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2 회: 7권 -- >
강여진은 지강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하니 학교까지 찾아올줄은 꿈에도 몰랐던터라 바싹 긴장한 것이다.
"야."
"왜,왜요?"
말투에는 떨림이 있었다. 지강혁의 굳은 표정을 보니 한방 때릴것 같아 보여서 저절로 쫄아버리고 말았다.
"어제는 바락바락 잘만 대들더니 왜 갑자기 쫄고 지랄이야?"
"그,그건."
"너한테 한마디 해주려고 이곳에 온거야. 그러니까 쫄지 마라."
"무,무슨 말을 하려고요?"
지강혁은 잠시 고민하면서 하늘을 한번 우러러 보더니, 이내 땅을 한번되짚어 보았다. 그리곤 마음을 정한듯 강여진에게 고맙다고 짤막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사실 돈이 별로 없어서 문제집을 사지 못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매번 빵셔틀을 부려먹기도 미안했고, 월 30에 달하는 세금은 학생과의 개입으로 폐지된지 오래. 게다가 게임으로 번 돈은 주구장창 식비로 빠져나갔다. 수중에 돈이 없기 때문에 문제집을 훔치지 않고선 사는게 불가능했다. 도서관을 이용할까도 생각했지만, 도서관에는 문제집이 없었다.
"아무튼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온거다. 문제집 잘 쓸게."
조금 의외였다. 어제 말하는것만 보면 삼류 양아치가 틀림 없었는데 의외로 남자다운 면모가 엿보였고 예의가 제법 바른 오빠였다.
무엇보다 문제집을 받았다면 그냥 쓰면 된다.
명성고와 강여진이 다니는 중학교와는 거리가 좀 된다.
이곳까지 오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 되었을 것이다.
한창 바쁜 시기일텐데 이곳까지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는것 자체가 보통 사람의 상식선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제와는 달리 사람이 달라보였다. 강여진이 머뭇거리다가 쭈뼛쭈뼛 말을 받았다.
"그,그래요."
"그리고 말야. 어제 욕한건 미안했다.
친구새끼 있어서 가오 잡느라고 똥폼 한번 부려본거였어. "
'……'
'엄청 잘먹네.'
5시에 수업이 끝났고,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보답이라도 제대로 해야할것 같아 강여진은 지강혁과 소연이를 데리고 한 분식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킨 메뉴는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떡볶이와 오뎅따위의 음식들이었다지강혁은 사양의 말없이 떡볶이와 오뎅, 그리고 만두를 입안에 쑤셔넣고 있는 중이었다. 강여진은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먹어도 살이 안찌는 지강혁이 너무나 부럽다고 생각했다.
강여진은 조금만 먹어도 찌고, 조금만 안먹어도 빠지는 스타일이다.
그에 반해 지강혁은 많이 먹어도 안찌는 스타일 같았다.
키는 족히 178로 보였는데,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몸무게도 많이 나가야 64? 65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밸런스가 잘 갖춰진 균형잡힌 몸매라고 해야할까?
"오빠 진짜 잘드시네요."
"응 근데 살이 잘 안찌더라."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저 말이었다.
살이 잘 안찌더라!!
강여진이 대뜸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근데 넌 안먹냐?"
"오빠 먹는것만 봐도 제가 다 배부르네요. 제 걱정말고 맘껏 드세요.
공짜니까."
분식집 쿠폰 20장이 있으면 1만원치는 공짜다.
마침 강여진에게 20장의 쿠폰이 있었기에 지강혁을 데리고 온 거였다.
잠시후, 식사를 마친 지강혁이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밥도 해결했으니 이제 집에가서 공부에 매진하고 다가오는 중간고사에 대비해야 했기에 서두른다고 서두른 것이었다.
"여기 분식집 맛있네. 덕분에 잘먹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이제 집에 가시게요??"
"응.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서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하거든.
내가 여태까지 성적을 개판쳐놔서 지금 복구하지 못하면 영원히 불가능해.
그래서 공부에 매달리는 중이지."
"그랬군요."
"아무튼 정말 잘먹었다. 다음에는 내가 한번 사줄게."
"어떻게 사줄건데요?"
"뭘 어떻게 사줘? 그냥 사달라고 말하면 사주는거지?"
"연락처도 안주고 그런말 하기에요??"
