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하프엘프-44화 (45/77)

44화 - 과거의 사진.

온통 시안의 사진으로 도배된 곳이다.

집 안에서 평범하게 입고 돌아다니는 시안, 방금 샤워하고 나온 듯 모락모락한 김을 뿜으면서 나오는 시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안 등등··.

수많은 사진들이 있었지만 가장 압권인 것은 서로 몸을 섞고 있는 사진이었다.

방 안에서 촬영 한 듯 시안의 방에서 서로 몸을 격하게 탐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로 남자가 여자 위로 올라가 있는 모습 위주로 찍혀있는 사진들.

시안은 자기가 찍히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단 한 번도 카메라를 향해 시야를 준 적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화보를 내는 시안의 얼굴이 벽, 천장에 도배되어 있었다.

거기서 레이븐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잠겨져 있는 방. 열면 안 되는 방이라는 것이 꼭 돈을 숨겨둔 방이라는 법은 없다.

"확실히·· 이런 방이라면 남에게 보이기 싫겠지. 특히 사진의 장본인에게 보이는 거라면 더욱··."

레이븐은 더 들어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내 발은 방 안으로 들어가있었다.

자신의 남자가 이렇게 도촬 당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으음··."

사진으로 도배된 곳을 제외하고 평범하게 배치되어 있는 물건들. 그 와중에서 진열대가 특히 눈에 띄었다.

레이븐은 진열대 앞에서 무심코 침음을 흘렸다.

어떤 사람의 흔적을 가득 모아놓은 진열대다.

옷, 바지, 백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흰색깔이 약간 변질된 것들이 가득 찬 유리병까지.

유리병의 뚜껑을 따서 안을 확인해 보니, 코가 마비될 만큼의 달콤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자신한테는 아주 익숙한 냄새다.

"윽, 이건 시안의 정액이잖아··?"

조금 시간이 지나서 더 숙성된 것 같은 냄새가 났다. 황급히 그것을 다시 닫아서 진열대에 놓았다.

앞으로 더 추가될 것이라는 듯, 진열대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딱 봐도 진열대에 놓여있는 이것들은 시안의 것이겠지.'

사진들이나 진열대에 놓여있는 것들이나 모두 한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다.

마치 자신의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듯 방 안 곳곳에 시안의 것으로 모두 채워 넣었다.

레이븐은 잠시 그 진열대를 보다가 조금 더 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무언가 가득 놓여있는 책상 위를 봤다.

책상 위는 가지런히 정리된 노트와 노트 앞에는 누군가의 방을 CCTV처럼 여러 각도로 촬영하고 있는 두 개의 텔레비전이 보였다.

CCTV는 방 안. 즉, 시안의 방을 촬영하고 있었다. 분활된 화면으로 여러 각도에서 정밀하게 촬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고화질이라는 점이 카메라가 정말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데··?'

분명 같이 사는 거로 안다. 그런데 이렇게 방을 온통 시안의 흔적으로 가득 채우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레이븐은 노트에 적혀 있는 제목을 봤다.

'오직 나만의 사랑 시안..?"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노트 제목이다. 레이븐은 천천히 그 노트를 펼쳐봤다.

[내 사랑과 만난 지 1일 차.]

원래는 쓸 생각이 없었던 일기였는데·· 어차피 남들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는 일기니까 괜찮겠지.

나와 그가 만났던 그때를 추억해야만 하니까. 이제는 거의 운명이라고 생각되는 남자니까 말이야.

아직도 처음 그 남자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나. 던전 속에서 피투성이로 되어있는 몸과 거렁뱅이 같이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있던 그 남자가.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시체인 줄 알았는데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이건·· 처음 시안을 만났을 때를 적어 놓은 노트인가?"

··· 그런 그를 데리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때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어. 만약 내가 그를 거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었을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그가 일어나고 우리에게 하는 말은 모두 이상했어. 엘프가 어쩌고 엘라시움이 저쩌고··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나중에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무려 던전 안에 있는 세계.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거 아냐? 정말 믿기 힘들었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와 전혀 다른 남자의 체구에 겨우 납득할 수 있었어. 모든 것이 딱딱하게 채워져 있는 근육이 ··

"잠깐··. 무슨 이상한 문장이 있는데. 던전 안에 있는 세계에서 왔다고··?"

레이븐은 그 문장을 보고 어지러웠다. 그러면 시안이 몬스터라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시안은 제대로 된 인간 남성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지구의 사람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거에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약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생기네.'

비현실적인 외모. 지구의 남자와는 다른 종족인 것 같았던 체구와 근육.

'거기에 성욕까지 그 어떤 남자보다 많으니까.. 내가 알던 남자하고는 너무 다른 점이 많았어.'

레이븐은 어쩌면 정말로 시안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는 일기다. 그런 일기에 거짓말을 적어뒀을 리가 없다.

펄럭펄럭

그 뒤로 나머지 2일 차, 3일 차, 4일 차 쭉쭉 넘겨봤다.

가면 갈수록 점점 집착이 심해지는 것이 보인다. 특히 알게 모르게 시안에게 접근하는 것 같은 여자를 몰래 협박했다던가. 아니면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적혀있는 부분이라던가.

