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22화
김수혁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자신의 진로를 시나리오 작가로 정했다.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입봉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집필에 매진했으나, 생각보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꽤 많은 작품에 각색으로 참여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현실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아는 선배가 팀장으로 있는 중견기업의 홍보팀에 들어갔다.
보도자료를 쓰는 건 어찌 되었건 글을 쓰는 행위라 할만했지만, 기자들을 접대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늦은 술자리는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과연 이게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일까?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나날들.
그러다 평소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는 김선정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심지어 최근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합류하여 주목받고 있는 곰도리형제단의 김진형 대표가 그 주인공이었다.
국민아기 김하연의 아빠이자, 최근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롤모델 1위로 등극한 신성.
그는 퇴근하자마자 한걸음에 곰도리형제단 사무실이 있는 신림역으로 날아왔다.
김진형은 자신을 보자마자 시나리오에 대해 들려달라고 했다.
뭘 어떻게 말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30분간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드넓은 우주를 배경으로 인간과 괴수들의 전쟁을 다루는 이야기.
그는 말하는 내내 김진형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까지 이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수많은 투자자를 만났다.
그래도 나름 학창 시절에는 천재 각본가 소리를 듣던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스케일이 너무 커요.’
‘한국은 SF 불모지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VFX가 엄청나게 들어가야 할 텐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갈 것 같네요.’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감당하기 버거운 이야기네요.’
그들은 한결같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김진형의 표정은 그들과는 달랐다.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도중 도중 궁금증이 있으면 질문을 던졌다.
“우와. SF 배경인데 인간과 괴수가 검을 들고 싸운다고요?”
“네네, 그렇습니다! GP소드라는 건데, 신의 입자. 그러니까 영어로 God Particle이라는 가상의 소자로 만드는 병기입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라이트세이버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닌데, 뭐 비슷한 느낌으로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실제로는 각기 모습이 달라서 검도 있고 도끼도 있고, 채찍 형태도 있고. 모습이 다양하거든요.”
그는 신기하다면서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그랬다.
정말 이런 느낌 얼마 만이지.
그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주기까지 하면서 GP소드를 비롯해서 작품의 세계관에 관해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김진형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자기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음. 그러면 작가님은 이게 어느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가면 ‘제대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그는 제대로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김수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입을 뗐다.
“최소 200억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최소 200억이라.”
그는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김선정 기자가 자신을 지원하고자 나섰다.
“대표님. 200억 원이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이 정도 스케일의 SF 영화가 200억이면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에요. 할리우드의 마블 영화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작품은 제작비만 무려 3, 4천억 정도 들어가니까요.”
그런데 그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아뇨. 금액이 커서 그런 게 아니라 200억으로 제대로 연출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저한테 200억 원이 있긴 한데, 작가님 이야기 들어보니까 최소 400억 정도는 필요해 보이네요.”
“4, 400억이요?”
김선정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400억이라니.
자신이 알기로 현재까지 나온 한국 영화의 최대 제작비가 330억 수준이었다.
‘그런데 400억이라니. 이게 말이 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김진형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보유한 금액으로만 투자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네요.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하고, 별도의 투자사도 모집해야 할 것 같아요.”
“대, 대표님. 그 말씀을 지금 제 작품에 투자해주시겠다는 뜻인가요?”
“네. 들어보니까 진짜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저도 오랜 SF 영화 팬인데, 이야기만으로도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이라면 실제 영화로 연출되면 많은 사람이 좋아해 줄 거 같습니다. 물론 제대로 찍어야겠지만요.”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연출과 각본을 모두 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요?”
“네! 제가 직접 연출까지 해야 이야기가 제대로 살 수 있을 겁니다!”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연출을 한 경험도 있다.
뭣보다 자기 머리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연출까지 맡아야 한다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김진형은 뭐 괜찮지 않겠냐며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대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말이다.
당연한 말 아니겠는가.
무려 40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다. 이게 실패한다면.
자신은 더 이상 영화판에 기웃거릴 수 없겠지.
김수혁은 미팅을 마치고 곧바로 회사 팀장에게 전화했다.
“형! 저 내일부터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 뭐?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제가 5년 전에 쓴 각본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 그 뭐냐. 우주 전쟁 이야기?
“네네! 사표는 따로 못 쓸 거 같으니까 회사에는 형님이 잘 좀 이야기해주세요!”
- 야! 김수혁! 이런 법이 어딨어!
“미안해요, 형.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야! 수혁아! 김수혁!!!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전화를 끊었다.
이후에도 팀장으로부터 미친 듯이 전화가 왔지만, 그는 더 이상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은 천상 영화인이었다.
보도자료를 쓰고 기자들에게 굽실거리는 홍보인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영화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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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혁이 떠나고 나는 김선정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대표님. 400억을 투자하겠다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 정도는 투자해야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거든요.”
“제가 소개한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깜짝 놀랐어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시다니요.”
“뭘요. 실제로 작품에 대해 들어보니 무척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아직 한국에서는 우주 전쟁이라는 컨셉으로 연출한 작품이 없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우주 배경의 작품은 많지만 우주 전쟁까지 다룬 영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죠.”
