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국힙원탑-119화 (119/135)

내 딸은 국힙원탑 119화

을지로에 위치한 한신 호텔 서울은 한국에서 가장 대규모 호텔이자 한신 그룹의 본사 기능을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룹의 수장인 이창돌 회장의 집무실 겸 숙소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호텔 꼭대기 층에 위치한 로열 스위트룸을 개조하여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나는 촬영팀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그의 방 앞에서 이세미와 정성수 부장님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김 대표님.”

“반갑습니다. 회장님은 어디에?”

“안에서 기다리는 계세요. 이쪽으로.”

그녀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이창돌 회장이 중후한 회색 정장을 입은 채 풀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다소 긴장한 얼굴.

이세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빠는 카메라를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요. 지금도 긴장한 얼굴 보이시죠?”

“세미야.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이 많구나.”

“피이. 김 대표가 어째서 남이에요. 하연이를 친손녀처럼 아끼는 분이.”

나는 이창돌 회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재호는 찍었다지?”

“재호요?”

그러자 이세미가 옆에서 속삭였다.

“한신 타이거스 감독님이요.”

“아. 네. 며칠 전에 촬영했습니다.”

“그가 뭐라던가? 회사가 미래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그러지 않던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다른 멘트를 해야겠는데. 뭐가 좋으려나.”

뭐야. 그와 멘트가 중복될까 봐 걱정하는 거였어? 이창돌 회장과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대기업 회장님이라기보다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그는 잔뜩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김 대표. 자네는 꿈이 뭔가?”

“네?”

“꿈 말일세 꿈. 회사 만든 지 얼마 안 됐다며. 그러니까 사장으로서 꿈이 뭐냐고.”

내 꿈이 뭐냐고? 이건 회장님 인터뷰인데 졸지에 내 인터뷰가 되어버린다.

“회사를 더 키우고, 구성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

“또?”

“음. 가능하다면 업계에서 1등을 찍어보고 싶네요. 원래 그런 생각은 없었는데 해보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끌끌. 그렇지. 사업을 하다 보면 다 그런 법이지.”

“그런데 제 꿈은 왜요?”

그는 아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사를 만든 지 벌써 50주년이야. 나 역시 한때는 자네 같이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던 젊은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늙어버렸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네 같은 초짜 사장의 마음가짐을 빌리고 싶어서. 한 번 물어봤네.”

“아 네.”

“그럼 시작해볼까?”

그가 자세를 바로잡더니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있던 동네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어느새 카리스마 넘치는 대기업 회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말했다.

“저기. 아직 카메라 세팅이 다 안 돼서요.”

“으응? 그런가?”

그가 다시 옆집 할아버지로 돌아왔다.

#

카메라 세팅이란 게 생각보다 금방 되는 게 아니다.

적절한 위치에 삼각대를 놓고 그 위에 카메라를 끼운 다음 각종 설정값을 만져야 한다.

여기에 조명도 설치해야 하고, 마이크도 달아야 하며, 설치해야 하는 카메라도 최소 3개여야 했다.

‘따분하게 한가지 구도만 보여줄 순 없잖아.’

그러니 최소 세팅하는 데에만 어림잡아 3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공간 같았더라면 미리 와서 준비했겠지만 이창돌 회장의 개인 집무실에서 촬영해야 했기에 그는 카메라가 세팅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다.

“일은 할 만한가?”

“네, 회장님. 무척 재미있습니다. 회사가 커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니까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후후. 처음엔 그렇지. 함께 하는 직원이 한자리 숫자였다가 두 자리, 세 자리로 불어나면 무언가 내 능력과 배짱도 커진 것 같고 든든하지.”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듯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만큼 문젯거리도 늘어나는 법이네.”

“문젯거리라면?”

“직원들 인건비도 늘어날 테고, 노사문제부터 갑작스러운 계약 파기. 경제 위기나 정권 교체, 광고를 찍었던 배우의 스캔들 등 모든 게 다 회사에 영향을 주지. 심지어 날씨까지 말일세.”

날씨는 지금도 큰 변수였다.

‘날이 흐리면 애써 잡은 외부 촬영이 힘들어지니까.’

그는 내게 회사를 키우면서 주의해야 할 점과 오너의 마음가짐 등에 대해 알려주었다.

‘인터뷰하러 왔다가 기업 컨설팅을 듣게 되는구나.’

잘은 몰라도 그의 이야기는 최소 수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는 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한신 그룹의 총수였다.

“첫째도. 둘째도 직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들이 없으면 회사도 없고 나도 없는 법일세.”

“네, 회장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하. 덕분에 나도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생각이 정리되었다네.”

그래서일까?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청산유수처럼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한신 그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비전과 철학에 대해 더없이 멋진 연설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오너쉽(Ownership)이라는 거구나. 열심히 해서 나도 그처럼 크게 회사를 키워야지.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남부끄럽지 않게 말이야.’

여러모로 얻어가는 게 많은 인터뷰였다.

#

진형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녁만큼은 꼭 집에 올라와 가족들과 함께했다.

자기가 직접 요리를 했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에야 부엌을 나왔다.

그런데 오늘은 일이 많다며 하연이랑 둘이서만 저녁을 먹으라고 그랬다.

‘무슨 일 있나?’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스팸 김밥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내 남편이 쫄쫄 굶는 모습을 죽어도 못 보겠다.

그러자 하연이가 자기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인다.

이제 5살이 된 하연이는 키도 훌쩍 크고, 과연 저 아이가 못하는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뭐든지 잘 해낸다.

지금도 내가 재료를 구워주면 그걸 스팸 통에 하나하나 넣고는 조심스럽게 꺼내서 김 위에 돌돌 말고 있지 않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이걸 빨리 진형이에게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도 잊고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아앗.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리자, 신유주!

