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20화
“미술 샘이 하는 이야기가 하연이가 외로워 보인대.”
“하연이가?”
나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하연이가 그린 그림을 살펴보았다.
뭘 표현하려고 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5살 꼬맹이가 이 정도면 진짜 잘 그린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외롭다는 거야? 색깔도 알록달록해서 귀엽기만 한데.”
“여기 좀 봐봐.”
그녀는 내게 왼쪽 하단에 있는 작은 삼각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왜?”
“그리고 이거랑 비교해봐.”
이거? 주황색으로 그려진 회오리?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미술 샘 말로는 너랑 나랑은 밝은색으로 둥글게 표현했고, 하연이는 차가운 색에 직선으로 표현한 게 마음에 걸린다더라.”
“그래?”
“응. 그리고 너랑 나랑은 가까이 붙어있는데 하연이는 혼자서 멀리 떨어져 그린 게 아무래도 애가 외로워하는 것 같다면서 말이야.”
흐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즉시 하연이를 불러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하연아. 이 그림 말이야. 혹시 왜 이렇게 그렸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러자 하연이가 쿨하게 답했다.
“하여니는 뾰족하코 아빠랑 엄마는 둥글둥글하자나요?”
“응?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자 하연이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하연이 말은 이랬다. 자기는 직설적이고, 나랑 유주는 온화하다고.
“아냐, 하연아. 우리 하연이가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데!”
“아냐 아냐. 나눈 삼칵형이 더 조아요.”
단순히 취향의 문제인가?
“그럼 엄마 아빠는 왜 주황색이고 넌 파란색이야?”
“나눈 귤색도 조치만 파란색도 조으니까요오.”
“왜?”
“바다 새칼이니까! 바다눈 널고 시원해에.”
“흠. 그럼 엄마아빠는 왜 가까이에 붙어 있고 하연이는 저기 멀리 있어?”
하연이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다.
“아빠 엄마 방은 위에 있코, 난 아래서 자니까.”
“그게 전부야?”
“웅. 왜요오? 하여니가 뭘 잘못해쪄요?”
그럴 리가.
나는 하연이를 꼭 안아주었다.
적어도 하연이가 외롭다거나 마음이 허해서 이런 그림을 그린 것 같진 않다.
그래도 괜히 아이에게 뭔가 미안했다.
“하연아. 아빠가 앞으로는 우리 하연이한테 더 신경 쓸게. 미안해.”
“아빠가 왜에?”
“그런 게 있어.”
내가 하연이를 세게 껴안자 하연이가 아프다며 버둥거린다.
하지만 유주까지 이에 가세하면서 하연이는 한동안 우리 품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찌부를 당했다.
‘당분간 하연이랑 따로 자는 게 아니라 같이 자야겠어. 내가 유주랑 결혼해서 하연이가 서운해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연이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푸핫! 사, 살려줘어!”
하연이가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풀어준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유주가 분명 서로 높임말을 쓰자고 했는데. 역시 습관이란 금방 변하는 게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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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아빠와 엄마는 나를 자신들의 방으로 불러 함께 잤다.
‘난 혼자 자는 게 더 편한데. 왜 이러시는 거지?’
무언가 그림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다.
나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건데.
‘미술 샘이 과도한 해석을 한 것 같네.’
다음번에는 그림을 그릴 때 한 번 더 생각하고 그려야겠다.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두 분의 신혼생활을 방해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동생을 가지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빠와 엄마 품속에서 함께 자니까 무언가 몽글몽글한 감정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따뜻하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하고.
‘이런 게 부모님의 따뜻함이라는 거구나.’
아빠와 엄마 냄새가 참 좋다.
전생에선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
엄마는 어릴 적에 나를 버리고 도망갔고, 아빠는 나를 껴안아 주기는커녕 발로 차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전생의 부모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헤헤. 이건 이것 나름대로 좋네.’
아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 느낌이 팍팍 들었는데.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랄까. 과연 한 회사를 이끄는 수장다운 모습이다.
“으흠. 하여나아.”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내 몸 위로 자기 발을 올리더니 잠꼬대한다.
큭. 무겁단 말이에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이번에는 엄마까지 나를 두 팔로 꼭 껴안는다.
“으으음. 여보오.”
꺅! 자기 전에도 두 사람에게 찌부를 당하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잠자리에서도 이러기에요?
엄마 아빠랑 같이 자는 게 좋다고 한 말 취소다. 내일부터는 그냥 다시 혼자 자겠다고 이야기해야겠다.
잠 좀 잡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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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이 되자 배장훈 선배가 곰도리형제단에 합류했다.
<배장훈, 기존 소속사 떠나 김하연 있는 곰도리형제단에 합류>
<배장훈 전속계약, 곰도리형제단에 새 둥지...같은 소속사 연예인 누구?>
<배장훈, 김하연 소속사 곰도리형제단과 계약>
그는 소속사를 옮기자마자 자신의 신곡을 녹음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바로 나와의 듀엣곡 말이다.
“하연아. 네가 준 가사 봤어. 좋던걸?”
“감사합니다아.”
“이걸 진짜 네가 혼자서 작사한 거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혀를 내두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 곡들도 네가 혼자 작곡하고 작사했다는 걸 듣긴 했지만 너, 진짜 장난 아니구나?”
뭐 이 정도 가지고.
나는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듀엣곡이라는 특징을 살려 연인 간의 달콤한 기 싸움을 가사로 표현했다.
“네가 먼저 삐졌다가,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틱틱거리다가 네 웃음에 나는 그저 모든 걸 내려놓지라니. 하하. 5살 꼬맹이가 도대체 이런 감성은 어떻게 알고?”
