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대화.
소혜의 몸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걸 보고 깨우쳤다.
'이건 성녀의 씨앗이 개화된 거구나!'
분명했다. 주변에 가까이만 있어도 고통이 경감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통을 참고 입을 열었다.
"소혜야, 침착하게·· 나를 치유한다고, 생각해봐."
"네, 해볼게요 오빠 그러니까 죽지 마세요··"
소혜가 울먹이면서 내 가슴 위에 성녀의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기에 아찔한 정신 속에서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흐윽·· 오빠, 괜찮은 거 맞죠? 나아지고 있는 거 맞죠?"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면서 내게 괜찮은지 확인한다.
'상처가 너무 깊다. 하지만 이 정도면 분명 치유할 수 있을 정도다.'
성녀의 힘을 각성하고 나서 빠른 속도로 숙련도를 올리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소혜,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어."
"네, 흐극, 흐으으윽··"
소진은 소혜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상처에 얼음을 뒤덮는 건 치유에 방해만 된다.
레이븐은 멘탈이 갈렸는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소진과 소혜한테서 도망가고 싶지만 내 상태가 걱정되어 도망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레이븐이 그녀들과 잘 화해해 주길 바란다.
소혜의 손길은 아늑했다.
성녀의 힘은 신체의 자연 치유를 극도로 이끌어서 빠른 속도로 회복하는 것 같았다.
새 살이 돋아나면서 간지러웠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 정신에 그녀들에게 내 몸을 맡기고
기절했다.
*
"흐윽, 오빠·· 괜찮으신 거죠? 제가, 어떻게든·· 어떻게든··"
소혜는 팔을 하도 오래 들어서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치유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소진은 소혜가 어떻게 치유의 힘을 각성했는지 잘 몰라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소혜가 없었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치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살이 돋아나는 게 보일 정도의 힘이라니. 이 정도 치유 능력이라면 아마 S급 각성자인가··'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S급 치유 각성자도 이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소진은 옆에 덜덜 떨고 있는 레이븐한테 말했다.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왜 네가 여기에 있는지 대답해 줘야겠어."
"··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모두 대답할게."
시안이 이렇게 된 거에는 모두 내 책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베어버리는 그 감각은 지금도 소진을 미치게 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한 명.
'저 년만 아니었으면 시안은 괜찮았을 텐데··!'
분명 검은 레이븐한테 갔다. 발의 각도. 팔꿈치의 회전. 마지막으로 손목의 스냅까지.
결코 실수는 없었다.
시안이 저 년을 몸으로 막아준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일단 너. 시안과 무슨 관계야. 그것부터 말해줘야겠어."
"나는·· 그러게. 무슨 관계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관계도 아니네."
레이븐이 약간 쓸쓸하게 말했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지금 장난해? 네가 시안의 방에 몰래 침입하는 것까지 모두 봤는데 정말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분노가 주체되지 않았다.
화가 나면 툭 하고 나오는 냉기가 모두 레이븐을 향해 쏟아졌다.
"하하·· 굳이 말하면 서로 몸을 섞는 관계 아닐까."
레이븐은 모든 걸 포기한 듯이 말했다.
"미안해 내 예전 친구야. 용서해 달라고 말하진 않을게. 시안이 이렇게 된 거에는 내 탓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소진의 앞으로 가서 무릎 꿇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너의 화가 풀린다면·· 부탁할게. 나는 살 자격이··"
짝!
레이븐의 고개가 팍 돌아가면서 쓰러졌다.
"이 썩어 빠진 년아·· 시안이 널 위해서 몸을 던졌는데 참회할 생각도 안 하고 죽을 생각을 해? 넌 죽어도 절대 용서받지 못해."
"·· 미안해."
레이븐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소진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재회였지만 서로 상처밖에 남지 않았다.
"너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어. 왜 내 물건을 훔치고 도망간 거야?"
"그때, 너의 부모님이 이사 간다는 걸 들어버렸거든·· 이제 너네가 없으면 우린 다시 옛날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하니까··"
"허, 넌 진짜 이기적인 년이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물건을 가지고 도망갔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긴 해?"
"····"
소진은 레이븐한테 다가가서 특유의 빨간 머리카락을 집어 올렸다.
레이븐이 고통에 이마를 찌푸렸지만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널 죽이고 싶지만, 그건 시안을 봐서라도 참겠어. 하지만."
쩌저저저적ㅡ
레이븐의 팔과 다리를 벽에 붙이고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레이븐의 몸을 얼리면서 고통을 줬다.
"적어도 이건 괜찮겠지. 너는 오늘 시안이 일어날 때까지 그러고 있어."
"아, 아라써··"
벌써 추운 지 이를 딱딱 거리면서 대답했다.
