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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123화 (123/135)

내 딸은 국힙원탑 123화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자 강은석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내 눈치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이 그녀에게 높임말을 쓰며 결코 그녀를 우대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신유주 씨. 연기 경력은 없고 유튜브와 TV CF를 하나 찍은 게 다네요. 자신 있습니까?”

“네, 자신 있습니다!”

유주가 씩씩하게 답한다.

강은석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몇 번 씬을 준비해왔나요?”

“8번 씬과 19번 씬. 그리고 32번 씬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오디션을 볼 배우들에게 총 2가지 씬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하지만 유주는 3가지 씬을 준비한 모양이다.

강은석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성이 좋네요. 시나리오 연구를 많이 했나 봐요?”

“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고, 제가 한은선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요 며칠 살고 있었어요.”

“좋습니다. 그럼 셋 중에 편한 걸로 한 개 골라서..”

“잠시만요.”

나는 강은석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해왔다면 우리측에서 랜덤으로 씬을 요청해도 괜찮겠네요.”

“대, 대표님!”

심사위원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배우들이 오디션을 준비할 시간은 생각보다 없었다. 캐스팅에 속력을 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심사위원 측에서 랜덤으로 씬을 고르겠다고 하니 다들 놀랄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유주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유주는 내 아내다. 설령 그녀가 실력으로 한은선 역을 따내더라도 외부에서는 내 입김이 작용한 걸로 생각하겠지.’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훨씬 어려운 요청을 한 것.

게다가 지금 오디션 현장은 실제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나중에 영화가 개봉되면 비하인드 스토리로 묶어서 유튜브 등에 올릴 생각이었다.

여기서 유주가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녀의 실력에 대한 의문은 나오지 않을 터.

유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41번 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은선이 주인공 일행을 만나 자기 고향 행성을 떠날지 말지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씬은 독백이 아니라 남주와 대화하는 장면인데, 혹시 남주의 대사를 누군가 읽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심사위원 중 유일하게 배우인 강은석이 상대역을 하기로 했다.

강은석이 대본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 이런 외진 곳에 있을 생각입니까? 우린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

그러자 유주가 차분하게 눈을 깔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는 이 세상이 전부야. 기사가 되라니. 그런 건 내게 무리야.”

그윽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읊조리는 그녀.

‘유주가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는데?’

강은석이 탁자를 한 손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당신은 댄서가 아니라 기사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진정 자기 잠재력을 모르는 겁니까?”

“하? 잠재력?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딸이 걱정된다면 저희가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이런 외진 행성보다는 지구연맹이 훨씬 더 안전하겠죠. 은선 씨! 한 번만 더 생각을 달리 해주세요!”

유주가 강은석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그리고 딸을 지켜준다고? 너희 지구연맹이? 크크. 나는 너희에 대해 잘 알아. 능력도 없는 주제에 괴수와 싸운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핍박하고 갈취하지.”

한은선의 남편은 지구연맹의 기사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

하지만 그는 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수송선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녀는 도망치듯 딸과 함께 이곳에 정착한 뒤 댄서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구연맹을 증오했고, 때문에 지구연맹 소속이 아닌 중립 행성 카시오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강은석이 입술을 깨물고는 연기에 몰입했다.

역시 배우라 그런지 자기가 맡은 배역이 아닌데도 몰입감이 대단했다.

“사실 남편분은 제 사관학교 선배님이십니다. 그래서 더더욱 잘 알고 있어요. 그건 사고였습니다.”

“역시. 다 알고서 내게 접근한 거였구나. 어쩐지. 처음부터 수상했어. 춤도 못 추는 내게 팁을 주지 않나, 장애인인 내 딸에게 귀엽다면서 과자를 주지 않나. 나쁜 새끼. 당장 꺼져!”

그녀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절대로 다시는. 지구연맹에 배신당하지 않겠다는 듯.

“은선 씨! 잘 생각해봐요. 이건 당신과 당신 딸을 위한..”

“닥쳐! 닥치라고!”

그녀는 죽일듯한 기세로 강은석을 노려보았고, 몇 번의 대화가 더 이어지다 41번 씬이 종료되었다.

씬이 종료되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마치 카시오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것처럼 상황에 몰입하여 현실로 빠져나오지 못한 까닭이다.

제일 처음 입을 뗀 건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김수혁이었다.

“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오디션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장면이었어요. 지금 이거 그대로 찍어서 내보내도 무방했겠는데요?”

그는 천천히 손뼉을 치며 혀를 내둘렀고, 그제야 다른 심사위원들도 박수를 치며 그에 호응했다.

유주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인생 첫 연기라 긴장했는데 강은석 배우님이 리딩을 너무 잘 해주셨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유주 씨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덕분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주가 90도로 인사하고 오디션 방을 떠나자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 한은선 역은 더 볼 필요 없겠는데요?”

그래. 내 생각도 그랬다.

#

오디션 방을 나왔지만, 여전히 가슴이 쿵쾅거리며 조금 전 연기를 펼쳤던 느낌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런 게 연기로구나. 정말 색다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다니.

아이들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어린이집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진형이에게 오디션을 볼 거라는 말을 한 이후로 퇴근 후 매일같이 거울 앞에서 연습에 연습을 더했다.

때로는 연기 선배인 하연이에게 상대 배역을 부탁하기도 하고, 다른 SF 영화를 수십 번 돌려보면서 연기에 대한 감을 익힌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사실 연기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연예인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본 것도 있고, 배우는 언제나 선망하던 직업이었다.

최근에는 하연이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고.

