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소진의 다짐.
우웅 -
"후아.. 좋았다 좋았어. 이 정도로 만족할 만한 경험은 다신 없을 거야."
"····"
엘라시움에서 다시 지구로 복귀한 시안과 소진 일행.
한 여자는 무척 기분이 좋다는 듯 기지개를 쭉 켜며 웃고 있었다.
반대로 한 남자는 초췌한 얼굴로 곧 죽어가는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온종일 몸을 섞었다. 밖을 보면 이미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있었다.
죽기 직전에 절정을 느끼면 그 쾌락이 배가 된다고 했다.
그 쾌감을 깨우친 소진은 내게 목을 잡아달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사랑하는 연인에게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가 괴롭더라도 입으로 막았다.
우리 둘은 고작 나무 아래에서만 몸을 섞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내 몸을 이끌어서 세계수의 거처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떨 때는 주변이 뻥 뚫려 있는 평원에서.
어떨 때는 풀숲이 잔뜩 깔린 곳을 침대처럼 이용해서.
어떨 때는 커다란 호수에 들어가서 몸을 섞었다.
마치 누군가가 봐달라는 듯이, 그 누군가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이 내 몸을 격하게 탐했다.
나는 내 몸을 어루만지는 소진의 손길 속에서도 불안함을 느꼈기에 그저 가만히 따라줬다.
다행히 세계수는 나타나지 않아서 분위기가 깨지는 일은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몸을 섞을 수 있는지 보여준 소진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
"시안! 나는 이제 가볼게. 엘라시움이라·· 좋네! 처음에는 낯선 곳에 간다는 거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이런 식이라면 언제든지 같이 가도 좋아. 나중에 또 둘이서 갈 거지?"
"응·· 물, 물론이지!"
"후후··. 그때를 기대하고 있을게! 그럼 푹 쉬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밝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그만 거짓말을 했다. 엘라시움으로 갈 수 있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나중에는 둘이 아니라 어쩌면 셋이서 갈 수 있겠는데··.'
나는 밀려있는 시스템 창을 켰다.
그러자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상대방으로부터 더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경외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보상으로 저주의 힘이 매우 떨어집니다.]
죽을 정도로 커다란 쾌락.
죽어간다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부터 얻는 쾌락은 경외심을 주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대량의 경외심이 아닌 거대한 경외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근데 그것을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여러 번 몸을 섞으면서 얻었다.
이번에 올라가 있을 마력이 기대됐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실리안
나이: 23세
성별: 남
종족: 하프 엘프
근력: 57
체력: 71 ( 5↑)
민첩: 67
마력: 81 ( 15↑)
정력: 99
스킬: 세계수의 가호, 통역, 페로몬, 절륜, 뛰어난 육체, 외모, 성욕 탐지, 하프 엘프의 저주, 집착 감지 (NEW!)
'15의 마나··!'
무려 15의 마나를 획득했다. 총 81의 마나가 되었으며 마나 만큼은 A급 경지에 이르렀다.
'이걸로 신체 강화를 한다면··.'
강함의 척도가 궁금했다. 나는 전투 스킬이 없는 자로서 모든 마나를 신체 강화에 때려 박아야 한다.
만약 A급 마나를 모두 신체 강화에 박는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소진의 방으로 달려가 실험해 보고 싶었지만··
풀썩
"어우 힘들어, 온몸이 뻐근하네. 특히 허리가··."
우두둑
허리를 돌릴 때마다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시원함을 줬다.
정말 더럽게 피곤했다.
경외심을 많이 준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방법이지만 이건 정신을 대가로 한 교환이다.
정신력이 부족하다.
몇 번이나 죽을 것 같은 사선을 넘기며 마나를 얻은 거나 다름없다.
몸은 어차피 호수에서 씻고 와서 깨끗했다.
신체 강화 테스트는 내일의 나에게 부탁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잠에 빠졌다.
*
"으으읏, 아·· 기분 좋았다."
방으로 돌아온 소진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쾌감에 그만 정신을 놓았다.
평소에도 시안과 몸을 섞을 때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다.
