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05화
김수진 작가는 남자 주연 배우의 딸로 하연이를 등장시키면 좋을 것이라 말했다.
강은석은 물론이고 하연이까지 오디션 안 보고 바로 출연을 확정해주겠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놉시스를 미리 읽고 왔는데 주인공은 솔로잖아. 갑자기 딸은 왜?
내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표님 보니까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떠올랐어요.”
“어떤?”
“주인공을 미혼부로 설정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하연이법이 국회 본회의 통과되고 이슈잖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그걸 저희 드라마에서 써먹고 싶네요.”
와. 드라마 작가들은 엄청난 속도로 대본을 갈아엎을 수 있다더니. 이렇게 막 작품의 소재를 바꿔도 괜찮은 건가?
이번 작품의 감독을 맡은 남윤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김 작가님이 하자면 그렇게 해야죠. 그래서 말인데, 김 대표님. 하연이도 함께 출연시키시죠? 강은석 배우님이야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 극 중 박 회장으로 등장하면 어떨까 싶은데.”
박 회장은 드라마상에서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우두머리로 여주의 아빠였다.
그러니까 남주를 괴롭히는 악역이자 작품에서 큰 역할을 맡은 무게감 있는 조연.
강은석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복귀작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배역이로군요.”
그런데 김수진이 이런 이야기를 던진다.
“박 회장은 여주의 아빠이자 하연이의 친할아버지라는 설정으로 어떠신가요? 물론 하연이가 여주의 딸은 아니고요. ”
“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렇게 되면 하연이는 여주의 조카가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근본 없는 개족보란 말인가!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선 물었다.
“제가 읽고 온 시놉시스와는 너무 이야기가 다른 데요?”
“원래 크랭크인 하기 전에 작품이 180도로 바뀌는 건 이쪽에선 흔한 일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막장인데요?”
나도 모르게 막장이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내 말에 강은석도 웃음이 나왔던지 애써 웃음을 참으려 노력한다.
생각해보니까 김수진 작가는 막장 드라마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대모(大母).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거나 귀신에게 빙의가 된다거나 등장인물이 웃다가 죽어버리는 등. 황당하고 개연성 없는 전개로 수많은 비판을 받은 장본인.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시청률에서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스타 작가였다.
‘하연이를 이상하게 등장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감을 보였다.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 말했다.
“그렇다면 수정된 시놉시스를 보고 싶네요. 만약 하게 된다면 하연이에겐 인생 첫 작품인데 이상한 배역을 맡기고 싶진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수정한 시놉시스를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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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과의 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강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연이가 걱정되시죠?”
“네. 아무래도 애가 연기를 해본 적은 없으니까요.”
“제가 보았을 때 하연이는 연기를 시켜도 음악만큼이나 잘해줄 겁니다.”
“말씀은 고마운데, 연기 쪽은 잘 모르겠어요. 음악만큼은 확실히 천재라는 걸 알겠지만.”
“하하. 제가 나름 이쪽 짬밥을 많이 먹었잖아요? 수많은 배우를 만났지만, 딱 보면 쟤는 뜰 것 같다. 아닐 것 같다는 감이 있어요.”
“배우님이 보시기에 하연이는 뜰 것 같나요?”
강은석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이가 이전에 나왔던 영상을 모두 보았습니다. 끼가 넘치는 아이더군요. 감정 표현도 잘하고요. 4살이지만 성인 배우가 하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전에 선종이 형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연이가 정말 감정 표현이 뛰어나고, 연기를 잘한다고.
그래도 뮤직비디오랑 드라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작품이지 않나.
드라마는 연기가 전부였다.
반면, 뮤직비디오는 음악이 메인이고 연기는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강은석은 자신이 하연이의 연기 지도를 맡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고맙습니다, 배우님. 그래도 하연이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결정할게요.”
“당연히 그래야죠. 당사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나는 강은석을 사무실 인근에 있는 한 호텔에 내려다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건 내 결혼식에 입고 온 정장과 구두가 전부였다.
‘이전 소속사 대표가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지고 해외로 도망갔다고 그랬지.’
진짜 연예계에 사기꾼이 많다더니 별 그지 같은 놈들이 많다.
“강 배우님. 조만간 집 하나 따로 얻어드릴게요. 당분간만 여기서 생활해주세요.”
“호텔비도 회사에서 내주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그런데 대표님.”
“네.”
“혹시 앞으로 대표님이 제 매니저를 해주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러게. 지금 매니저는 성식이 하나뿐인데 성식이는 하연이 매니저니까 따로 그를 전담할 매니저를 뽑아야 할 것 같다.
“조만간 새로 매니저를 채용해서 붙여드리겠습니다.”
“네. 대표님은 하시는 일도 많은데 저 하나 챙긴다고 시간 내시는 건 비효율적이겠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호텔로 올라갔다.
상황을 봐서 지금 곰도리형제단이 있는 사무실의 한 층을 전부 임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늘어나고 회사 규모는 커지는데 언제까지 하나하나 확장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나는 그길로 곧장 하연이의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내가 도착하자 유주의 이모이자 이곳의 원장인 주은영이 환한 미소로 나를 맡는다.
“아이고! 김 서방 어서 와. 유주랑 하연이 데려가려고 그러지?”
“네, 이모님.”
“여행 가서 정신없었을 텐데 내 거 선물까지 사 와줘서 고마워. 커피 잘 먹고 있네.”
“별말씀을요.”
나는 그녀에게 라오커피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녀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뭣보다 그녀는 내게 유독 미안함을 표했다.
유주에게 한국대 출신의 질 낮은 변호사를 소개한 장본인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유주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사람이었고, 정말 인생이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모를 일이다.
