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29화
엘링 홀란드는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하여 곧바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적응 기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어마어마한 스피드와 압도적인 피지컬. 그리고 순도 높은 골 결정력으로 그는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지금.
팀의 프리시즌 친선경기를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
‘이런 곳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
K리그 올스타팀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유럽에 있는 명문구단과 친선전을 치르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축하공연도 무슨 5살짜리 꼬맹이가 한다고 한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꼬마가 노래 부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만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다고?’
아이의 가창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뿐인가. 섬세하고 아련한 감성에 마음이 촉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공연이 시작된 이후부터 한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기상송으로 챔피언스리그 주제가를 듣고 눈을 떴지만.
앞으로는 저 아이가 부르는 노래로 바꿔 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서 말이다.
#
친선경기는 원정팀인 맨체스터 시티 FC의 원사이드 시합이었다.
베스트 일레븐을 총동원한 그들은 K리그 올스타팀을 무참하다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 냈다.
1골, 2골, 3골.
이제는 스코어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지경.
결국 12-3이라는 야구 스코어로 경기가 끝났고, 이날 MVP는 지난 시즌 EPL 득점왕이었던 엘링 홀란드가 차지했다.
그는 이날 경기에 전반전에만 뛰었음에도 혼자서 팀 득점의 절반인 6골을 넣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배려로 나는 피치 위로 내려와 그에게 사인받을 수 있었다.
키가 195.2cm나 되다 보니 눈앞에 웬 벽이 있나 싶다.
그런데 녀석은 내게 사인을 해주고 나더니 무언가를 물어본다.
“하여온. 유어 다러얼?”
뭐지? 하연이가 내 딸인지 묻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크게 반색하더니 하연이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하연이? 하연이는 저기 VIP 테이블석에 유주랑 같이 있는데?
하연이와 유주를 향해 손짓하자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경기장 관계자가 피치 위로 들어오지 못하게 그들을 막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하연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아빠아!”
“진형아. 우린 왜?”
“아. 홀란드 선수가 하연이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해서.”
“저요오?”
하연이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는다.
그런데 그 순간.
홀란드가 하연이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꼭 껴안는다.
아니 이놈의 자식이 갑자기 경우 없이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워낙에 거구인 녀석이 얼빠진 표정을 하며 하연이를 껴안자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영어로 뭐라고 하는 것 같더니 이내 하연이가 아래로 내려온다.
“하연아. 홀란드가 뭐라는 거냐?”
“사인받고 싶데요오. 제 공연을 보고 푸욱 빠졌다면서요.”
“그, 그래?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나는 홀란드를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그저 하연이만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하연이가 홀란드에 사인해주자 이내 다른 선수들도 우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맨체스터 시티 FC 선수들뿐 아니라 K리그 올스타 선수들까지 말이다.
“저기 하연아. 나도 사인 좀.”
“하요온! 미투!”
“사인 플리즈.”
나는 거친 파도에 밀려나듯 어느새 하연이에게서 멀어졌고 하연이는 땀 냄새에 찌든 남정네들에게 둘러싸여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크윽.
이렇게 원통스럽고 분할 때가.
나름 몸을 키운다고 키웠지만 프로 축구 선수들에게는 쨉도 되지 않는구나.
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조금 더 벌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연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싶다.
#
그해 8월은 무척이나 더웠다.
에어컨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하연이와 유주는 집에 오면 마치 뱀이 탈피하듯 홀라당 벗고선 거의 속옷 차림만으로 돌아다녔다.
하연이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엄마인 유주가 저리 하니 따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조용히 유주를 부르고선 주의를 주었다.
“유주야.”
“응?”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게 뭔 줄 알아?”
“뭔데?”
유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는다.
“체면과 염치를 안다는 거지.”
“그래서?”
“너 하는 꼴 좀 봐라! 다 큰 여자가!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다니 자식 보기 안 부끄럽니?”
“내가 왜? 그리고 여긴 집이잖아. 우린 가족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옷은 좀 입고 다니자. 아주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헤에. 우리 서방님. 부끄러움도 많으시네요.”