'그, 자지에 신체 강화를 두르고 박아줬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왠지 몰라도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아마 내게 제대로 된 주도권을 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약간 다행이다.
이번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기에.
세계수의 모습을 잊고 싶었다.
시안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안다. 그가 나한테 보여주는 태도는 언제나 일관성 있었고 늘 나를 위해서 배려해 줬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숨이 막혀오면서 죽을 뻔해도 절대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몸을 맡기면서 마음대로 해주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불안했다. 세계수의 그 모습에 말이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게다가 가지고 있는 힘까지 모두 나보다 위잖아··.'
나도 가슴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그 쓸데없이 크기만 큰 지방 덩어리는 나보다 컸다.
시안이 세계수의 모습을 봐도 아무 생각이 없었으면 다행이지만··
시안의 눈빛은 절대 무관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눈빛이다.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정말,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나는 날이 온다면.
"으으으으! 그럴 리가 없어. 시안은 오직 내꺼야! 내꺼라고!"
쾅쾅!
바닥을 발로 내리치며 화를 푼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제길, 시안만 관심 있다면 모를까 그 세계수라는 년은··!"
오늘 시꺼먼한 덩어리, 정찰견이라는 몬스터를 잡고 돌아갈 때 알 수 있었다.
세계수의 눈빛 역시 시안과 다를 바 없었다고.
"아니 신이라는 작자가 왜 내 시안에게 관심을 가져! 관심을!!!"
쾅쾅쾅쾅!!
내 마음속에 있는 감이 경고한다. 그 여자는 분명 시안을 노리고 있다고. 지금은 괜찮지만 언젠가 분명 시안을 노릴 것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보여줬다.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다.
'분명, 이 정도로 보여줬으면 알아먹었겠지·· 보지에 거미줄이 수백 개로 엮어있을 년이 누구의 것을 탐내는 거야.'
온종일 몸을 섞었으니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알아먹었을 것이다.
"아으, 이렇게 화가 날 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그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 발을 옮겼다.
커다란 시안의 사진이 붙어 있는 벽을 지나서.
시안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진열대를 지나서.
책상 앞에 놓여있는 노트와 그 위에 있는 모니터 앞에 섰다.
모니터에는 초고화질로 시안의 방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볼 수 있겠끔 말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니 옆으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천사같으면서도 황태자 같으면서도 또 마지막으론 엘프 그 자체라는 게 느껴지는 시안.
그 얼굴을 보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남자가 내꺼라니.
"하아·· 역시 화 가날 때면 시안이라니까. 인간 진정제잖아."
그녀는 의자에 앉아 노트를 폈다.
나만의 사랑 시안.
처음에는 정말 일기로만 작성할 생각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애정이 담긴,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노트가 됐다.
'이제 슬슬 아티팩트라도 주문해서 잠금장치를 걸어야겠어.'
이게 만약 세간에 퍼진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작살 날 것이다.
펄럭.. 펄럭..
노트를 조심스럽게 넘기면서 다시 과거부터 천천히 회독하고 있었다.
"으음··? 이거 왜 조금 구겨진 것 같지··."
일부러 세심하게 관리한 노트다. 새하얀 도화지에 먹물 하나 안 묻히려고 했다.
무언가 조금 구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뭐, 내가 조금 세게 넘겼나 보네··."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히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이런 걸로 구겨지다니. 가끔은 A급 헌터의 힘이 조절이 잘 안 된다.
[7일 차]
- 오늘은 시안과 함께 엘라시움으로 간 날이다 ··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적어두고 다시 노트를 덮었다.
이 노트는 나중에 보고 또 보고 계속 볼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어쩌면 나와 시안 사이이 태어난 아기한테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만약 태어날 아기한테는 꼭 시안과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해야겠다. 이 사랑을 알려주고 싶어.'
아직 있지도 않은 애를 생각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망상을 한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신혼여행까지 다녀오고 있었다.
드륵
잠깐 행복한 상상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 온종일 몸을 섞느라 몸이 녹초다. 아무리 이런 나라도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응?"
