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06화
이동혁은 현시점 기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남자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최근에 찍은 영화 <마약상의 하루>는 팬데믹 이후 개봉한 영화 중 최고 관객 수인 800만 명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곁에 와도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는데.
‘얘는 대체 뭐지?’
아역배우는 기본적으로 맡은 바 역할이 그리 크지 않다.
기껏해야 귀엽고 깜찍한 감초 역할. 극 중 긴장감을 풀어주거나 긴장감을 극대화할 때 잠깐 등장하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김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빠아. 왜 으녕이한테누운 엄마카아 업어서요?”
저 능청스러운 연기 좀 봐라.
대본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소곳이 있던 애가 연기하는 그 순간만큼은 놀라운 집중력을 선보이며 좌중을 압도한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감독과 작가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두 사람 모두 김하연의 연기에 완전히 빠져든 상태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벙글 엄빠 미소를 짓고는 친자식 보듯 하연이를 본다.
다른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 대본이 아니라 하연이의 연기에 집중하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핫레스트 덕에 뜬 아이인 줄 알았는데. 선천적인 재능이 어마어마하다는 건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마터면 자기가 읽을 차례를 놓칠 뻔했다.
“아, 아냐, 은영아! 아빠가 은영이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빠가아 어마루울 쪼차낸게에 틀리임 없쪄!”
“아니라니까 그래두. 우리 은영이, 착하지? 오늘따라 왜 이럴까.”
“시러어! 엄마아 찾아와아! 빨리이!!”
김하연은 심지어 거기서 엉엉 울면서 오열했다.
대본 리딩이라 대사만 읽어도 무방할 텐데 완전히 극중 인물에 몰입했다는 방증이다.
“오케이 거기까지! 하연이 진짜 잘하는데? 이번이 연기 처음인 거 맞아?”
감독인 남윤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운다.
극 중 남자 주인공의 딸인 허은영이 왜 자기에게는 엄마가 없다며 떼를 쓰는 장면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기 친구들은 모두 엄마가 있는데 왜 자기는 엄마가 없냐며 울고불고 주변을 안타깝게 하는 장면.
김하연의 옆에 앉은 강은석이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하연아. 실례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니?”
“네에!”
“혹시 아빠하고도 이런 적 있었어?”
그러자 김하연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오! 나눈 우리 아빠한테에 한 번도 이러언적 업쪄요!”
“그래? 난 또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알았네. 네가 너무 연기를 잘해서 말이다. 하하.”
그녀는 실제로 미혼부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오디션도 없이 이 역을 맡았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연기력이면 앞으로 더 분발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더랬다.
‘이번에 처음 연기한다는 아역 배우한테 밀리면 그땐 진짜 끝장이다. 긴장해야겠어.’
하연이 덕분에 화기애애했던 첫 대본 리딩이 끝나고, 이동혁은 김수진에게 다가가 궁금했던 내용을 물었다.
“김 작가님. 복귀 축하드립니다.”
“흔쾌히 합류해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드라마는 2년 만이라면서?”
“네, 작가님. 그동안은 영화에 집중했거든요. 오랜만에 방송국 와서 저도 기분이 새롭네요.”
“그래. 나도 그렇고, 강 배우도 그렇고. 이번에 드라마 복귀작 찍는 사람 많네. 하하.”
“그런데, 김 작가님.”
“응?”
“김하연이라는 친구. 연기력이 장난 아닌데요?”
그가 김하연을 입에 올리자 김수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혹시나 싶어서 삼고초려 끝에 간신이 영입한 친군데. 자네가 봐도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 조금 전 대본 리딩 때 손에 땀이 흥건히 맺힐 정도로 긴장했습니다.”
“뭐? 자네가? 하하하. 하연이가 좌중을 압도하긴 했지.”
“그래서 말인데, 하연이 출연 비중을 조금 더 높여주실 수 있을까요? 가급적 저랑 단둘이 대화하는 장면이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응? 그건 왜?”
김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동혁이 빠르게 답했다.
“아무래도 이번 작품의 주요 소재가 미혼부니까 저도 딸인 허은영과 많은 대화를 하면. 조금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자기 아직 결혼 안 했다고 그랬지?”
“네. 싱글입니다.”
“그래. 그러면 아빠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겠네. 알았어. 그건 내가 조금 조정해볼게.”
“감사합니다, 김 작가님!”
“나야말로. 주연 배우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와주면 고맙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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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식은 조금 전 있었던 대본 리딩 현장에서 느꼈던 흥분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게 연기라는 거구나. 다들 대단해.’
드라마 대본 리딩이 처음이었던 그로서는 기대감도 높았지만, 유명한 스타 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더욱 즐거운 자리였다.
하지만 현장을 이끌었던 것은.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여배우인 류하선도 아니고 요즘 가장 잘나가는 남배우인 이동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번에 5년 만에 복귀하는 같은 소속사의 강은석도 아니었다.
자기가 맡은 4살짜리 꼬마.
이번이 인생 첫 연기라는 김하연이 그 주인공이었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할까. 나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연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어.’
매니저로서 자부심도 들고,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녀와 강은석을 데리고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강은석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 이름이 강성식이라고 했나?”
“아, 네. 선생님.”
“무슨 강 씨인가?”
“진주 강씨입니다.”
“그래? 무슨 공파지?”
“박사공파(博士公派)입니다.”
강성식의 대답에 강은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 나랑 같은 공파로구먼. 이거 먼 친척이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 하하. 그래. 항렬자가 성인가 식인가?”
“그건 저도 잘..”