“그게 아냐! 하연이가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진짜!”
“왜? 나는 이게 편한데. 하연이도 그렇지?”
“웅!”
아주 엄마와 딸이 쌍으로 잘하는 짓들이다.
휴. 그래도 하연이도 앞에 있는데 화를 내는 건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그나마 눈치 100단인 하연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옷을 입고 나왔다.
나는 유주에게 계속해서 눈치를 줬고 결국 유주도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이참. 나는 아까가 더 편한데.”
“...”
“알았어. 입으면 되잖아. 김진형 너어. 되게 치사한 거 알지?”
“내가 뭐?”
“하연이 교육을 빌미로 내게 옷을 입으라고 강권하고 말이야.”
“유주야. 넌 한때 어린이집 선생님이었잖아. 타의 모범을 보여야지.”
“흥. 그건 어린이집에서만 잘하면 되지 집에서까지이래야겠어?”
아무튼 더 이상 유주와 하연이가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에어컨을 시원하게 켜놓고 있음에도 밖에 나갔다 오기만 하면 덥다.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가 위기라고 하더니. 이러다 나보다 지구가 먼저 열받아서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이 더위에 강성식과 그의 동생들은 어찌 지내고 있나 싶어서 그의 집을 방문했다.
-띵동!
벨을 누르자 강성식이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대표님이 이 시간엔 어쩐 일이세요?”
“바로 우리 집 밑이니까. 날이 무척 더운데. 살만해요?”
“하하. 여름엔 역시 이열치열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저녁으로 라면 먹고 있는데, 식사하셨어요?”
“네. 식사는 했는데. 여기 왜 이렇게 더워요?”
강성식의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라면을 먹고 있었다지만 지나치게 땀을 많이 흘리고 있는 모습.
게다가 복도와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훨씬 뜨거운 바람이 강성식의 집 안에서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뭐야? 에어컨 안 켰어요?”
“에어컨이요? 에이. 여기가 저희 집도 아닌데 그런 걸 함부로 킬 순 없죠.”
뭐?
아니 이 더위에 에어컨도 안 켜고 뜨거운 라면을 먹고 있다고?
강성식이야 다 큰 성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애들은?
나는 녀석을 옆으로 밀치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강성식의 집은 찜통이 따로 없었다.
조금 전 유주와 하연이처럼 속옷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수진이와 성진이.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강성식을 바라보았다.
“아니 왜 에어컨을 안 켜고 있어요?”
“그게 여긴 곰도리형제단에서 빌려준 집이고, 전기료도 올랐다는데 에어컨을 켜는 게 걱정되어서요.”
집은 싼값에 빌려주고 있었지만, 관리비는 강성식이 직접 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기료 아낀다고 이 더위에 에어컨도 안 켜고 산다고?
나는 당장 에어컨 리모컨을 찾고는 풀파워로 에어컨을 가동했다.
- 삐빅
시원한 바람이 나오면서 그제야 열기가 뒤로 씻겨나가는 것 같다.
이어서 창문을 모두 닫은 나는 강성식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성식 씨. 관리비는 내가 내줄 테니까 궁상은 적당히 떨어요. 이게 뭡니까? 애들이 저렇게 더워하는데!”
“아니 그래도 제가 어떻게..”
“됐고, 앞으로는 항상 에어컨 켜고 지내요. 그러다 동생들이 더위 먹고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런 거예요?”
강성식이 쩔쩔매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가끔 보면 강성식은 좀 바보스러운 데가 있었다.
지나치게 우직하달까. 물론 그게 녀석의 장점이자 매력이었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에어컨이 풀로 가동되면서 조금씩 더운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동생들을 방으로 들여보낸 뒤 강성식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일은 할 만해요?”
“네, 대표님. 매니저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고 보람찬 일인지 몰랐는데 요즘은 너무 재미있어요.”
“하선 씨랑 연애는 잘하고 있고요?”
“그게 조금.”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말을 잇지 못한다.