‘그래도 조금 부끄럽긴 하네.’

특히 남편인 김진형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번 영화의 투자자이자 프로듀서였으니까.

괜히 그에게 오디션도 보기 전에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 어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곰도리형제단 사무실을 떠나 집으로 올라왔더니 하연이가 반갑게 나를 맞는다.

“엄마아! 오디션 잘 바쪄요?”

“응, 하연아. 집에 혼자 있으라고 해서 미안.”

“아냐아냐. 결과느은 어때쪄요?”

결과라. 그건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만약 한은선이라면. 그리고 그 상황이었더라면. 어떤 표정과 어떤 말투로 대사를 내뱉었을지 고민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제 주사위는 손에서 떠났다.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직 연기 경력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짓자 하연이가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엄마. 나 신곡 하나 만든 거 있눈데. 그거 들려줄까요오?”

“신곡? 그걸 벌써 만들었어?”

“네에! 아직 하나밖에 못 만들어찌만 타이틀 곡으로 쓸 생각이에요오.”

정말 우리 딸은 대단하다.

배장훈과 듀엣곡을 부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타이틀곡을 뚝딱 만든 건지.

나는 하연이를 꼭 안아준 다음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연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이패드에 담겨있는 노래를 재생한다.

- 빰빠밤빰! 빰빰빰!

오케스트라 반주로 편곡하여 웅장한 음색이 귓가에 울렸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이 말로는 요즘 기술이 좋아져서 아이패드 앱만으로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다고 그랬다.

가사가 없어서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연주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만든다.

무언가 박진감 넘치고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음악.

절로 주먹을 쥐게 만들면서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곡을 끝까지 들은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진짜로. 진짜로 너무 좋았으니까.

“하연아! 너무 좋은데?”

“히히. 진짜요?”

“응! 축 처진 기분이 곡을 듣자마자 텐션업이야!! 이거 이번에 아빠가 만드는 영화 OST에 들어가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영화 OST?”

“응응! 뭔가 우주전쟁이라는 컨셉이랑도 잘 어울리잖아?”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곡 전체적으로 사이버틱한 느낌을 더 줄 수만 있다면 우주적인 사운드가 완성될 것 같다.

나는 영화가 끝난 뒤 엔딩크래딧이 올라오면서 하연이가 만든 곡이 재생되는 모습을 그렸다.

검은 배경으로 깨알 같은 흰색 글씨가 올라가면서 하연이의 곡이 재생된다.

아직까지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던 관객들이 이걸 듣는다면 분명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하리라.

이제 오디션 결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곡은 반드시 진형이가 만드는 영화 OST로 선정되어야만 했다.

#

“하연이 신곡을 이번 영화 OST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오디션이 끝나고 다소 늦은 시각에 집에 올라왔는데 유주가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연이가 신곡을 만들었는데 이게 너무 좋다면서. 꼭 영화 OST로 하자고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좋기에 저러는 거야?’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하연이가 만들었다는 신곡을 들었다.

웅장한 사운드가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오호라. 유주 말대로 진짜로 우주적인 느낌이 있네? 무언가 광활하고 힘찬 곡이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곡을 듣자 유주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좋지? 좋지?”

계속해서 이런 추임새를 넣으며 말이다.

곡을 끝까지 들은 나는 이어폰을 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걸 하연이가 만들었다고?”

“응! 다음 앨범 타이틀곡으로 만들었대.”

진짜 하연이는 음악 천재다. 어떻게 이런 곡을 무슨 라면 끓이듯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나저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주야.”

“응?”

“너 한은선 배역으로 확정됐다.”

“지, 진짜?”

유주가 깜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모든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했어. 한은선 역은 너밖에 없다고.”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지?”

“물론.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어쩜 좋아! 나 어떡해!!”

유주가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더니 발을 동동 구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예뻐서.”

“뭐뭣?”

“딸은 음악천재에. 아내는 연기천재라니. 하하. 난 왜 이렇게 가족 복이 많을까?”

“뭐어? 내려놔. 나 무거워.”

“하나도 안 무겁거든. 깃털처럼 가볍거든?”

나는 유주를 안은 채 그녀를 빙글빙글 돌렸다.

“으아! 어지러워! 그만해에!”

“고맙다, 유주야. 고맙다 하연아!”

진짜 이게 무슨 하늘의 조화일까.

유주도. 하연이도. 내겐 너무나 과분한 사람들이다.

#

이후로 다른 배역들 역시 빠르게 오디션이 종료되었고, 배우 캐스팅이 모두 끝났다.

어쩌다 보니 [환생자를 주웠습니다]에 출연했던 곰도리소속단 배우들이 모조리 주·조연을 꿰찼다.

남주는 이동혁. 여주는 류하선.

그리고 한은선 역으로는 유주가. 지구연맹 사무총장 역으로는 강은석으로 말이다.

게다가 하연이는 한은선의 딸로 특별출연이 결정되었다.

그 밖에도 곰도리소속단 배우 3명이 더 영화에 출연하기로 하였고, 김수혁은 구체적인 촬영 스케줄을 짜기로 했다.

우리 회사 소속 배우들이 너무 많이 출연한다는 말이 나올지도 몰라 모든 오디션 현장은 카메라로 녹화되었다.

‘모두 실력으로 배역을 따냈으니까 뒷말이 나올 염려는 없겠지.’

심지어 조연급은 물론이고 주연급까지 오디션으로 뽑았으니 떨어진 자들은 할 말이 없을 터.

이제는 부족한 제작비만 투자받으면 되는데 이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이세미와 정성수가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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