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17화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호텔의 총지배인인 배진철이라고 합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하연이에게 급히 부탁할 일이 있다고 그랬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마는 하연 양께서 저희 호텔 공연을 하나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출연료는 꼭 챙겨드리겠습니다!”
응? 이렇게 갑자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원래 공연을 준비하던 가수가 배탈로 펑크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탁. 난처한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연이가 오히려 하겠다며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저어. 할게요!”
“하연아?”
“나아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시포요.”
5살이 됐다고 이제는 제법 발음이 정확해졌다.
유주도 괜찮지 않냐며 한마디 보탠다.
“오랜만에 하연이 노래 라이브로 듣자. 배도 부른데 마침 잘 됐잖아. 응?”
그렇다면야.
나는 이를 수락한 뒤 그를 따라 무대가 준비된 야외 풀사이드로 이동했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날씨가 쌀쌀했지만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관계로 많은 이들이 수영장에 몸을 담근 채 공연을 기다리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하연이는 몇 번째 순서로 부릅니까?”
“원래 노래를 부르려던 가수의 순서는 두 번째인데, 갑자기 저희가 부탁했으니 제일 마지막으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팝페라 가수의 무대를 시작으로 공연이 시작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OST 메들리를 부르는데 나까지 괜히 흥겨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알라딘의 주제곡인 ‘A whole new world’가 나올 때는 나 역시 곡을 따라부르며 공연에 빠져들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하연이한테 디즈니랑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보여줘야겠네.’
어릴 때 무척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 하연이에게도 이 정도 교양은 필요하겠지.
이어진 무대는 놀랍게도 2000년대 초반 데뷔하여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발라드 가수 배장훈의 차례였다.
원래는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가수였는데, 한신 호텔 측의 조정으로 순서를 옮긴 것으로 보였다.
뜨거운 박수 세례를 받은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배장훈입니다.”
“와아아!!”
목소리 죽인다. 남자가 어찌 이리도 나긋나긋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원래는 조용히 제주에 머물다 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보수가 생각보다 세서 노느니 일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하하하.”
그의 농담에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한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더니 우리 가족이 있는 테이블에 눈을 고정하고는 미소를 보였다.
“제가 대망의 마지막 공연을 장식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두 번째 무대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뒤에 나오실 분이 누군지 알게 되면 여러분 모두 깜짝 놀랄 겁니다. 그렇죠?”
그는 하연이에게 윙크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여전히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는 곡이죠. ‘한 사람’입니다.”
이내 부드러운 반주와 함께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풀사이드 곳곳에 울려 퍼진다.
유주가 내 손을 꼭 잡더니 천천히 어깨를 기댄다.
나 역시 유주의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별 기대하지 않은 공연이었는데 이 곡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힘든 하루가 지나고 노을 아래 한 사람. 혼자 길을 걷네. 며칠 전만 해도 이 길을 둘이 걸었는데. 지금은 그 빈자리가 너무 공허해.”
유주랑 사귈 당시 노래방에서 꽤나 자주 불렀던 곡이다.
지금 여기 있는 대다수의 투숙객이 내 또래의 가족 단위 손님들이라 그런지 이내 공연장은 배장훈의 단독 공연이 아닌 모두의 무대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곡을 함께 불러주자 배장훈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 힘차게 노래를 부른다.
곡이 끝나자 그는 가볍게 코를 훔치더니 이런 말을 꺼냈다.
“역시. 유명한 곡이 많다는 건 가수로서 행복한 일이네요.”
“하하.”
- 두구두구두구두구
그런데 갑자기 신나는 전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그가 마이크를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이 시대 최고의 댄스곡은 모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금 전까지 있었던 달콤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이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다.
“뛸 쭌비 되씀비꽈아!”
“네에에에!!!”
누가 그를 배발라라 했던가.
지금의 그는 모다장훈이지 배발라 따위가 아니었다.
나와 유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댄스곡 ‘악마미소’를 함께 따라 부르며 흥겨워했다.
유주가 괴상한 춤을 추자 주변 사람들이 우리 존재를 눈치채고는 소리를 지른다.
“앗! 신유주다! 신유주가 여기 있어!”
“어디? 진짜네? 옆엔 하연이랑 김진형도 있어!”
“오 대박! 세 사람 언제 여기 있었던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주는 광란의 댄스를 이어갔고 이제 무대의 주인공이 배장훈인지. 아니면 유주인지 모를 정도다.
급기야 배장훈이 유주에게 무대로 나오라고 손짓하자 유주는 과감히 무대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환호하며 그녀에게 열광적인 응원을 보낸다.
후훗.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저 사람이 바로 제 아내입니다.
하연이도 엄마가 자랑스러운지 앙증맞게 몸을 흔들며 호텔 수영장은 단숨에 무도장으로 변신했다.
둠칫둠칫 두둠칫.
뜨거웠던 무대가 끝나고.
배장훈은 유주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유주 씨 맞으시죠?”
“네. 그렇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저도 장훈 씨와 비슷해요.”
“저랑요?”
“네. 가족이랑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환됐거든요.”
“오호라. 그럼 혹시 제 다음 순서가 그 분이신가요?”
“호호. 맞아요.”
“그분의 이름을 직접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유주는 마이크를 잡고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저의 사랑스러운 딸. 김하연 양을 소개합니다!!”
“대에에박!!! 김하연이 다음 가수야?”
“배장훈에 김하연까지. 한신 호텔 클래스 죽이네!”
“와아!! 김하연이다! 김하연이라고!!”
수영장에 있던 사람들은 물장구를 치며 환호했고,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은 전원 기립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연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로 자리를 옮긴다.
“김하연! 김하연! 김하연!”