“둘이 싸웠어요?”
“그건 아닌데. 아뇨. 사실 싸운 건 맞아요.”
“왜요?”
매일 딱 달라붙어서는 꽁냥거리더니 이 커플도 싸움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 가 보다.
강성식이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속사정을 토로한다.
“하선이가 집을 옮기라고 해서요.”
“집이요?”
“네. 이렇게 작은 집에서 동생 둘이랑 어떻게 사냐며. 자기가 하나 알아봐 줄 테니까 거기로 옮기라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니 왜요? 여자친구가 집도 알아봐 준다니. 부럽기만 하는구먼.”
“여긴 대표님이 저와 동생들을 위해서 제공해주신 곳이잖아요. 그런 소중한 곳을 어떻게 버리고...”
나 참. 진짜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이런 말도 뱉었다.
“그리고 방금 대표님처럼 왜 더운데 에어컨도 안 켜고 사냐며 화를 냈어요. 바보 같다면서.”
“그럴만하네요. 누가 보면 제가 아주 악질 사장으로 보이겠어요?”
“네에?”
강성식이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렇잖아요. 제가 제공해줬다고 집을 옮기는 것도 마다하고, 기물 아낀다고 뻔히 달린 에어컨도 안 쓰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김진형 저 사람. 언론에 나와서는 맨날 선한 이미지만 보여주더니 알고 봤더니 완전 악질이네, 악덕 사장이네? 그러지 않겠어요?”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성식 씨.”
“네네, 대표님.”
“좋을 말 할 때 에어컨을 늘 켜고 사시고요. 여자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좀 새겨들어요. 하선 씨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제안을 했겠죠.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남자가 여자한테 빌붙어서 살 수 있겠어요. 기둥서방도 아니고 자존심이 있지.”
하하. 꼴에 남자라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빌붙어서 사는 게 아니잖아요. 성식 씨는 우리 곰도리형제단의 당당한 일원이고, 하선 씨도 마찬가지예요. 서로서로 도우면서 사랑하고 있는데 그게 어째서 빌붙는 게 되겠어요.”
“그, 그럴까요?”
“그럼요. 지금은 하선 씨가 더 돈도 많이 벌고 있고, 유명하니까 그렇지. 나중에 성식 씨가 열심히 해서 그녀를 먹여 살리면 되잖아요. 언제까지나 매니저 일만 할 생각은 아니죠?”
“아니 저는 그럴 생각으로.”
“어휴.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 하세요. 직급이 오르면 실장도 달고, 영업도 하고, 후배 관리도 하고 그래야죠. 언제까지 로드 매니저만 할 생각이에요?”
강성식은 그런 거냐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는 계속해서 이 일을 하고 싶다며 억지를 부린다.
“그래도 저는 이 일이 적성에 딱 맞아서요.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하선이랑 하연이 옆에서 일하고 싶어요.”
“당연히 그래야죠. 아무튼 하선 씨랑은 잘 이야기해보세요. 둘이 연락 안 한 지 얼마나 됐어요?”
“그게 저.”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이틀 되었습니다.”
후후. 고작 이틀 연락 끊긴 거 가지고 싸운 거라고 그런 건가.
아무튼 나는 그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그의 집을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강성식이 좋았다.
그 순수함과 열정. 나도 한때는 저런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왠지 더 눈길이 가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안에 아무도 없다.
식탁을 보니 쪽지만 한 장 달랑 남겨 있고 말이다.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감. 먹고 싶으면 당신도 1층 가게로 내려와>
아이스크림이라. 마침 잘 됐다.
수진이와 성진이. 그리고 성식 씨도 불러서 다 같이 먹어야지.
그리하여 세 사람과 함께 1층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더니.
‘이 시각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아무리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지만 여기에 이렇게나 손님이 많은 모습은 처음 본다.
그런데 유리창에 붙은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아이스크림 빨리 먹기 대회라고?’
가게 안이 평소와는 다르게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연이와 유주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시계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미친 듯한 속도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