더 심각한 문장은 자꾸 다른 여자에게 몸을 대주는 시안의 모습에 감금할 생각이나 고문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흔적이 엿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하면 자신을 싫어할 것 같아서 하진 않았다고 하지만··.

'이거 낌새가 이대로 가면 분명 감금까지 할 것 같은데··.'

이미 통금시간 까지 정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길드로 자주 가야한다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꾸 밖으로 나가려는 시안이 불안할 것이다.

펄럭펄럭

가장 마지막 장에 있는 6일차를 봤다. 아직 오늘의 기록은 적혀있지 않아보였다.

[내 사랑과 만난 지 6일 차.]

시안이 내게 고백을 했어··. 정말로 낭만적이었지. 어두운 거리와 우리를 조용히 비추는 가로등까지.

나한테 평생을 지켜달라고 말하는 모습에 그만 덮칠 뻔했지. 지금 그때를 다시 생각해봐도·· 하아··. 벌써 다시 보고 싶네.

그런데 무슨 소리였을까. 자기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해.

분명 그쪽 세계에서 꽤 심각한 취급을 받았다고 했는데··. 왜 다시 그런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걸까.

그리고 또 나랑 같이 갈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리인 걸까.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네.

뭐··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 그냥 난 내 곁에 시안이 있어 준다면 그걸로 행복하니까.

레이븐은 일기의 주인이 쓴 내용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되돌아·· 갈 수 있다고?"

일기에서는 시안이 자기가 살았었던 세계. 즉, 던전 안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이 방에 시안과 일기의 주인이 없는 이유도 지금쯤같이 시안이 살았던 세계로 가 있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소혜라는 여자친구가 없는 틈을 타서 같이 갔을 수도 있다.

다 읽은 노트를 읽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간단하게 방을 조사하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복잡한 정보를 얻었다.

레이븐은 더 알아볼 것이 없나 방을 둘러봤다.

"그래도 그렇지·· 사안은 왜 이런 여자한테만 비밀을 알려주고 나한테는··"

꿍시렁 거리면서 방 안을 좀 더 둘러보던 레이븐이 어느 한 곳에서 발을 멈췄다.

"어? 이게 뭐야."

침대 옆에 작은 액자가 걸려있었다.

남녀 2명과 여자아이 2명. 부모님과 같이 찍은 과거의 사진으로 보였다.

"이 여자아이는·· 분명 그때의··."

레이븐은 조심스럽게 그 액자를 들어서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어린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차가워 보이고 도도한 인상의 여자아이. 그 옆에는 명쾌하고 활발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

그리고 그런 여자아이들을 친근하게 안고 부모님.

문제는 그 부모님과 여자아이들이 레이븐한테는 미친 듯이 익숙했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분들은 분명, 과거에 내가 살았던 보육원을 후원하신 분들하고·· 이 여자아이는··."

레이븐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 예전에 나와 함께 자주 놀았던 친..구?"

자주 놀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레이븐은 아주 친했던 친구의 뒤통수를 친 여자니깐 말이다.

친구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어두운 밤에 그녀의 방에 들어가 가장 값비싸 보이는 물건을 훔쳤다.

그 덕분에 지금은 아주 높은 자리까지 있지만·· 그때의 기억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죄책감에 물들 게 해서 피폐하게 만들어줬다는 거에 가까웠다.

지금은 비록 많이 괜찮아 졌지만..

탁..

"아·· 이럴 리가··.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말도 안 되는 장난이라고···."

레이븐은 다시 탁자에 액자를 놨다. 떨고 있는 손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그 액자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이런 곳에서 재회하게 된다니. 과거의 친구를 이렇게··

레이븐의 마음속에서는 다시 만났다는 기쁨보다 그녀의 물건을 훔치고 도망갔다는 커다란 죄책감이 레이븐을 묶었다.

하지만 커다란 죄책감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

배덕감.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배덕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윽, 나란 여자는 시발·· 왜 이런 상황에서 흥분을··."

사방이 빙빙 돌았다. 토할 것 같았다. 헛구역질이 나오며 자기 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죽고 싶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돈도 훔친 거에 모자라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친구마저 빼앗고 있었다.

"커흡·· 콜록콜록, 우에엑···."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는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는 죄책감보다 배덕감이 더 커지고 있다.

소혜의 남자친구이자 과거에 가장 친했던 여자가 제일 사랑하고 있는 남자친구.

그 둘의 남자친구를 뺏는 자신.

만약 시안이 그들에게 비웃음을 흘리며 내게 달라붙을 때 대체 무슨 기분일까.

좌절하고 절망하며 눈물을 흘리며 시안의 이름을 고래고래 울부짖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외침에도 묵묵히 나만 바라보는 시안의 모습이 보인다.

"흐극, 크흐흡··. 아아악..!"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안 된다. 더는, 이 이상 생각을 하게 된다면 나는..

레이븐은 머리를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헝클어트렸다.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하는 자신에게. 너무나 추악한 이런 자신에게 말이다.

툭.. 툭..

"시발, 시발··! 대체 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하는 머저리 새끼인 건가··."

눈물이 나온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눈을 억지로 닫으며 눈물을 막아보지만, 고작 그런 행동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털썩

"시발·· 시발·· 끄흑·· 흑··."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린 레이븐의 하체와 바닥은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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