"음. 연락처라. 그런데 이일을 어쩌냐? 난 핸드폰도 없고 집에 전화도 없는데??"
할머니가 죽고 생활비가 빠듯해져서 핸드폰을 정지시킨뒤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집에 있던 전화도 전기세를 내지 못해 연결이 끊긴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턱이 없었던 강여진은 어이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막말로 요즘 핸드폰 없는 고등학생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집전화도 없다니?
설마 싶어서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없는 핸드폰 번호를 받아낼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강혁은 용무를 마치곤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지강혁이 사라지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강여진 앞에 소연이가 떡하니 얼굴을 내밀었다. 깜짝 놀란 강여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뭐하는거야 기집애야? 깜짝 놀랐잖아!?"
"으으음~~"
뭔가를 눈치챈듯 소연이가 갑자기 낄낄 거리며 강여진을 놀리기 시작했다.
"너 이녀석~ 그새 저 오빠에게 반했구나!!"
"무,무슨 소리야?"
"후후 그렇게 뺄거 없어. 이 언니는 진즉에 네가 저 오빠에게 관심이 있다는걸알아차렸으니까."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 친구의 행동에 강여진은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이럴땐 무시를 하는게 상책이다. 괜히 말대꾸 해봐야 입만 아플뿐이었다.
다음날.
강여진이 학교에 도착하고, 여학생들이 우루루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전개에 강여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호호 요 앙큼한년! 우리들 몰래 그런 얼짱 남고생이랑 사귀고 있었다니!!"
"어제 슬쩍 봤는데 엄청 잘생겼더라!?"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는거 본애들이 수두룩하다!! 당장 불어라 이년!"
마침 강여진 앞으로 소연이가 손을 번쩍 흔들면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강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책상머리에 박았다.
아무래도 저년이 주둥아리를 놀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소문이 빨리 돌리가 없었다.
"오해야 오해!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그짓말!!"
"정말이라니까? 그 오빠랑 나랑 그때 두번째 본거야 두번째!"
강여진은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면서 극구 해명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여학생들의 눈에는 하트가 그려져 있었고, 개중에는 낭만적이라며 두 손을 모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여학생도 있었다그녀들에게는 강여진이 겪은 일들 하나하나가 낭만 그 자체와도 다름없는 러브스토리의 전개였다.
요즘 학교 2014니 학교 2015니 불량 청소년과 예쁘장한 여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한창 뜨겁게 로맨스 드라마를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파가 미친듯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알에 하트가 생길리가 없다. 강여진의 친구들은 부럽다를 비롯해서 그 오빠를 소개시켜 달라니, 이참에 제대로 꼬셔서 연애를 해보라느니 되례 강여진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치겠네 정말."
"여진아 이왕 이렇게 된거 그 오빠 한번 꼬셔보는게 어때??"
솔직히 그정도면 얼굴도 잘생겼고, 싸움도 잘하고, 남자답잖아? "
"이것들이 자꾸 헛소리를 하네? 야 그리고 니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그 사람 성격도 더럽고 사귀면 여자를 때릴상이야! 절대 안사귈거야!!"
"에이 설마 여자를 때리겠니? 그리고 전에 니가 바락바락 대들때도 그냥 참고 물러났잖아? 은근히 좋은 사람일수도 있다니까 그러네?
요즘 드라마에도 처음에는 싸가지없이 욕하고 여자 주인공 막 험하게 굴리다가 점점 착해지면서 잘해주잖아? 내가 보기에는 지강혁 그 오빠도 그런 스타일이야."
"소설을 써라 소설을! 막말로 내가 사귀자고 해도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어쩔수 없는게 연애라는거야 이것아! 그리고 우린 한창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바쁜데, 어떻게 시간을 내서 그 오빠를 만나냐? 게다가 핸드폰이랑 집전화도 없는 그사람을 어떻게 만날거냐구!"
"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연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강여진이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난 대학교 가기전까지 절대 연애 안할거야!"
"절대라고? 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세상에 [절대]라는건 없다더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잖아?
혹시 아니? 니가 그 오빠랑 눈맞아서 사귀고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행복하게 살지?"
"난 절대야! 절대! 그럴일 절대로 없으니까 자습이나 하셔!"
강여진이 소리를 빽 지르자 소연이가 얼른 귀를 틀어막았다.
"망할 기집애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나. 목소리는 딥따 크다니까?"
"시끄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