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27화
김수혁은 온몸에 닭살이 돋는 걸 느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촬영 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더랬다.
헤드폰을 쓰고 있었기에 선명하게 들린 괴기한 소리.
그래서 방금 촬영한 필름을 돌려보았는데.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여자의 비명이 함께 녹음된 게 아니겠는가.
“이, 이게 뭐야? 이런 소리가 왜 녹음돼 있어?”
“지금 이동혁 배우 말고는 다들 조용히 있었던 거 아냐?”
뜨거웠던 촬영장은 순식간에 오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분명 이동혁 혼자서 연기하는 장면이었고, 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고 있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소름 끼치는 여자의 비명이라니.
그때 제작진 중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이거 말이죠. 대박 날 징조 아닌가요?”
“오. 그렇네? 촬영 중 귀신이 나오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이 있잖아?”
“대박! 감독님! 이거 비하인드 스토리로 나중에 올리게 따로 보관해둡시다! 나 지금 소름 돋았어!!”
김수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 참여해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자신 역시 촬영 현장에서 귀신이 나오면 그 영화가 대박이 난다는 속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마케팅의 일환일 뿐 사실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1세기에 귀신이라니.’
하지만 직접 경험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아무튼 지금도 뒷골이 서늘한 게 흥분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따라 촬영에 집중하지 못한 그는 촬영장을 떠나 평소 자주 가던 타로 집을 찾았다.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종종 오는 곳이었다.
타로 가게 주인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뜸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에 여자는 또 누구예요? 훠이. 물렀거나.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게야. 이 잡것이!”
히이이익!
그 소리를 듣자 김수혁은 온몸이 쭈뼛거리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직도 있어요?”
“갔어요. 대체 오늘 뭔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오늘 촬영 중에..”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였고, 그녀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웃음을 터트렸다.
“대박 날 징조네요.”
“진짜요?”
“그럼요. 귀신이라는 건 일반적인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그, 그렇죠?”
“무언가 영험한 기운이 있으니 호기심에 접근한 것일 텐데. 좋은 거예요, 좋은 거. 하하.”
“그런데 타로만 보실 줄 아는 게 아니라 귀신도 볼 줄 아세요?”
“제가 시작은 타로가 아니라 신점이었거든요. 요즘 신점 보는 사람 잘 없잖아요. 그래서 타로로 종목을 전환한 건데,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저한테 타로 보셨던 거예요?”
김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이 잘 될 것인지 물었다.
상대는 타로를 몇 장 뽑더니 카드를 한 장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요?”
“어떤 느낌이 드세요?”
“황제 카드인가요? 뭔가 근엄하고 강력한 힘이 느껴지네요.”
“맞아요. 황제는 권력자의 상징이잖아요? 금전적으로는 부유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작품이 대박이 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이건 에이스 카드인데, 이 카드 역시 금전적인 성취를 뜻합니다.”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김수혁의 질문에 타로를 봐주었고, 김수혁은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대답을 다수 들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반드시 성공한다, 대박을 터트리게 될 터이니 금전관리 잘해라. 복이 물밀듯이 밀려올 텐데 이번에 알게 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라 등등.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던 사람이 이렇게 좋은 이야기만 해오자 김수혁은 어떤 확신이 들었다.
‘그래. 이 작품은 반드시 된다.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 거야.’
그는 그제야 귀신을 봤다는 찝찝함을 잊은 채 타로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오히려 귀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말이다.
#
한바탕 귀신 소동이 있고 난 이후 이동혁은 무언가 연기가 더 잘 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감정 표현도 평소보다 훨씬 더 잘 되었고, 다른 배우들과의 케미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촬영장 내에 진짜로 무언가 좋은 기운이 있는 걸까?’
감독인 김수혁은 자신이 타로점을 보고 온 결과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우주전쟁은 반드시 대박이 날 테니까 모두 혼신의 힘을 아끼지 말고 촬영에 공을 들여달라고 거듭해서 부탁했다.
물론 그로서도 날로 먹을 생각은 없었다.
소속 회사의 첫 영화였고, 곰도리형제단으로 소속사를 옮긴 뒤로는 처음 찍는 영화였으니까 말이다.
다만 SF 영화라서 이전에 찍었던 작품과는 달리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배경이 아니라 초록초록한 크로마키 앞에서 촬영하는 것도 그렇고, 피아노 줄을 몸에 매달고 찍어야 할 씬도 많다.
심지어 괴수와의 전투씬은 상대배역 없이 혼자서 연기를 해야 하니 무언가 감정을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귀신소동 이후 이러한 문제는 깨끗이 지워졌다.
‘앞에 실제로 괴수가 한 마리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거든.’
덕분에 지금은 제대로 배역에 몰입해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방금도 원테이크로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의 컷으로 촬영하는 장면이었는데 재촬영 없이 단숨에 촬영이 끝나지 않았던가.
‘이 기세를 이어서 열심히 해보자.’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여주인 류하선이 그녀의 매니저인 강성식과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촬영장 내에서는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
이동혁은 지나가던 강은석을 붙잡고는 슬쩍 물어보았다.
“선배님. 저기 두 사람 말이죠.”
“응? 하선이랑 성식이?”
“네. 두 사람 너무 친한 것 같지 않아요?”
“하하. 친할 수밖에.”
“네?”
“이거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절대 안 돼. 알았지?”
강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둘이 실제로 사귀는 거 맞아.”
“네? 그게 정말입니까?”
