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국힙원탑-128화 (128/135)

내 딸은 국힙원탑 128화

바르셀로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축구, 열정, 예술, 지중해, 빠에야 등. 바르셀로나는 세계적인 관광도시이자 수도인 마드리드와 더불어 스페인 경제의 중심지였다.

우리는 람블라스 거리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는 관광에 나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유행이 감소세를 보이면서 거리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카탈루냐 광장을 시작으로 보케리아 시장 등 람블라스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본 우리는 빠에야 맛집으로 유명한 시에떼 뽀르떼스를 방문했다.

1836년에 오픈하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피카소와 달리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다녀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식당.

이곳의 자랑인 먹물 빠에야를 시켰는데 과연. 우리네 해물철판볶음밥과 비슷하면서도 짠맛이 강해서 절로 맥주를 불렀다.

나는 입가에 오징어 먹물이 잔뜩 묻은 하연이의 입을 조심스럽게 닦아준 다음 스페인으로 여행온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하연아. 여기로 여행 잘 온 거 같니?”

“웅! 완전 조아요!”

“뭐가 가장 마음에 들어?”

“이거! 먹물 빠에야 진짜 맛있쪄요!”

“그렇구나. 아빠가 레시피 배워서 한국 돌아가서도 해줄게. 많이 먹어.”

“네에!”

유주는 이전부터 꼭 한번 스페인에 놀러 오고 싶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매번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어린이집 일로 정신없어서 못 와봤는데. 고마워, 진형아.”

“뭘. 어린이집 애들은 뭐래? 다시 나와줘서 좋데?”

“응. 배우 그만두고 다시 선생님 해달래.”

“하하. 귀여운 녀석들이네. 그런데 유주야.”

“응?”

“배우 해보니까 어땠어? 할만해?”

유주가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재미있기도 하고, 하면 할수록 빠져든달까. 어떻게 하면 제대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더라고.”

“오. 대단한데? 첫 연기라서 걱정되는 부분은 없었고?”

“당연히 많았지. 그런데 옆에서 다른 배우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 하연이도 그렇고.”

“다행이다. 강은석 배우님이 너 연기에 소질 있다고 칭찬하시더라.”

“진짜?”

“응. 감정표현이 섬세하고, 카메라 돌아가면 몰입도 금방 한다며, 왜 이렇게 늦게 배우 일 시작했냐고 뭐라 하시던데?”

“이런. 촬영장에서는 언제나 엄한 얼굴만 하셔서 몰랐거든. 뒤에서는 그런 말씀 해주실지 몰랐어.”

“열심히 해.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나도오!”

정신없이 빠에야를 먹고 있던 하연이도 유주를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유주는 그런 하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웃으며 말했다.

“응! 열심히 할게. 남편! 딸! 고마워!”

식사를 마친 우리는 바르셀로나 바닷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석양이 내려앉으며 바닷가는 거대한 붉은 수채화 한 폭이 그려진 듯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우리 세 사람은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연이가 없었더라면. 유주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언제까지나 두 사람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금 이 시각이 영원하길. 나는 천천히 바다 아래로 잠겨가는 붉은 태양에 빌고 또 빌었다.

#

여행 둘째 날.

우리는 아침 일찍 구엘 공원을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 가우디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둘러보았다.

자유로운 곡선과 곡면의 유기적인 형태가 인상적이었는데, 하연이는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건축물의 모든 것을 한눈에 담겠다는 것처럼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하연아. 이 건축물이 마음에 들어?”

“웅! 가우디는 진짜 천재야!”

“그래?”

“웅웅! 어떠케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아? 너무 멋져어!”

같은 예술인으로서 무언가 통하는 데가 있었던 걸까?

요즘 신곡 만든다고 정신없던 것 같은데 여기서 좋은 영감을 많이 얻어갔으면 좋겠다.

셋째 날은 내가 한국에서부터 고대했던 날이었다.

트로페우 조안 감페르.

FC 바르셀로나의 설립자이자 레전드 선수였던 조안 감페르를 기리기 위한 대회로 일종의 친선경기였다.

이번 대회는 작년 EPL 우승팀인 맨체스터 시티를 초청하여 진행되었는데 아직 정규 시즌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벌써 바르셀로나에는 뜨거운 축구 열기로 가득했다.

제법 거금을 들여 구매한 VIP석은 돈값을 했다.

“경기장이랑 완전 가깝다?”

“그치? 선수들 땀방울까지 선명하게 보이네. 크으. 이거 나중에 유튜브에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하겠네.”

한참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하연이를 비추면서 전광판에 하연이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하연이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인다.

스페인어를 몰라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관중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키임하요언!!”

“하요언! 하요언!”

이런 소리를 내며 말이다.

하연이는 어느덧 프로의 모습으로 돌아와 크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도 하연이를 다 아는구나. 역시 월드 스타!’

이런 아이가 내 딸이라니. 뿌듯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곧 시합이 시작되었고, FC 바르셀로나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경기가 진행된다.

프리시즌이기도 하고 양 팀 다 베스트 멤버는 아니었다.