“아빠랑 엄마 하는 거 보고 썼어요.”
“아빠랑 엄마? 아하. 바로 옆에 좋은 모델이 있었구나?”
물론 그건 아니다.
전생의 나는 연애 한 번 못해본 숙맥이었지만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며 연인 간에 서로 어떤 감정을 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간접연애랄까. 혹은 연애를 책으로 배웠달까.
아무튼 실제 사랑을 해보진 않았어도 그 정도 감성을 표현하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대중 예술이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면 먹히는 법이다.
배장훈 선배가 대단하다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전생에 나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자 불현듯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게 아마 그가 전역하고 나서 나랑 듀엣곡을 부르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느끼한 얼굴로 물었다.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고 말이다.
“저기, 하연아.”
“네?”
“혹시 나랑 만날 생각은 없니?”
그때는 당황스럽기보다는 조금 느끼했다.
안 그래도 그의 별명 중 하나가 버터 왕자였는데 얼굴에 버터를 잔뜩 바른 듯 느끼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일언지하에 그의 고백을 거절했고, 우리의 합동무대는 그 공연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정말 인연이란 신기한 것 같다.
내가 그를 보고 싱글벙글 웃고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뭐 좋은 일이라도 떠올랐어?”
“아뇨. 녹음 마저 해요오.”
“하하. 그래.”
우리는 프로답게 빠르게 녹음을 마쳤고, 우리가 만든 듀엣곡은 금세 국내 음원 차트를 석권했다.
└ 배장훈 소속사 옮기자마자 곡 발표하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 ㅋㅋㅋㅋㅋㅋ 전 소속사 배아프겠다. 완전 엿먹이는 거 아님? 심지어 노래도 좋음.
└ 노래 좋더라. 그런데 김하연은 이걸로 다시 가수 복귀하는 건가? 연기도 잘하던데, 계속 배우 하지.
└ 무슨 소리! 하연이는 출발이 가수였고 본업도 가수임. 잠깐 연기 외도 한 거 가지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 연기도 하고 음악도 하면 되지 무슨 외도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어 ㅋㅋㅋㅋㅋㅋ
└ 배장훈은 음흉한 복학생 같고, 하연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 같은 느낌이더라. 가사가 완전 웃김
└ ㅇㅇ 이거 곡은 배장훈이 썼고, 가사는 하연이가 쓴 거래. 둘이 묘하게 잘 어울림
└ 미친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얼만데. 그딴소리는 일기장에나 쓰쇼
곡 자체도 좋았지만, 40대 남자 가수와 5살 여자 가수의 듀엣곡이라는 게 화제를 모으면서 심지어 어떤 기자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혹시 하연 양은 배장훈 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이 많은 아저씨? 혹은 연심의 대상?”
뭐래. 울 아빠보다 나이 많은 노총각한테.
듀엣곡 녹음도 마쳤겠다. 이제는 내 신곡을 만드는 데 집중해봐야겠다.
국내 음원 차트 1위는 물론이고. 빌보드 차트 1위까지 넘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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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소속 연예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일종의 회식이기도 하고, 이들은 일반적인 직장인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유대감을 쌓기가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배우들과의 술자리였다.
그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화 제작에 대한 말이 나왔다.
이동혁이 자기는 아무래도 드라마보다는 영화가 더 체질에 맞는 것 같다는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김 대표. 혹시 우리 곰도리형제단에서 영화 하나 찍어볼 생각은 없어?”
“영화요?”
그는 나보다 2살 위의 형이라 사석에서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 요즘은 온라인동영상 서비스나 IPTV 등 부가 판권 시장이 커져서 극장 수익만이 전부가 아니거든. 게다가 K 콘텐츠에 대한 인기도 높아져서 수출도 잘 되는 편이고.”
“흐음. 영화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라 잘 모르겠네요.”
“한 번 고민해 봐. 잘만 터지면 회사 수익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잘 되면야 좋겠지만, 요즘은 투자 금액이 장난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더 이상 극장 관객 수만으로 손익 분기점을 따지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OTT 등 부가판권 시장이 커지고, 수출도 늘어나면서 충족시켜야 하는 눈높이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덩달아 제작비 자체가 200억 원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 많아진 것.
회사가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백억 단위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그런데 류하선까지 곰도리형제단이 직접 영화를 찍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나선다.
“대표님. 동혁 오빠 말대로 우리도 영화 하나 찍어봐요. 요즘은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해서 일반인들한테도 돈을 모을 수 있거든요. 시나리오랑 연출만 좋으면 그래도 꽤 돈이 모일 거예요. 그리고 곰도리형제단은 출발이 영상 제작이었잖아요? 네?”
그거야 유튜브 등에 올릴 짤막한 영상이지. 영화는 또 다른 세계다.
카메라를 비롯한 장비도 다르고, 촬영 및 편집 스킬도 다르다.
뭣보다 러닝타임이 2시간에 육박하지 않나.
‘10분짜리 유튜브용 영상 제작과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 제작은 전혀 다른 스킬을 필요로 하지.’
이들과의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하연이는 곤히 자고 있었고, 유주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깼는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대체 몇 시야. 지금까지 마신 거야?”
“으응. 그렇게 됐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나는 조금 전까지 소속 배우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유주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유주가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 마. 지금까지도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될 거야. 영화야 나중에 기회 되면 찍으면 되잖아? 무리하지 말고.”
“으응. 고마워 유주야.”
나는 유주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그대로 잠에 빠졌다.
설마하니 이 이야기를 하연이가 듣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