강은석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동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선배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건데요?”
“그럴 일이 있어. 아무튼 절대로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되니까 입조심하고.”
하하. 그게 정말이었다니.
뭔가 자기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실제로 사귀고 있었구나.
이동혁은 두 작품 연속으로 류하선과 연기 호흡을 맞추면서 내심 그녀에게 호감이 가고 있던 참이었다.
예쁜 건 둘째 치고 확고한 자기주장이 있는 게 매력이 넘쳤다.
지금까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여배우들은 뭐랄까. 외모만 예쁘지, 머리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더랬다.
고집만 세고 교양은 없달까. 사회적인 이슈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자기 생각과 논리가 부족했다.
하지만 류하선은 그들과는 달랐다.
일순 차갑게 보일 수 있겠지만, 자기 생각과 그 근거가 탄탄했고, 소위 말해 개념이 꽉 찬 친구였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끝나면 그녀에게 슬쩍 고백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동혁은 자신의 진정한 짝은 어디 있는 것이냐며 속으로 한탄하고선 아쉬움을 삼켰다.
우주전쟁 촬영이 끝나면 결혼정보회사에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나는 우주전쟁에 삽입될 OST 이외에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건 내년에 영화가 개봉되어야 빛을 발할 작품이니 그전에 공개할 음원을 만들기 위함이다.
물론 우주전쟁에 카메오로 살짝 출연할 예정이고, 지금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모습을 비추고 있었지만, 나의 본모습은 어디까지나 가수였다.
‘가수 활동을 너무 오랫동안 쉬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겠지. TV 프로그램에 자주 나서는 것도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이고.’
결국은 자신도 관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으면 매사 힘이 나지 않는 느낌.
그러던 차에 강성식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하연아. 방금 방송국 PD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너 이하연 알지?”
“이하연이요? 웅. 잘 알아요오.”
“내년이 이하연이 죽은 지 벌써 5년째가 되는 해인가 봐. 그래서 이하연 작고 5주년 기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인데, 여기에 네가 후배 가수로 나와주면 좋겠다고 그러네.”
하하. 내 작고 기념 프로그램에 당사자인 나를 후배 가수로 섭외하겠다니.
물론 그들은 내가 이하연의 환생자인지 모르고 한 제안이겠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프로그램 제목도 무려 ‘이하연의 환생’이다.
1부는 5년 만에 돌아온 이하연의 음악과 인생 스토리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드라마란다.
이하연의 명곡을 배경으로 옛 지인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이 서린 장소를 찾는 내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듣기만 해도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이어서 2부에는 다시 돌아온 이하연의 특별한 콘서트가 방영될 거라고 한다. 이하연을 아끼는 선후배 뮤지션들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 홀로그램으로 등장한 이하연과 듀엣 무대를 펼친다고 하는데, 내가 이전의 나와 함께 공연을 펼친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 어색하기도 하다.
나는 강성식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하연과 김하연의 듀엣 공연이라. 벌써 가슴이 뛰고 설레네.’
프로그램 촬영은 연락받은 지 1달 정도가 지난 후에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무대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홀로그램 처리된 이하연은 나중에 CG 작업을 거쳐 방송에만 나온다고 그랬다.
하지만 나는 진짜로 내 옆에 이하연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부른 곡은 이하연의 대히트곡. <완벽한 날>이었다.
원래는 이 곡을 함께 듀엣으로 부르려던 가수들이 많았는데, 제작진은 나를 콕 집어서 이 노래를 내게 맡겼다고 한다.
나만큼 더 <완벽한 날>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며 말이다.
하긴. 유튜브에서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도 내가 공원에서 불렀던 이 노래 때문이 아니던가.
나는 진짜로 내 옆에 죽은 나. 그러니까 이하연이 있다고 머릿속에 그리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내가 두 명이 된 기분이었다.
이하연의 보이스가 들리고, 김하연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두 사람이 동시에 노랫말을 뱉어내며 두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조화된다.
노래를 부르던 중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떨어졌다.
카메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내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찍었다.
‘하연아. 너가 나고, 내가 너지만. 만약 어딘가 죽은 네가 따로 존재한다면. 보고 있니? 나는 지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 너무 좋은 아빠와 엄마를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고, 가수로도. 배우로도. 전생의 너를 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예전의 너는 너무도 힘든 삶을 살았지. 그래서 결국 비극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지만. 지금은 달라. 알고 있지? 지켜봐죠. 네가 못다 이뤘던 꿈. 내가 꼭 이뤄줄게.’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가운데 무대를 마쳤고, 제작진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나는 천천히 무대를 내려올 수 있었다.
‘하연아 고마워. 네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야. 난 결코 이하연으로서의 너를 잊지 않을게.’
해당 방송은 내년 설날에 맞춰 대대적인 홍보를 거쳐 특집방송으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부디 멋지게 편집 부탁드리겠습니다.
#
드디어 3개월에 걸친 촬영이 끝나고 우주전쟁은 후반 CG 작업에 들어갔다.
촬영을 마친 유주는 다시 매일같이 하연이랑 함께 등원해서는 어린이집 일을 봐주었다.
그게 아이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 보름 정도 지났을까? 어린이집은 여름 가정학습기간. 그러니까 일주일간의 방학을 맞았다.
그동안 유주랑 하연이가 바쁘게 움직여줬던 만큼 이번에는 해외로 휴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조금은 좀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찾은 곳은 우아함과 정열이 공존하는 남유럽국가. 스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