강성식은 족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다. 부모님도 살아생전 그런 이야기는 해주신 적이 없었고. 진주 강씨 박사공파라는 게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강은석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하연이도 잘 챙겨주고.”
“아무렴요! 어서 타시죠.”
김진형은 강은석의 매니저를 따로 뽑기 전까지는 그를 함께 케어하라는 명을 내렸다.
강성식은 자신의 먼 친척인 강은석에게 호감을 느끼며, 앞으로는 하연이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도 자세히 조사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오늘 촬영 현장에서 친모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한 하연이가 걱정이다.
아무리 극 중 내용이라고는 하지만 하연이에게도 무척 가슴 아픈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는 운전하다가 슬쩍 하연이의 표정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연아.”
“웅?”
“오늘 괜찮았어?”
“우웅! 재미이써써요!”
그저 해맑게 웃는 하연이.
“그렇구나. 다행이네. 사모..아니 새엄마가 잘해주시니?”
“네에! 엄마아 너무우 쪼아요.”
“그래. 좋은 분 같더라. 역시 엄마가 있는 게 더 좋겠지.”
그런데 강은석은 무언가 오해했던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런 말을 던졌다.
“성식 군 나이가 몇이지?”
“올해 27입니다.”
“좋을 때네. 여자친구는 있고?”
“앗. 아직 없습니다, 선생님.”
“그래? 한참 연애하면서 즐길 때인데 아쉽네. 예전 같았으면 괜찮은 신인 여배우들 소개해줄 수 있었을 텐데. 산에 있으면서 연락을 끊은 지 오래라 아는 사람이 없어. 참. 강은석. 많이 죽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아냐. 내가 한번 주변에 소수문을 해봐야겠어.”
여친으로 여배우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자신은 고작 신입 매니저이지 않나.
강성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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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석과 강성식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하연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얘가 긴장하지도 않고 얼마나 뛰어났는지, 주변 모두가 그녀의 연기에 압도당했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하연이가 오늘 대본 리딩을 무사히 끝마쳤다, 이 말이죠?”
“아쉬워. 자네가 그 현장을 직접 봤어야 하는데.”
“맞습니다, 대표님! 정말 엄청난 포스였어요. 손에 땀이 마르지 않더라니까요.”
그래그래. 우리 하연이가 연기에도 재능이 있구나.
처음 노래를 부르고, 작곡과 작사를 할 때 느꼈던 그 충격을. 이번에는 방송국에서 보여주었다 이 소리겠지.
이제는 별반 놀랄 것도 없다.
하연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이제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튼 하연이도. 강 배우님도 무사히 드라마 시장에 안착한 것 같고.
‘공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는 큰맘 먹고 현재 쓰고 있는 사무실이 있는 한 층 전부를 모두 임대했다.
하나하나씩 늘리는 것보다는 한 번에 사무실을 확장하는 게 더 유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많은 인원과 장비를 어디다 옮길 순 없는 노릇이니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확장 공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 쾅! 쾅! 쾅!
덕분에 요란스러운 공사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그사이 모르는 얼굴이 많이 늘었다.
신규 채용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밑에 무려 50명이 넘는 직원이 있었다.
영상 촬영과 편집이 메인이고, SNS 담당자, 홍보 담당자, 디자이너, 개발자까지.
매니저는 공사가 모두 끝나면 새로 채용할 생각이다.
강성식처럼 초짜가 아니라 제법 이 바닥을 잘 아는 인물들을 모셔와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태식의 도움으로 매니저 경력이 많은 이들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이들에게 연락하여 면접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콘진원 세미나에서 처음 얼굴을 익혔던 한초에게서 연락이 왔다.
녀석은 난데없이 내 영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인터뷰?”
-그래. 내가 시리즈로 유명 인사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건 알지?
“응. 실리콘밸리 개발자와 유명 스타트업 대표 등. 지금 한 100명 이상 인터뷰했나?”
-땡. 정답은 99명이야. 그래서 말인데 100번째 인터뷰는 네가 되어주었으면 하는데. 어때? 생각 있어?
“내가?”
한초는 아무나 인터뷰이로 초대하지 않았다.
업계에서 엄청난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성과를 올린 이들만 찾아가 인터뷰했다.
처음에는 본인이 직접 인터뷰이를 찾아가 어렵사리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나중에는 이 시리즈가 대박을 치니까 서로 자신을 인터뷰해달라며 웃돈과 함께 문의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고 그랬다.
“진짜 고마운 일인데, 왜 나야?”
-하하.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요즘 아주 유명하잖아.
“내가 뭘. 이전에 네 인터뷰에 나오신 분들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겸손 떨지 마. 월드스타 하연이의 아빠에, 요즘 잘 나가는 곰도리형제단의 대표. 그뿐이야? 하연이법 통과시키는 데 일등 공신이기도 하잖아? 너 정도 되면 이제 유명 인사라고 스스로 말해도 다들 납득할 수준이라고. 하연아빠TV 운영자라고만 해도 구독자 수가 10만 명은 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한초는 끊임없이 나를 회유했다. 인터뷰해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에 쳐들어온다는 둥 유튜브 채널에 악플을 달겠다는 둥 반협박성 멘트를 날리기에 나는 그러자고 말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한초의 인터뷰이로 초대받다니.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으려나.
다행히 녀석은 대략적인 인터뷰 질문지를 사전에 내게 전달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하연이와 유주에 대한 이야기 및 곰도리형제단에 대한 질문도 섞여 있었다.
‘그래. 이쯤에서 한번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와 과거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건 좋은 기회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