“짠. 엄마랑 하연이가 만든 첫 스팸 김밥 완성이네!”

“와아!”

“그럼 엄마는 아빠한테 이거 전해주고 올 테니까, 하연이는 집에 잠시만 혼자 있어 줘. 괜찮지?”

“네에!”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스팸 김밥을 가지고 오피스텔 아래에 있는 곰도리형제단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나저나 나도 이 기회를 빌려 요리를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진형이가 너무 요리를 잘해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제까지나 진형이가 해준 밥만 먹고 있을 순 없었다.

‘그래. 나는 엄마잖아. 앞으로 요리를 배워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사무실에 갔더니 불은 죄다 꺼져있고 그 넓은 사무실에 진형이 혼자다.

나는 불을 켜고선 녀석을 나무랐다.

“눈 나빠지게 왜 불을 끄고 일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퇴근한 거야? 웬일이래?”

“응? 유주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너 식사 안 했을까 봐 하연이랑 둘이서 이거 만들어왔지.”

내가 도시락통을 내밀자 그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는다.

“와. 뭘 또 이런걸!”

“좋으면서 말은. 먹어. 먹어야 힘이 나지.”

“고마워.”

“그런데 왜 너 혼자 남아있어?”

“아.”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불금이잖아. 다 일찍 퇴근하라고 했어. 무엇보다 워라벨이 소중한 시대잖아.”

“그런데 너는 왜?”

“난 이 회사 대표잖아. 솔선수범해야지.”

오늘 한신 그룹 회장님 인터뷰를 하고 왔다더니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던 걸까?

나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대표님. 그러다가 쓰러져요.”

“에이 뭘 이 정도 가지고.”

“아무리 일이 좋아도 밥은 전처럼 가족들하고 함께 해주셨으면 고맙겠네요.”

“이야. 이거 좋다.”

“응? 뭐가?”

“높임말 하는 거. 뭔가 대우받는 기분인데?”

“그래? 그럼 앞으로 우리 서로 높임말 쓸까?”

진형이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부부 사이에 높임말이라. 좋지. 나 역시 원하는 바였다.

무언가 교양있어 보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보이잖아?

나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말했다.

“하늘 같은 서방님. 앞으로 소녀가 극진히 모시겠나이다.”

“하하하. 잘 부탁드리겠소, 부인.”

“그럼 식사 잘하시고, 너무 늦게 않게 올라오시지요. 소녀. 서방님만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나는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날름 핥고는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러자 흠칫하는 진형이.

후훗. 이 정도로 사인을 보냈으니 진형이도 너무 늦은 시각까지 일하지 않고 적당히 하다 올라오겠지.

하지만 녀석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올라왔고, 나는 너무 피곤해서 그저 이제 왔냐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 쿨쿨 잠이 들었다.

김진형 너어! 정말 나빴어! 흥.

#

“와. 하연아. 너어 딘따 그림 잘 그린다아!”

어린이집 단짝인 소윤이가 내 옆에 찰싹 붙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퍼포먼스 미술 시간.

외부 강사님이 오셔서 미술에 대해 알려주는 시간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각자 알아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이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전생에 미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었는데, 무언가를 시각적인 요소로 표현한다는 건 음악과는 다른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하는 예술이라면 미술은 눈으로 주는 감동이랄까.

표현법이 다른 만큼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소윤이가 옆에서 소란을 떨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우와! 선생니임! 하여니 진짜아 그림 잘 그렸쪄요!”

“대다네, 대다네!”

그러자 강사님도 이쪽으로 다가와 내가 그린 그림을 살펴보셨다.

“이야. 하연이 음악만 잘하는 게 아니라 그림도 진짜 잘 그리는구나? 그동안은 주로 몸을 움직여서 표현하는 미술 놀이만 하다가 이렇게 도화지에 그리는 건 처음인데. 하연이 너 진짜 예술에 소질이 있나 봐!”

“헤헤. 고맙습니다아.”

“그런데 이건 뭘 그린 거야?”

그녀는 내가 그린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더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하늘색으로 칠해진 공간 안으로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선으로 이어졌으며 어떤 것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졌다.

“선생님이 보기에는 일부러 이렇게 그린 것 같은데. 맞니?”

“네에. 마자요.”

“대단하다 정말. 이건 추상화라고 해서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점이나 선, 면이나 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 요소로 표현하는 기법인데 전공자들도 이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쉽진 않거든. 혹시 따로 미술 학원 다니니?”

“아뇨오.”

“그래? 그렇다면 아무래도 타고난 것 같다. 하연이는 음악도, 연기도. 그리고 미술까지. 정말 뮤즈의 환생인 것 같아!”

모르겠다. 전생엔 어릴 적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지냈으니까 억눌러진 내면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 동그라미 그림은 뭘 뜻하는 거야?”

“그건 우리 아빠요!”

“아하! 그럼 이 밑에 동그라미는 엄마?”

“네에!”

“그러면 하연이는 어딨어?”

“이거어.”

나는 스케치북 왼쪽 하단에 있는 작은 삼각형을 가리켰다.

“왜 하연이만 직선이야?”

“난 뾰족뾰족하니까요.”

“그래? 엄마아빠는 둥글둥글하고?”

“응.”

“그렇구나. 어머니가 여기 신유주 선생님이시지?”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알겠다며 그림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났다.

응?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런데 선생님. 저 그거 아직 다 완성한 거 아닌데.

아직 색칠 다 못 했다고요. 정말 어른들은 다 제멋대로라니깐.

#

유주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그림을 한 장 보여주었다.

“이게 뭔데?”

“하연이가 오늘 그린 그림.”

“와! 이거 추상화 맞지? 엄청 잘 그렸는데?”

그러나 유주는 여전히 근심어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