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외곽.
"자, 갈까!"
아침부터 잔뜩 주입받은 소진이 기운차게 말했다. 소진과 나는 몸을 단단히 입고 외곽을 돌 준비를 했다.
엘프의 마을 외곽 지역은 상당히 위험한 지역 중 하나다.
바깥 경계선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며 가장 관리가 안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엘프의 장점인 눈도 통하지 않는 지역이다. 무성하게 자란 풀은 엘프의 눈도 방해됐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된 지역은 몬스터한테 습격당하기 매우 쉽다. 덕분에 외곽은 항상 엘프 경비병들이 주시하고 있는 곳이다.
나는 소진의 손을 잡고 외곽 지역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나무가 햇빛을 가려 깜깜한 어둠을 자아냈다. 게다가 무성하게 자란 풀숲이 시야를 가린다.
습격하기에 굉장히 좋은 곳이다.
내가 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탈출하려고 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긴 했다.
'그만큼 굉장히 절박하기도 했지만..'
엘프의 마을은 상당히 넓기에 외곽을 돌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우리는 그때 동안 주변을 철저히 파악하며 몬스터가 없나 확인했다.
"소진아 뭐 느껴지는 거라도 있어?"
나보다는 그녀가 훨씬 강하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이 없어서 물어봤다.
"·· 쉿. 잠깐 뭔가가··."
소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팍!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 화살이 꽂혔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나무에 화살이 꽂힌 것을 보고 누가 쏜 것인지 확인했다.
위에서부터 아래, 대각선으로 꽂힌 화살. 나무 위에서 쐈다는 것이다.
"어이! 조심하라고! 몬스터인 줄 알았잖아! 큭큭"
엘프 경비병이다. 우리를 몬스터인 줄 알고 쐈다는 머저리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놈이··."
그 모습을 본 내가 이를 갈았다. 이 마을은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모욕적이고 역겨운 놈들이다.
"이··!"
"잠깐 시안. 좋은 생각이 있어."
위에 있는 경비병에게 뭐라고 하려던 나를 소진이 말렸다. 그렇게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에 있어. 몬스터가"
"뭐?"
어두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은 공간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무언가를 직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낀 것은 화살이 날아오는 게 아니라, 몬스터의 기척을 느꼈어. 확실해. 몬스터는 지금 경비병을 보고 있어. 시안, 저 몬스터를 이용하자."
"저 몬스터를 이용하자고?"
나는 그녀의 말을 멍하니 듣다가 몬스터를 이용하자는 말에 정신을 깨웠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몬스터 먹이로 저 경비병을 던져버리자는 것 같다.
즉 살인을 저지르자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지금까지 엘프에 대한 살인을 미뤄왔는지 깨우칠 수 있었다.
고작 첫 살인에 대한 무서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이런 것들은 엘프 같지도 않아서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주변의 시선도 분명 포함되지만··.'
내 무의식 속에 남은 세계수. 그녀는 내가 지구에 있을 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항상 지켜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보고 있다는 점이 걸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살인을 한다면 그녀가 위에서 지켜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각났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미뤘다. 살인을 말이다. 만약에라도 내가 살인을 하는 장면을 그녀가 보면 안 되니깐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단 말이지··. 이런 상황 하나하나 다 보실 수 있는 전지전능함이라면 정찰 따위 필요하시지도 않으실 텐데 말이야.'
우리에게 바깥을 정찰시켰다. 그리고 통신을 위한 세계수의 나뭇가지까지. 이건 세계수가 우리의 환경을 직접 못 본다는 뜻이다.
내 무의식에 박혀있던 생각이 사라지자, 나는 피어오르는 살의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소진아. 어둠 속에 몬스터가 있다고 했지?"
"응. 아직 우리를 모르고 있어."
"그러면··. 저 위에 있는 엘프를 못 움직이게 얼려버릴 수 있어?"
"뭐? 너 그건 왜·· 아니, 설마?"
소진이 내 생각을 어림짐작하며 경악했다. 혹시나 이런 나에게 실망이라도 하는 것일까?
"소진아 네가 싫다고 해도 나는··."
"큭큭큭·· 무슨 소리야.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고. 어쩜 나랑 이리 생각이 똑같을 수 있어?"
허어. 그녀는 이미 나보다 더 빨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오히려 네가 이런 나에게 실망할까 봐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역시 우리는 운명 같은 사이인가 봐."
쪽 -
소진이 내 볼에 짧게 키스하고 거리를 뒀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냉기가 점차 피어오르더니, 사방을 얼리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순식간에 얼어붙는 대지와 풀을 보자 위에 있던 엘프가 실실 쪼개는 것도 멈추고 당황한다.
"잠, 잠깐 너네들! 뭐하는 짓이야! 다 죽고 싶은 거냐?!"
그 모습에 급하게 화살을 당겨서 조준한다.
타탁!
