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10화
극 중 여자 주인공이자 남주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박다은 역을 연기하는 류하선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뭐? 은영이가 내 친조카라고?”
“그래. 아빠가 우리 몰래 낳은 자식이 있는데. 그녀의 딸이래.”
“말도 안 돼! 그럼 은영이의 친모는 어디 있는데?”
“몰라. 미국으로 건너간 뒤로는 행적이 묘연하다고 하니까. 감찰팀도 그 이상은 추적이 안 된다고 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잊어.”
박다은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자 그녀의 오빠이자 박 회장의 큰아들인 박이영은 양손을 깍지 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러니 이제 그 녀석이랑은 헤어져. 어차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야.”
“내가 왜? 난 태훈 씨 사랑해!”
“은영이 걔가 친조카라는 사실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정신 차려, 박다은!”
“싫어! 싫다고! 누구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어!”
그녀가 절규하자 남윤진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컷을 외쳤다.
“컷!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이번 씬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남윤진은 류하선에게 다가와 담요를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연기 좋은데?”
“4살짜리 꼬마한테 연기에서 밀린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하. 그런 자세. 아주 훌륭해. 배우로서 모범적인 자세라고.”
하지만 류하선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며 대기하던 중에 스태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번 출연진 중에서 가장 빛나는 건 하연이 아냐?”
“맞아. 꼬맹이가 뭘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눈을 떼지 못하겠단 말이지.”
“류하선도, 이동혁도. 네임밸류만 높았지 아직 하연이 따라가려면 멀었더라.”
“크크. 너 그런 얘기 어디 가서 하지 마라. 두 사람 들을라.”
그 이야기가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남들이 봐도 그 정도였던가?’
김하연. 극 중 미혼부인 남주의 하나뿐인 딸을 연기하는 그녀는 촬영장의 꽃이었다.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월드 스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고, 귀엽고 깜찍한 외모. 거기에 성인 배우들을 기죽게 할 정도로 엄청난 연기 실력까지.
만약 자신이 저 나이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류하선은 자신이 없었다.
‘강은석 선배한테 연기를 배운다고 하던데. 나도 그에게 배우면 좀 달라질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느 순간부터는 연기력이 정체된 상태였다.
온라인에선 이런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 류하선 걔는 얼굴만 예쁘고, 연기는 꽝이야
└ 할 줄 아는 연기라곤 웃었다 울었다 정도인가?
└ 몇 년째 거북이 발전하는 류하선...
└ 옆에서 아무도 조언 안 해주나? 심각한데
└ 다들 느끼는구나 연기는 둘째치고 목소리 톤도 무슨 더빙 같아 볼 때마다 이질감 느낌
거기에 똑같은 표정을 이어 붙이고는 그 밑에 기쁨, 분노, 후회, 흥분 등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한 짤이 나돌고 있었는데, 그걸 보면 정말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정말 이렇게 한결같은 표정만 지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연기로 인정받겠다고 속으로 칼을 갈면서 배역을 맡았더랬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도 큰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것도 성인 배우가 아닌. 이번이 첫 연출작이라는 4살짜리 꼬마에게 말이다.
그녀는 무거운 얼굴로 촬영장을 빠져나가다 강은석을 만났다.
“어머, 선배님. 오늘 촬영하시는 날 아닌데 오신 거예요?”
“응? 하선이구나. 다음 화 스토리가 어찌 될지 모르니 꾸준히 나와서 모니터링해야지. 하하.”
“에이. 선배님도 참. 경력도 많으신데 너무 열심히 시다.”
“뭘. 나는 이번이 5년 만에 드라마 복귀작이니 신인으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아, 네.”
상대의 권위를 올려주기 위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강은석이 진지한 얼굴로 답하자 그녀는 무척이나 무안해졌다.
그리고 저런 자세야말로 연기력을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란 사실을 깨우친 그녀는 궁금했던 내용을 슬쩍 물었다.
“선배 지금 계신 회사 있잖아요?”
“곰도리형제단?”
“네. 거기 어때요? 회사 재정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서 이슈였던 걸로 아는데.”
강은석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왜 관심 있어?”
“지금 회사랑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좋은 곳이 있으면 옮겨가고 싶네요.”
“그럼 강력히 추천하지.”
“그 정도예요?”
“그래. 대표가 젊지만 올바르고 추진력도 강해. 우리 회사 대표인 김진형씨는 하선이 너도 알지?”
“네. 얼마 전에는 미혼부 살인사건 관련해서 라이브 방송도 했잖아요? 자기랑 관련 있는 일도 아닌데.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맞아. 능력 있고 뛰어난 친구야. 소속 배우들한테도 뭐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지. 온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으흠.”
곰도리형제단이라.
이름이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생각 보니 거긴 소수정예만 있는 곳이었다.
월드 스타 김하연. 그리고 왕년에 S급 배우였던 강은석. 여기에 최근 웃긴 춤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신유주까지.
