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35화(完)
정건우는 어린 시절부터 김하연을 동경했다.
부모님들끼리 친분이 있었던 탓에 서로 각자의 집에 자주 왕래하며 교류를 쌓았다.
노래 잘하지. 연기 잘하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예쁜데다가 마음씨까지 착한 그녀.
그는 자신 또한 김하연과 마찬가지로 음악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버클리 음대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연 회의감이 들었다.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조금 더 하연이 누나 옆에서 음악과 인생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재능은 버클리 음대 교수라도 결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으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대표님, 사모님. 그리고 하연이 누나.”
“으응. 건우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이세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건우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저 버클리음대가 아니라 하연이 누나 옆에서 매니저 생활을 해 보고 싶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니, 아들!”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19살에 불과한 건우가 하연이 매니저를 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건우는 단호했다.
“제가 그동안 음악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왔지만. 음악에 큰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운이 좋아 버클리 음대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평범한 사람밖에는 될 수 없을 거예요.”
“건우야!”
“하지만 하연이 누나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다면. 저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겠죠.”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건우는 결코 즉흥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아직 어렸지만 자기 나름대로 많은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냈을 게 틀림없다.
정성수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
“건우야.”
“네, 아빠.”
“네가 많은 고민 끝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이 아빠도 충분히 알겠다. 그래도 말이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지. 여긴 아빠와 엄마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김 대표님 가족분들이 다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니. 이 문제는 집에 가서 더 이야기하자꾸나.”
“아뇨. 이런 자리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 제가 하연이 누나의 로드 매니저가 될 수 없을까요? 밑바닥부터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절대 하연이 누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건우는 너무나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하연이에게 물었다.
“하연아. 네 생각은?”
내가 뭐라고 하는 것보다는 당사자인 하연이의 의사를 들어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하연이는 매니저부터 아티스트까지. 자신이 직접 사람을 뽑아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연이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뭐 괜찮지 않을까요?”
“응?”
“본인이 직접 하고 싶다잖아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죠. 얼마나 짧은 인생인데요. 안 그런가요?”
하연이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던졌다.
“물론 처음부터 제 매니저를 하는 건 어렵겠죠. 저는 해외 출장이 잦고 대부분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건우.”
“네, 누나!”
“일단은 곰도리형제단에서 키우는 신인들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시, 신인이요?”
“그래. 너도 로드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잖아? 실제로 일을 해보면서 이게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 그리고 대학은 다니는 게 좋다고 생각해.”
“왜죠?”
건우가 쏘아붙이듯 묻자 하연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만약 해봤는데 적성이 아니라면 어쩔 거야?”
“네?”
건우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지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해봤는데 아니다 싶으면. 그땐 어쩔 거냐고. 대학도 안 나왔는데 부모님이 부자라서 그냥 백수로 살 거야?”
“그, 그건!”
하연이는 건우를 자극하기 위해선지 일부러 평소보다 더 세게 말했다.
“나는 사람을 뽑을 때 그 사람의 가능성과 인성 위주로 평가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뽑진 않지. 네가 나의 매니저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최소한의 검증은 필요하지 않을까?”
“...”
건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모든 게 다 쉽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자 당황한 게 틀림없다.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내 하연이의 말을 수긍했다.
“알았어요, 누나. 누나가 한 말에 전혀 반박을 못 하겠네요. 누나 말이 맞아요. 제가 너무 철이 없었네요.”
“그래. 역시 우리 건우는 머리가 똑똑하단 말이야. 누구랑 다르게 한마디만 해도 척하니 알아듣고.”
누구는 호연이는 말하는 것 같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 짝!
나는 강하게 손뼉을 치고는 화제를 돌렸다.
“자.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음식 식겠네요. 다 같이 식사하시죠.”
“네, 그게 좋겠네요. 오늘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많이들 드세요. 김 대표님.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하하. 좋죠. 메인 요리가 순대니까 양주 말고 소주로 하시죠.”
“그래야죠.”
정성수가 벨을 누르자 곧 종업원이 나타났고, 정성수는 그에게 소주 1병과 맥주 4병을 시켰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김 대표님이 만들어주시는 폭탄주 마셔봐야죠.”
“흐흐. 그럴까요?”
나는 빠른 속도로 폭탄주를 말며 건우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돌렸다.
이제 1년이 지나면 건우에게도 술을 권할 날이 오겠지.
이후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해졌고, 나는 즐겁게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일까?
유주는 피곤하다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올라갔다.
호연이 면회 간다고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했으니 피곤할 법도 하다.
나도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연이가 냉장고에서 캔맥주 2개를 꺼내오더니 내 앞에서 흔들었다.
“아빠. 한잔하실래요?”
“좋지. 안주는?”
“그냥 술만 마셔요. 순대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
“그러자꾸나.”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캔맥주를 마셨다.
톡 쏘는 탄산이 입안을 자극한다.
“크아. 좋구나. 딸이랑 둘이서 마셔서 그런지 더 맛이 좋네.”
“헤헤. 오늘 고생하였어요.”
“뭘. 어제 미국에서 돌아와서 피곤할 텐데, 동생 면회 다녀온다고 너도 고생 많았다.”
“당연히 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누나가 동생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그런 것 치고는 호연이를 너무 쏘아붙이던데 말이지.
하연이는 옆으로 밀착하더니 머리를 내게 기댔다.
“아빠. 오늘 제가 좀 호연이한테 심했죠?”
“응?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모른 척 묻자 하연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이상하게 호연이만 만나면 속에도 없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매번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하하. 원래 친남매끼리는 그런다고 하더라. 너무 신경 쓰지 말렴.”