그래도 몇몇 선수들은 나도 이름과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이들이었고, 과연 세계 최정상 레벨에 있는 선수들답게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였다.

경기는 결국 홈팀인 FC 바르셀로나가 3-0이라는 스코어로 영국의 맨체스터 시티를 눌렀다.

바르셀로나 홈구장인 캄 노우에서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행복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자신을 맨체스터 시티의 관계자라고 소개하더니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영어가 짧았던 관계로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라간다.

본의 아니게 캄 노우 내부로 들어온 우리.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데 이내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비췄다.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 FC의 감독이자 FC 바르셀로나의 전설 말이다.

내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아는 분이셔?”

“당연하고말고!! 펩이라고 펩!”

유주는 해외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나 본데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양반이었다.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맨체스터 시티 FC의 감독이라는 말과 펩 과르디올라라는 이름만 알아들었을 뿐 나머지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하연이가 유창한 영어로 그와 문답을 주고받는 게 아니겠는가.

하, 하연아?

#

영어는 전생에 소속사의 권유로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쓸 일은 없었다.

‘미국진출은 결국 이뤄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오히려 외국어 중에서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쓸 일이 더 많았다.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가깝기도 하고, 양국의 사람들은 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해 주었다.

그래서 배워놓기만 하고 쓰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영어였는데.

그걸 여기서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역시 뭐든 배워두면 언젠가 쓸 날이 오는 것 같다.

아무튼 눈앞의 대머리 아저씨는 개인적으로 나의 팬이라고 그랬다.

오늘 경기에서 져서 무척 기분이 상했는데, 나를 만날 수 있어 기분이 풀렸다며 말이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온 거니?”

“네. 경기 잘 봤습니다아.”

“하하. 3-0으로 졌는데 잘 보긴 뭘. 축구를 좋아하나 보지?”

“저 말고 아빠가요오.”

“그렇구나. 영어를 무척 잘하는구나?”

“어린이집에서 배웠어요오!”

“그래. 한국은 교육 수준이 무척 높다고 알고 있어. 현지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발음도 좋구나. 그런데 말이다. 혹시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니?”

한국에? 그가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페인에는 6박 7일의 일정으로 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잘 됐구나! 마침 다음 주에 우리 팀이 한국을 방문한단다.”

“한국이요?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

“그래. 노스 코리아(North Korea)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하하.”

“그런데 한국은 왜요오?”

“K리그 올스타팀과 친선 경기를 갖기로 했거든.”

오호라. 그들이 한국에 오는구나.

내가 축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게 축하공연에 나서줄 수 없겠냐며 물었다.

“원래는 축하공연 없이 친선경기가 치러지기로 했는데, 너를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겠지. 어떠냐?”

“그런데에 그런 거얼 초청팀에서 마음대로오 결정할 수 있는거예요오?”

“오호라. 주최사 이야기로군요. 그건 상관없다.”

“왜요?”

“이번 친선경기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제안한 거거든. 한국과 영국 수교 140주년을 맞아 우리가 먼저 제안한 경기란다.”

아하! 그러니까 한국팀이 영국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인지도 면에서 낮고, 그들로서는 한국 팬들에게 팬 서비스도 제공해 줄 수 있으니 프리시즌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다.

“잠시만요오. 부모님이랑 이야기해보고요.”

“그래. 물론이지.”

나는 즉시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렸다.

아빠와 엄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하연아! 너 언제 영어 배운 거니?”

“맞아! 어린이집에선 영어 알려준 적이 없는데?”

“헤헤. 제가아 따로오 배웠쪄요.”

“진짜?”

“웅! 아이패드로 영어 앱 깔아서 열심히 했어요!!”

두 분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다른 애들이라면 모를까 너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싶다. 대체 우리 하연이가 못 하는 게 뭘까? 그런데 맨체스터 시티가 다음 주에 한국에 온다고?”

“네에!”

“나도 기사로 접해서 알고는 있었는데, 설마 펩이 너한테 직접 공연 출연을 제안할 줄이야.”

“이 사라미 제 팬이래요.”

“펩이?”

“웅!”

펩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머리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아빠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머리 아저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는 영광이라며 혹시 누구누구 오냐며 내게 슬쩍 물었다.

아니, 아빠. 아빤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아무튼 대머리 아저씨에게 물어서 출전 선수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와아! 필 포든이랑 케빈 더 브라위너. 게다가 엘링 홀란드까지 다 온다 이거지? 대박!!! 완전 대박이다!”

이런 소리를 하며 말이다.

아무튼 나는 흔쾌히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아빠에게 친히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

아빠는 감격했는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고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빠가 이런 모습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진짜로 축구 좋아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둘이서 작은 원룸에서 살 때 말이다. 새벽에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서 무언가 열심히 보는 것 같더니.

그게 다 해외 축구를 보는 거였구나?

아빠가 나 때문에 흐뭇해하는 것 같아서 나도 참 기분이 좋다.

축구 친선경기 축하공연이라.

과거 프로야구 축하공연을 하고 난 다음에는 늘 좋은 일이 있었다.

이번에도 좋은 기운을 받고 새 앨범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빠.

이 대머리 아저씨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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