축축
발에서 느껴지는 감촉. 무언가 축축하다. 마치 물이라도 쏟아진 것처럼 말이다.
'물··?'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내 방에 들어온 액체라곤 시안의 정액밖에 없다. 지금 그 정액도 내 자궁에 머물러있다.
"조금 찐득한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더 축축한 지역을 밟아봤다.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길처럼 말이다.
그 길을 따라 쭉 이동해봤다.
'액자··?'
가족사진이다. 옛날의 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이 같이 찍혀있는 사진.
지금에 비해선 꽤 화목한 가정이다. 어째 지금은 길드에만 집중하시느라 우리들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요즘은 던전에 다니면서 부모님의 정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물이 여기가 제일 많이 묻어 있는 걸까.'
가장 축축한 지역을 뽑자면 여기였다.
'시안과 나는 일단 아냐. 그렇다고 해서 소혜가 내 방에 들어올 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내 방은 잠겨 있다. 겨우 문고리를 잠가둔 거긴 하지만 적어도 각자의 선을 지키며 살아오는 가족이기에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없다.
'청소를 하는 사용인분들한테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의문은 꼬리를 물면서 길어졌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외부인.
누군가가 이 집에 몰래 들어왔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어떤 머저리가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들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참 멍청한 년이군.'
되도록이면 추적대를 불러서 집에 들어온 자를 특정하고 싶지만··
'그렇다면 내 방의 환경을 다 보여줘야 하는데.'
그건 싫다.
내가 일주일 동안 모아놓은 시안의 사진. 이건 돈 주고도 못 살 귀중한 거다.
진열대 역시 마찬가지다. 저걸 또 모으라고 하면 모을 수는 있지만 버리기가 싫었다.
그리고 시안의 방에 있는 카메라 ··
'응? 생각해보니 이걸 잠깐 돌려볼까.'
내가 생각해도 올바른 방법이었다. 분명 이 잠겨져 있는 방까지 온 도둑이라면 시안의 방도 들렀을 것이다.
소진은 잠시 컴퓨터를 조작해서 카메라를 돌이켰다.
어둡고 텅텅 비어있는 방.
그것을 계속 둘러봤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해도 무언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뭐지? 이 방에는 안 들어왔나?'
계속 지켜보는 와중이었다.
드르륵
갑자기 시안의 방에 있는 창문이 열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저절로 눈이 커졌다.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열리는 창문이라니. 귀신이라도 들린 것일까?
"아니, 잠깐. 무언가가·· 아주 흐릿한 검은색이 지나가는데··."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 흐릿한 검은색을 따라 시야를 옮기는데··
갑자기 소진의 브래지어가 위로 올라갔다.
"허, 확실하네. 이건 아티팩트잖아?"
아티팩트.
특수한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장비를 만들면 그것이 아티팩트다.
누구는 무기를 만들고 누구는 보호 장비를 만든다.
어떤 사람은 표션 같은 것을 만들어서 힐링이나 도핑을 할 수 있는 걸 만든다.
그리고 저렇게 몸이 안 보이게끔 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분명 초 고위급 스킬을 가진 인물일 터.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가는 인영을 가만히 봤다. 무엇하나 훔치지 않은 도둑.
어떤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단 확실한 것은··
"왜 여기로 들어온 거고, 왜 여기서 물을 흘린 걸까··."
찐득하고 축축한 것을 말이다.
딱히 훔쳐간 것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지만··
"어? 아니 잠깐만."
하나가 없다.
내가 침대 옆에서, 가족사진 옆에서 놓아둔 사진이 없다.
"분명 여기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최애 사진이··."
시안이 정신을 잃고 방에서 푹 자고 있을 때 몰래 찍어둔 사진이었는데.
눈을 꼭 감고 아기처럼 자는 모습을 보고 무심코 찍어둔 사진.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진이었는데.
없어졌다.
사라졌다.
으드드득!
"이, 이, 시발년이··!"
사진을 가져간 새끼는 하나밖에 없다.
소진은 그날 도둑년을 반으로 죽여서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