하연이는 배장훈으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고는 씨익 미소를 보였다.
“꺄아아! 너무 귀여워!!”
“하연아. 아저씨가 사랑한다! 우리 딸보다 더 사랑해!”
“뭐라고! 이 양반이 미쳤나!”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다들 무대에 집중했다.
하연이는 이날 <어떤 두 사람>과 <원패밀리>를 불렀고, 앵콜 요청이 쏟아졌지만, 정중히 이를 사양하였다.
사전 준비 없이 나오기도 했고 지금 여기는 하연이 콘서트 무대가 아니었으니까.
공연이 끝나자 호텔 측 관계자들이 우르르 우리에게 오더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괜찮습니다. 저희도 덕분에 즐거운 자리였네요.”
“배장훈 님에 이어 하연 양까지 공연을 해주셔서 더욱 빛나는 자리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보통 이렇게 유명 가수들이 출연자로 나서나요?”
“아뇨. 배장훈 님은 저희 총지배인님의 조카신데 제주도에 놀러 오셨다고 해서 총지배인님이 삼고초려 끝에 모셔온 거에요.”
“아하.”
배장훈이 그의 조카였구나. 정말 한국 사회는 참 좁은 것 같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친구고 친척이다.
배진철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더니 혹시 괜찮으면 자기 조카와 인사라도 나누겠냐며 물었다.
시간이 조금 늦긴 했는데 이것도 인연인데, 나는 좋다고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방으로 초대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기에 이런 좋은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삼촌이 총지배인으로 있어서 저 역시 자주 오는 곳인데도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아참.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저는 장훈 씨 데뷔 때부터 팬이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게 되어서 정말 즐겁네요.”
“저야말로 하연이랑 하연이 부모님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시죠?”
“총지배인께서 이걸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한눈에 봐도 엄청 비싸 보일 것 같은 와인에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건지 다양한 안주가 풍성하다.
우리는 고맙게 이를 받았다.
“삼촌이 별걸 다 신경 써주시네요. 하하.”
“감사하죠. 뭐. 술 좋아하시나요?”
“네. 혼자 살다 보니까 느는 건 술뿐이네요.”
그는 올해로 43살. 노총각이었다.
나는 그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말했다.
“형. 괜찮으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네. 저보다 12살이나 많으신걸요.”
“와. 띠동갑이네?”
“그러게요.”
“어휴. 너는 그 나이에 예쁜 딸도 있고 부인도 있고. 정말 부럽다. 난 그동안 대체 뭘 한 걸까?”
“하하. 형 말대로 형은 인기곡이 많잖아요. 그게 다 유산이죠.”
“부질없다, 부질없어. 솔로 가수 주제에 맨날 사랑 곡이나 부르다니. 이건 위선이야, 위선!”
그는 스스로를 셀프디스하며 연신 와인을 마셨다.
명문대를 나오고 발라드곡을 주로 불러 부드럽고 스마트한 이미지가 있는 그였지만, 실제로 같이 술을 마셔보니까 친근한 동네 형처럼 느껴졌다.
하연이가 졸려 하기에 유주가 하연이를 재우러 떠나고 나는 그와 계속해서 술잔을 나눴다.
“진심 부럽다.”
“뭐가요?”
“하연이도. 제수씨도.”
“하하. 형도 그럼 빨리 결혼해요. 주변에 아는 여자는 많을 거 아니에요?”
그는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다 내 유명세와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들뿐이야.”
그런가? 하긴 그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가수다.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은. 조금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에멘탈 치즈를 한입에 삼키며 중얼거렸다.
“나이 드니까 알겠더라. 결국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해.”
“왜요?”
“인기라는 건 연기와 같아서 있었다가도 없어지고 그러거든. 하지만 결혼하면 애를 낳든 배우자가 있든. 옆에서 꾸준히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에이. 결혼생활 힘들어서 이혼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결혼도 못 한 사람에게 이혼은 무슨. 그러는 너는 설마 이혼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는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유주와 사랑할 겁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지금 있는 소속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혹시나 자신을 영입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형을요? 저희 회사가?”
“그래. 너희 회사 요즘 아주 핫하잖아. 유명한 배우들이 아주 줄을 섰다지?”
“그렇긴 한데, 가수는 하연이 한 명뿐이에요.”
“그럼 나를 데려가라. 어때? 나 가수뿐만 아니라 인터넷 방송인도 자신 있어. 지금도 유튜브 채널을 하나 키우고 있거든.”
그건 나도 안다. 가끔 보는 채널이었으니까. 유명식당을 돌아다니면 맛난 음식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형이 곰도리형제단에 온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곰도리형제단의 라인업이 배우뿐 아니라 가수로도 확장하는 계기가 되어줄 터.
“현재 소속사랑 계약이 언제까지인데요?”
“이번 5월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그럼 진짜로 옮기실래요? 저야 형이 와주면 대환영이죠.”
“진짜? 나야 완전 좋지!!”
쉬려고 온 제주도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낚았다.
그런데 그는 내게 또 다른 제안을 해왔다.
“그럼 혹시 하연이랑 듀엣곡 하나 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지금 쓰고 있는 곡이 있는데 말이야.”
듀엣곡? 그가 이전에 했던 듀엣곡은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노래방 애창곡에 오르지 않았던가.
마침 하연이 드라마 촬영도 끝났겠다. 새로운 앨범을 준비해야 하기도 했고.
그에 앞서 그와 듀엣곡을 부를 수 있다면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였다.
“형. 그 곡 지금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긴 음악을 들려주었다.
아직 가사를 만들지 않았는지 목소리 없이 반주만 나오는 곡이었는데 듣자마자 하연이와 배장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쫘악 펼쳐졌다.
‘완전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