나는 유주와 하연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오늘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유주가 너무 잘 됐다며 소리를 지른다.
“와아아! 김수진 작가라니. 엄청 유명한 분이잖아?”
“맞아. 남윤진 감독도 그녀 못지않게 유명한 분이더라. 필로그래피를 봤더니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셨더라고.”
“대박!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거 아냐?”
유주가 하연이를 보면서 활짝 웃는다.
나 역시 하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연아. 드라마라는 거 알아?”
“웅!”
“그래. 드라마는 배우들이 나와서 연기하는 가상의 이야기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배우들이 연기라는 걸 하는 거거든.”
“우웅!”
“다행히 너의 배역이 미혼부의 자식이라는 설정이라서 아주 낯선 게 아니긴 한데. 혹시 연기라는 걸 해볼 수 있겠니?”
내 물음에 하연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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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도 연기를 해본 적이 있었다.
아니. 꽤 많았다.
본업이 가수였지만,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대중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는 가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드라마는 물론 영화까지.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연기를 해본 경험이 있다.
드라마 연기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수상한 적도 있고, 심지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적도 있다.
‘아쉽게도 내가 수상하진 못했지만, 같이 출연한 남자 배우님은 한국 남자 배우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으셨지.’
아무튼 연기는 내게 낯선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4살짜리 꼬마의 몸으로는 처음이었다.
김수진 작가와도 호흡을 맞춰본 경험은 없어 그 부분은 조금 걱정되긴 했다.
‘워낙에 쪽대본을 많이 쓰는 분으로 유명하니까.’
그래도 이건 좋은 기회였다.
올해 총 4편의 신곡을 발표했다.
핫레스트와 공동작업도 할 수 있었고, 음악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신곡을 발표하면 사람들은 또 신곡이 나왔냐며 그냥저냥 한 반응을 보이겠지.’
그러니 이참에 연기로 영역을 넓혀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음악에 전념하는 게 좋았다.
나는 각오를 가지고 아빠에게 말했다.
“나 이거어 할래요오!”
“진짜?”
“웅! 연기이 하고 시포오.”
유주 샘. 아니 이제는 엄마라고 부르자.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고, 아빠는 괜찮겠냐는 표정을 보인다.
내가 연기자는 아니니까 걱정하시는 걸 테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나 김하연. 가수 말고 배우로 전향하라는 말까지 들어본 사람이었다.
내가 출연한 작품 중에 <나의 삼촌>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최종회 시청률이 전국 기준 9.7%에 오르는 등 해당 방송국 드라마 최고 시청률 5위를 찍은 작품이었다.
그동안 가수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연기에 있어서는 저평가받아왔던 나 역시 이 작품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가수 이하연’이 아닌 ‘배우 이하연’의 팬이 되었다는 이들을 대폭 늘릴 수 있었다.
‘그래. 김하연. 넌 할 수 있어. 가수뿐 아니라 배우로도 너는 최고가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런 다짐을 하며 이번 작품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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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하연이가 연기를 한다고 하네.”
“정말? 와! 정말 잘 됐다!”
이세미는 정성수가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들이대더니 하나하나 소리 내어 기사 제목을 읊었다.
<이수진 작가 은퇴선언 깨고 드라마 복귀...강은석 배우 역시 복귀작 신고>
<이수진·강은석 복귀작에 김하연까지 출연 확정!>
<이수진 작가 복귀작 ‘환생자를 주웠습니다’, 출연배우 5명 공개>
<강은석, 이수진 작가와 손 잡는다..5년 만에 드라마 복귀>
<김하연, 음악 말고 연기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드라마 출연 선언 화제>
네티즌들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 이수진, 강은석 콤비에 김하연까지 출연한다니! 이건 못 참지!
└ 와. 강은석 죽은 거 아니었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거지?
└ 어디 외딴 섬에서 살고 왔음? 김하연 아빠 결혼식 주례도 보고 다시 사회로 복귀한지 꽤 됐음
└ 이수진 작가가 이번에는 무슨 병맛을 보여줄지 흥미진진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강은석이야 원래 S급 배우였다지만 김하연은 괜찮을까? 가수로는 모르겠지만 연기는 처음이잖아?
└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닙니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 쏟으시네
└ 근데 제목이 환생자를 주웠습니다라니. 무슨 웹소설 제목인 줄
커뮤니티 반응까지 살펴본 이세미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오빠. 이 참에 우리도 여기 후원이나 해볼까?”
“후원?”
“응. 드라마 마케팅 잘 되면 회사 이미지도 좋아지잖아?”
“난 또 뭐라고. 개인적으로 후원하자는 줄 알았네.”
“그거야 따로 하면 되지. 나는 지금도 하연이 후원 계좌로 매달 천만 원씩 입금하고 있는데?”
“지, 진짜?”
“응. 오빠는 얼마나 후원하고 있는데? 하연이 원조 팬임을 자처하고 있잖아?”
정성수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자신은 꾸준히 매달 100만 원씩의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었는데, 이는 이세미의 1/10에 불과했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이걸 어떻게 말하냐.’
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드라마 후원 참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당장 진행할까?”
“응? 그래. 호텔이나 리조트 씬 나오면 우리 그룹 호텔에서 찍자고 하면 저쪽도 좋아할 거 같아. 그치?”
“그래. 그게 좋겠네.”
정성수는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따라서 오른 만큼 하연이에게 후원할 금액을 조금 늘려야 하나. 그런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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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를 주웠습니다’의 남자 조연을 맡은 배우. 이동혁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고작 4살짜리 꼬맹이가 ‘대본 리딩(Reading) 현장’을 리딩(Leading)하고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