순간 소진의 몸이 사라졌다. 엘프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팍 팍!
"뭐야 시발! 진짜로 죽,"
소진의 잔상에다 화살을 쏘며 기겁하는 표정을 짓는 엘프 경비병. 그가 시위를 당기는 것을 갑자기 멈췄다.
"뭐, 뭐야 너··."
"죽고 싶었던 거 아냐? 여기 남자들은 꽤 대담하네."
손에다 날카로운 얼음을 만들어서 뾰족하게 만든 것을 목에다 겨눈다. 이미 그의 목에는 작게나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죽이고 싶지만·· 그건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쩌저저저저적
"너, 너 무슨?! 으으윽! 차갑잖아 시발!"
그의 목, 손, 다리, 척추가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한다. 피부 위로 천천히 서리가 얹는다.
"너,너 무,슨 지스을··!"
남자가 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벅차게 말한다.
"됐다 시안! 일로와! 흐흣··."
마치 속 시원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소진.
그녀가 엘프 경비병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런 남자를 묶어두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 남자는 매우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람에게 사용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어떻게든 잘 됐네. 내 냉기를 살 안쪽으로 주입했어. 뼈가 얼어붙도록 말이야."
"뼈가·· 얼어붙도록?"
나는 고작해서 살을 얼어붙게 해서 동상에 걸리도록 할 줄 알았는데··. 더 잔인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아·· 혹시 시안, 네가 보기엔 조금 잔인했나?"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걱정했다.
"크흐흣, 아니 그냥 당황했을 뿐이야. 오히려·· 이 모습을 보니 더 마음에 드는걸?"
우리를 노려볼 생각도 못 하고 덜덜 떨리는 몸을 붙잡는다. 이는 매초마다 딱딱 거리며 차가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 으아··."
겨우 입을 벌리며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든다. 우리를 향해 손을 펼치는 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무엇을 당할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 새끼가! 좆같은 짓을 하지 않았으면 됐을 것을!"
퍽 퍽!
이런 모습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대가리를 발로 찼다.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는지 때릴 때마다 얼굴에서 딱딱한 느낌이 난다.
"아, 으아아··"
"어, 어··. 그렇지! 시안 너무 좋아 그 모습! 하핫!"
그녀는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속 시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러면서 남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냉기를 더욱 주입했다. 아직 빨갛게 변하지 않은 곳마저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의 온몸에 동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후 우리 둘은 한참 동안 경비병을 팼다. 가리지 않은 곳은 없었다.
소진은 급소만 노리며 때리며 웃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나도 식겁하게 만들었다.
"···"
이제는 혀까지 얼어붙었는지 말도 내뱉지 못한다.
"후··. 일단 여기까지만 할까?"
"그러네··. 더 패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아."
팰 때로 실컷 팬 남자는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생각없이 패는 나와 달리 소진은 이런 경험이 좀 있어서 인지 상대가 기절하지 않게 잘 조절하면서 때렸다.
아직 경비병이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짝짝
"자자, 아직 정신 잃지 말고. 몬스터는 몬스터에게 맡겨야지."
경비병을 몬스터라고 한 소진은 남자의 뺨을 몇 번 때리고 몸을 들었다.
"으, 으아아! 아으아아··!"
자기가 무슨 일에 처할지 눈치챈 엘프 경비병이 덜덜 떨리는 입을 열어 억지로 소리친다.
잘생긴 얼굴이 꾸겨지면서 순식간에 추악한 얼굴로 변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소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몸을 휙 하고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내가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콰드드드득!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서 검붉은 피가 치솟더니 주변의 풀을 뒤덮었다.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안쪽에서 울려 퍼진다.
"시안, 좀 잔인할 수도 있으니·· 안쪽은 너무 자세히 바라보지 말아줘. 헌터인 나한테는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지만··."
콰드득.. 콰득
침묵 속에서 몇 번 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렇게 되면 시체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우리가 했다는 증거도 사라지지.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사람이야 엄청나게 많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어."
그런 말을 하며 어둠 속으로 소진이 발을 옮겼다.
"이제 슬슬 다 먹은 것 같으니 처리하고 올게."
분명 나도 몬스터에게 죽이자는 것에 찬성하고 의견도 냈지만, 눈앞에서 피가 튀기고 뼈가 씹히는 소리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써 정신을 붙잡으며 어지러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시한다.
'내가 여기서 무릎 꿇을 수 없지··. 앞으로 이것보다 더 잔인한 일도 있을 수 있는데 복수를 멈출 수는 없어.'
겨우 엘프 경비병 하나 가지고 잔인하다고 찡찡거릴 수 없다.
고작 이런 것이다.
고작 엘프 경비병 하나가 몬스터에게 죽은 것이다.
서걱 -
"크에에에엑ㅡ!"
안쪽에서 몇 번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맞춰 몬스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내 목표는 겨우 경비병 하나가 아냐.'
몰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