소진은 곧 다시 시안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소혜는 하도 울어서 퉁퉁 부어버린 눈과 그 아래로 눈물이 만든 웅덩이가 있었다.
그래도 그만큼 시안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고 있었다.
이제는 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다투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왜 시안은 대체 레이븐 같은 년을 구해준 거야··'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고통에 찬 표정으로 누워있는 것이나.
그 사람을 내가 검으로 벤 것이나.
아직도 소진의 손은 역겨운 감각이 남아있었다.
'우욱, 으·· 시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지켜주기로 맹세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지만 소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주저앉아서 빨리 낫는 걸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문득 소진은 레이븐이 카메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냈다.
이것 때문에 감정을 더 주체할 수 없었다.
"레이븐. 너 시안의 방에 들어올 때 무슨 아티팩트를 썼길래 몸이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 그건 내 옷이·· 인기척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 거야."
"옷?"
"내, 내게 협력자가·· 만들어 준 거야··"
이를 딱딱 거리면서 말할 것은 확실히 말했다.
'협력자라. 하긴 애 스스로 이런 옷을 만들 리가 없지.'
분명 최고위급 협력자 일 터.
"나중에 협력자에 대해 알려줘. 분명 시안에게 도움이 되겠지. 상관없지?"
"으, 응··"
점점 피부가 파래지고 있었지만 소진은 그걸 봐도 동정심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저래도 싼 년이다.
"하아. 자세한 건 또 내일 시안이 일어나면 대화하자."
머리가 아프다.
오늘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 같다.
울고 있는 소혜의 모습이나.
누워있는 시안의 모습이나.
*
[··리안, 실리안! 괜찮으신가요? 실리안!]
머릿속에서 들리는 세계수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도 멍한 정신 상태였다.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분명 난, 어제·· 아. 레이븐 대신 소진의 검에 맞았구나.'
다행히 소혜의 덕분에 살 수 있었던 모양이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없다.
몸을 움직여 봐도 후유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원이 다른 치유 능력.
역시 성녀였다.
게다가 소혜는 대기만성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앞으로 신성력이든 신체 능력이든 지금부터 폭풍과 같이 성장할 것이다.
[괜찮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실리안. 어제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시나요?]
'아, 세계수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정신이 몽롱한 것을 제외하면 괜찮습니다.'
[어제 진소혜 씨가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실리안 씨는 조금 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세계수는 내가 없으면 곧 엘라시움의 멸망이라는 것과 같다.
경외심을 모아줄 사람이 없다는 거니까 말이다.
나는 세계수한테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말했다.
'세계수님 이번에 소혜가 성녀로 각성했죠. 지금이라면 분명 엘라시움에서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성녀의 힘은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특별한 힘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소혜와 소진을 데리고 엘라시움에 갈 수 있습니까?]
혹시 경외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가능합니다. 사실 갈 수 있는 힘은 진작에 모았습니다. 진소혜 씨의 각성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불안한 것을 하나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아카데미의 교장, 지안 누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엘프의 힘으로 충당하면 된다.
'그러면 나중에 제가··'
"아, 시안. 일어났구나··"
옆에서 초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목소리가 익숙했다.
"레, 레이븐 누나?!"
"하하,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레이븐 누나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은 불어 터져 있었고 검은색 라텍스 옷 또한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게다가 소진의 트레이드 마크인 냉기가 그녀의 사지를 결박하고 있었다.
"누, 누나 괜찮은 거예요?"
"어·· 모르겠네. 솔직히 이젠 몸에 감각이 없어."
"제가 소진이한테 풀어달라고 부탁할게요. 그러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으응·· 아냐. 나는 이래도 싸. 내가 저지른 거에 비하면 오히려 약과야. 네가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미안해. 다 내 탓이야."
레이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젠가 들킨다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들키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 탓도 있을 텐데. 하아·· 미안하네.'
벌컥.
우리가 대화하고 있을 때 소진과 소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괜찮으세요? 저 알아보시죠? 가슴에 통증은 없으세요?"
그새 성녀의 힘에 익숙해졌는지 이젠 치유 능력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난 괜찮아. 나보다는·· 레이븐을 치료해줘."
"··시안."
소진은 내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레이븐을 치료해 주라는 말에 조그맣게 나를 불렀다.
"미안해 소진아.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솔직히, 화가 나. 너는 분명 내 건데. 이런 사람 저런 사람에게 몸을 대주는 건 분명 화가 나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잖아. 너는 경외심을 모아야 한다고 들었으니까. 게다가 나도 잘못한 점이 있고··."
"·· 이해해 줘서 고마워."
다행히 소진은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소혜는 내 말을 듣고 레이븐을 치료하고 있었다.
자기 언니는 질투가 막심한데 이해한다고 하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소혜한테도 알려줘야 한다.
나는 이제 소혜와 레이븐한테 알려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