있는데··· 더 꼭 끌어안아줄까?"
"아니요··· 저를 안아주세요··· 저를 서방님의 색으로 채워주세요···."
앨리가 어깨에 고개를 때고 내게 시선을 맞췄다.
퉁퉁 부운 눈이었지만 그것이 결코 못생겼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결의에 찬 눈동자가 오히려 빛을 자아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앨리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눕히고 조용히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앨리는 그저 내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조용히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쾌감을 위해서 몸을 섞는 게 아니라 그저 그녀를 위해서 몸을 섞는다.
나는 이것이 그 어떤 여자랑 몸을 섞었던 것보다 훨씬 기분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