“최근에 승리호도 넷플릭스에서 대박을 터트렸고, 한국산 SF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잖아요? 스토리도 탄탄하고, 캐릭터랑 인물관계도 좋아 보였어요. 잘만 만들면 괜찮을 것 같더군요. 그리고.”
“그리고?”
김선정이 내 입을 똑바로 바라보며 궁금증을 표한다.
“김 기자님이 이렇게나 그를 두둔하시는 걸 보면 무척 뛰어난 분 같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혹시라도 잘 안된다고 저 미워하기 없기에요.”
김수혁이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작품은 반드시 된다, 한국 SF 영화의 한 획을 그을 거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그녀가 한발 뒤로 뺀다.
“하하. 알겠습니다. 대신 홍보는 좀 부탁드릴게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휴. 대표님 진행방식이 너무 시원시원해서 머리가 못 따라가고 있어요. 투자도 그렇지만 각본과 연출까지 한 번에 맡기시고요.”
그건 그가 너무나 간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간절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게 되겠냐며 핀잔을 줬고, 그 결과 자신감은 바닥을 치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저렇게 간절한 표정을 보일 수 있었겠지.’
혹시나 실패한다고 해도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피해를 보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생각지도 못한 돈이 들어온 것이고, 어쩌면 하늘에서 이를 위해 과감히 쓰라고 보내준 돈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더랬다.
‘물론 절대로 대충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지.’
곰도리형제단이 가진 저력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펼쳐보겠다고. 나는 그리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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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준 돈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대로 소진했다.
하나는 <아이에게 사랑을>에 후원을. 또 하나는 SF 영화 제작에 쏟겠다고 말이다.
막대한 세금을 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말이다.
‘정말이지 행동력 하나는 엄청난 사람이야.’
보통은 이게 웬 떡이냐며 하고 있던 일을 모두 손에서 놓은 채 탱자탱자 놀 수도 있을 텐데.
‘역시 내 아빠야.’
게다가 SF 영화 제작에는 무려 400억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모자란 돈을 투자사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충족시키겠다면서.
아직 캐스팅은 결정되지 않았다니 자신도 카메오 정도로 출연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인지도에 있어서는 나름 대한민국 안에서 최고의 아역배우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몸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새로 신곡을 쓰고 있는데 요즘 통 진행 속도가 나지 않던 참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곡.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곡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는지 좀처럼 좋은 영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가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이야기하자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신선한 영감이 샘솟기 시작한다.
‘그래.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의 이야기. 그걸 노래로 풀어보자.’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악보를 쓰는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두려워한다. 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형상.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내라고. 기운 차리고 도전하라고. 그런 힘찬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까?
나는 이 노래의 화자(話者)를 아빠라고 생각하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블랙 기업에서 암울한 현실을 보내고 있던 그.
갑자기 자기 아이라며 갓난아이만 맡기고 떠난 썸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이 하려던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결단과 용기.
결국 끊임없는 도전으로 성공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계속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의 이야기.
아아. 이건 분명히 뜬다. 반드시 떠서 전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리라.
나는 어떤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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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투자자를 모집하여 제작 예산을 확보하는 한편, 제작진 선정 및 배우 선정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제작진 선정에는 한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선종이 형이 큰 도움을 주었고, 배우 선정을 위해서는 공개 오디션을 볼 예정이다.
이동혁과 류하선. 그리고 강은석 및 소속 배우들이 이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지만, 우리 회사 소속이라고 검증도 없이 선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디션 현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밀집했다.
배역에 따라서는 1000:1이 넘는 경쟁률을 보여줄 정도로 치열했고, 각종 연예 기획사에서 자기 소속 배우들이 이렇게나 뛰어나다며 전화가 오는 통에 회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아무튼 그거야 공정한 심사를 통해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주가 이번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쳤다.
“뭐? 네가 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응. 나도 궁금해서 시나리오 살펴봤는데, 한은선이라는 배역 말이야. 무척 매력 있던걸?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고.”
작중 한은선은 식민지 행성의 인기 없는 댄서였다가, 주인공 일행과 합류한 뒤 기사(Knight). 그러니까 인류의 최종병기로서의 재능에 눈을 떠 큰 활약을 펼치는 인물이었다.
히로인은 아니고 나름 배역이 큰 조연이자 유쾌하면서도 섹시하고, 엄마로서의 섬세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여장부 캐릭터.
유주한테 잘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과연 유주가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갑자기 연기는 왜?”
“네가 전에 그랬잖아. 나 연기 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그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하연이 연기하는 거 보니까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아무리 너라고 해서 배역을 바로 줄 순 없어.”
“물론이지! 나도 공개 오디션에 참여할게!”
“진짜로? 너 한 번도 연기해본 적 없잖아?”
“그러니까 연습해야지. 한은선 오디션은 아직 기한이 남았지?”
“응. 그렇긴 한데. 진짜 괜찮겠어?”
“응! 시나리오 읽고 이건 딱 나다 싶더라고. 괜찮지?”
모르겠다.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봐야지 실감이 날 것 같고.
아무튼 시간은 흘러 한은선 배역을 뽑는 공개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유명 배우부터 각종 연예 기획사가 미는 신예 배우까지.
엄청난 인파가 밀집한 가운데 드디어 유주의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