그녀는 강은석의 지도를 받고, 곰도리형제단의 든든한 서포트를 통해 한결 발전된 연기력을 선보이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지금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나면 반드시 그곳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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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늘어난 만큼 곰도리형제단은 다양한 영상을 수주하고,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한신 그룹뿐 아니라 국내외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영상을 제작해달라고 줄을 선다.
우리가 섣불리 답을 주지 않자 단가도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영상 시장에 표준 단가라는 게 없는 건 맞지만 이렇게 높은 금액을 주겠다고?’
스스로도 모니터에 쓰인 가격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실 그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초기 멤버였던 김지환, 오세영, 조유리가 선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입사한 지 반년밖에 안 되었는데 베테랑이 따로 없다.
“거기!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이건 이렇게 해야지.”
“아앗,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네, 지환 님.”
곰도리형제단은 수평적인 조직을 지향하기에 모두 이름 끝에 님자를 붙여서 서로를 부르기로 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사장인 나와 김소라 과장. 이렇게 둘이었다.
직원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내게도 그냥 님자로 부르라고 했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강성식의 영향이 컸다.
어떻게 대표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겠냐며.
그런데 김소라는 의외였다.
초기 멤버 삼인방이 무조건 과장님이라고 부르자 다른 신입 사원들도 이들을 따라 과장님이라고 불렀다.
오세영의 말에 따르면 존경의 의미로 그런다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땐 김소라를 놀리는 거였다.
뭐 그래도 본인은 만족하고 지내니까 다행이었다.
‘회사의 확고부동한 넘버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나 뭐라나.’
아무튼 회사는 이만하면 문제없는 것 같고.
아참. 현모는 결국 유진 씨와 사귀게 되었다.
매일 밤 요가 수업이 끝나면 둘이서 함께 집을 나서더니만.
이리하여 세 얼간이를 비롯. 나까지 모두 파트너가 생겼다.
‘다음에 쿼드러플 데이트나 할까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성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식 씨가 이 시간엔 무슨 일인가요?”
-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강성식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급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 하연이가, 하연이가 연기 도중에 쓰러졌어요!
뭐라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환한 얼굴로 내게 좋은 하루 보내라고 말한 하연이가 왜?
나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하지만 강성식도 반쯤 넋이 나갔던지 횡설수설하기만 한다.
나는 회사를 떠나 곧장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금까진 한 번도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최근 연기 연습한다고 무리한 탓일까?’
하연이가 촬영장에서 극찬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다 엄청난 연습의 결과였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오면 끊임없이 대사를 외우고, 거울 앞에 서서는 마치 허은영이 된 것처럼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때로는 나와 유주에게 부탁해서 함께 대본을 읽기도 하였다.
‘하연아. 아빠가 가고 있어.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미친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방송국에 도착했더니 하연이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하연이의 얼굴을 살폈다.
“하연아! 괜찮아?”
“으으응.”
하연이가 피곤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는다.
자기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선.
강은석이 울먹거리며 내게 말했다. 이 자식은 덩치만 컸지 왜 이렇게 속이 여려?
“흐흑. 일시적인 과로래요.”
“과로? 병원은?”
“구급차가 왔는데 하연이가 절대 여길 떠날 수 없다면서. 그냥 여기 있겠다고 해서 저는..”
“알았어요. 성식 씨도 잠깐 세수 좀 하고 와요.”
얼마나 애가 탔던지 강성식은 그새 10년은 늙은 사람처럼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연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연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아빠랑 둘이서 병원 다녀오자. 응?”
“시러어. 나아 여기 있을래에.”
“이렇게 몸이 안 좋은데, 왜 고집을 부려! 당장 가자!”
내가 하연이와 실랑이를 벌이자 남윤진 감독과 김수진 작가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오셨군요. 얼른 하연이 데리고 들어가 보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남윤진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내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픽 쓰러져서..”
“그런데 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겁니까?”
“하연이가 여기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그게 참 저도..”
나는 즉시 하연이를 안아 올리고선 강제로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하연이는 싫다고 떼를 쓰는데 이대로 하연이를 방치할 순 없었다.
나는 성현이에게 연락한 뒤 즉시 보라매병원으로 향했다.
성현이가 미리 조처해준 덕분인지 별다른 수속절차 없이 곧장 1인실에 들어와 상태를 점검했다.
하연이를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뒤 의사들이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는 걸 뒤에서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졌다.
‘내가 그동안 하연이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애를 방치하고.’
하연이에게 연기를 그만두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의사는 강성식이 해준 말과 같은 말을 했다.
“단순 과로네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고,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에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요. 하연이는 저희 보라매병원의 스타입니다. 하연아 힘내!”
그는 하연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연이와 둘만 남은 공간.
나는 침대 아래에서 보조 의자를 뺀 다음 거기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