“엄마가 그 일로 상처받거나 하진 않으시겠죠? 왜 그렇잖아요. 저는 엄마 친딸이 아닌데. 친아들인 호연이랑 맨날 투닥거리니까.”
하연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마는 오히려 너한테 고맙다고 하던걸?”
“네? 왜요?”
“엄마도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호연이를 아끼고 챙겨주는지. 겉으로는 쌀쌀맞게 하지만, 그 안에는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 안 그래?”
“휴. 녀석은 대체 저한테 왜 그러는 걸까요? 건우처럼 예쁜 말만 하면 참 좋을 텐데.”
“하하. 건우도 너랑 24시간 같이 붙어있으면 똑같이 될걸? 원래 가족이란 다 그런 거란다.”
“그럴까요? 그런데 건우 말이에요.”
“응.”
“오늘 좀 갑작스러웠죠?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요?”
그러게. 나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하연이의 매니저가 되고 싶다니.
남의 집 귀한 자식에게 괜한 꿈을 심은 것 같아서 이세미 회장 내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빠는 건우가 제 매니저가 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녀석이 매니저 일에 적성이 있을지. 잘 적응할지. 꾸준히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지는 미지수니까. 다만.”
“다만?”
“녀석의 눈빛을 보니까 적어도 아무 고민도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은 건 아닌 것 같더구나.”
“아빠도 그렇죠? 저 그때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 순둥이 같은 애가 언제 저리 커서 남자다워졌는지 말이에요.”
응? 남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하연이를 노려보았다.
“너 혹시 건우한테 이상한 마음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빠도. 저랑 건우랑 7살 차이예요. 이상한 마음은 무슨.”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다. 정성수 부회장님이랑 이세미 회장님이랑 몇 살 차인 줄 알아?”
“몇 살 차인데요?”
“12살. 띠동갑 차이야.”
“와.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러고 보면 정 부회장님도 엄청난 동안이네요.”
음. 동안이라기보다는 노안인데, 나이가 들면서 그 얼굴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튼.
“우리가 뭐라고 하기 전에 건우네 가족들끼리 먼저 결정을 내려야겠지.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만큼 중요한 안건이지 않니.”
“그건 그래요. 그 정도로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제 매니저 할 자격도 없을 테고요.”
“후후. 우리 딸. 은근히 건우가 네 매니저가 되길 바라는 눈치네?”
“뭐 괜찮지 않을까요? 어릴 때부터 지켜본 아이예요. 재벌가인데도 전혀 그런 티도 안 내고, 매사 열심히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건우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연이 말대로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결정할 문제.
하연이는 그새 맥주를 다 마셨는지 냉장고에서 새로운 캔맥주를 꺼내왔다.
녀석은 경쾌하게 캔을 따더니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그거 아세요.”
“응? 뭘?”
“만약 아빠가 제 아빠가 아니었다면. 저는 절대로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진 못했을 거예요.”
“그랬을까? 나야말로 네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못 했겠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수영장이 딸린 넓은 저택. 직원 수만 500명이 넘는 회사의 대표. 아름답고 나밖에 모르는 아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연이와 호연이.
하연이는 이제 국민가수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가수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었고, 혼자 힘으로 명문대에 진학한 뒤 당당히 군 복무를 하고 있는 호연이도 나의 자랑이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다.
“하연아.”
“네, 아빠.”
“아빠는 아직도 네가 나한테 온 그날이 생생하구나.”
“히히. 똥오줌도 못 가릴 그때요?”
“그래. 그땐 정말 세상이 깜깜했지. 이 핏덩이를 어떻게 키울지 막연하고 두려웠단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빠보다 더 훌륭한 아빠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하연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기에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만약 네가 나한테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빠는 블랙 기업에 계속 다니면서 꿈과 희망을 잃은 채 인생을 낭비했을지도 모르겠구나.”
“푸훗. 아빠가요? 네버. 절대로 그럴 일 없어요. 제가 없더라도 아빤 반드시 보란 듯이 성공했을걸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호연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빤 이 세상에서 우리 하연이가 제일 좋단다.”
“저도 그래요. 히히.”
“아빠에게 우리 하연이는 늘 친구이자 인생 선배 같은 사람이었지. 딸이라기엔 너무 대단해 보였거든.”
“진짜요?”
하연이가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왜 인터넷에선 너를 보고 이하연의 환생이란 말이 있지 않니.”
“..그렇죠?”
“나는 가끔 그게 진짜가 아닐 까라는 생각을 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하연의 찐팬이었잖니. 너는 그녀와 너무나도 많이 닮았고, 아이라기엔 굉장히 성숙했지. 덕분에 너를 보고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언제나 큰 힘이 되었단다. 고맙다, 하연아.”
하연이는 나를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아빠. 그거 알아요?”
“뭘?”
“이하연은 자기 아빠를 무척이나 미워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저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물론이고 그건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고마운 이야기로구나.”
“아빠. 제 아빠가 되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리고 사랑해요. 영원토록 이요.”
하연이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더니 부끄러웠던지 후다닥 자기 방으로 도망친다.
후후. 이런 게 딸 가진 아빠의 행복 아니겠나.
나는 하연이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남은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연아.’
네가 내 딸이 되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
하연아. 늘 지금처럼 건강하고,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향해 최선을 다하렴. 아빠는 늘 너의 편이란다. 사랑해.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늦은 밤이었지만, 한강은 언제나 그렇듯 유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하연이가 그래왔고,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언제까지나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연이를 내게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린다.
完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