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104화
신병석과 주은혜는 당황의 연속이었다.
자신들에게 생긴 첫 손녀딸.
물론 유주의 피가 섞인 아이는 아니다.
하지만 첫 손주이기도 하고, 그동안 계속 같이 생활하던 사위와 헤어져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아이를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아이는 4살짜리 꼬마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지금도 보라.
아침을 차려주니까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서 척척척.
어젯밤에는 할미랑 같이 자자니까 혼자 자는 게 더 편하다면서 조용히 침대에서 잠이 들지 않았던가.
‘양치질도 혼자 하고, 세수도 혼자 하고. 못 하는 게 뭐지?’
주은혜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그동안 엄마 없이 자라 이토록 단단해진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하연이가 안쓰러운 한편, 이번 기회에 제대로 조부모의 사랑이란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큰맘 먹고 남편인 신병석을 설득하여 하연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찾았다.
하연이가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신병석이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하연이는 덤덤하달까. 별 감흥이 없어 보였고.
그녀는 신병석의 허벅지를 몰래 꼬집었다.
“아야야. 이놈의 여편네가! 무슨 짓이야!”
“저기 좀 봐요.”
“어디?”
“저기.”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하연이가 혼자 테이블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쓸쓸히 보고 있었다.
“제 아빠를 생각하는 건가?”
“그렇겠죠. 그동안 내내 붙어있었는데 이렇게 떨어진 적은 처음일 테니.”
“우리 하연이 불쌍해서 어쩌누.”
“그리고 당신은 하연이 할아버지라는 자각을 좀 가져요.”
“네가 왜?”
“얘보다 더 신났더구먼. 곧 60이 다 되어가는 양반이 뭐 하는 거예요!”
“아니 이런 곳은 정말 오랜만이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유주 어릴 적엔 가끔 놀러 왔지만, 유주가 큰 이후에는 신병석도 놀이공원엔 처음이었다.
그사이 기술이 발전한 것인지 못 보던 놀이기구도 많아졌고.
그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이가 엄청 조숙한 거 같지?”
“조숙한 정도가 아니에요. 마치 철든 어른이 앞에 앉아있는 것 같다니까. 유주보다 더 정신연령이 높은 것 같아.”
“애가 엄마 없이 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유주랑 김 서방이 없는 동안 잘 보살핍시다.”
“그래야죠. 하연아. 여기 주문한 레모네이드 나왔다.”
“고마압습니다아!”
하연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더니 가져온 레모네이드를 꿀꺽꿀꺽 마셨다.
‘이런 걸 보면 또 영락없는 4살이고.’
주은혜는 하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려는데 또 누군가가 하연이를 알아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와! 혹시 너 김하연 아니니?”
“오! 진짜 김하연이 맞네? 사인 좀 해줄 수 있겠니?”
“하연 양. 나도 사인 좀!”
여기저기서 사인을 해달라며 하연이를 귀찮게 한다. 애나 어른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만! 애가 놀라잖아요! 다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주은혜는 빼액 소리를 지르고는 하연이를 보호하려는 듯 그녀를 꼭 안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색한 얼굴로 뒤로 물러난다.
신병석이 아내를 나무랐다.
“하연이 팬들한테 왜 그래?”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우리가 여기 놀러 온 거지, 사인회 하려고 왔수?”
“그러다 악플 달릴라.”
“아무래도 여긴 안 될 거 같아요. 그냥 나갑시다.”
“잉? 여기 온 지 1시간밖에 안 됐는데?”
신병석이 아쉽다는 얼굴을 했지만 주은혜는 단호했다.
“하연이 피곤하겠어요. 어찌나 사람들이 몰리는지. 그냥 빨리 가요.”
“휴. 어쩔 수 없지. 하연아, 아쉽겠지만 지금 나가자꾸나.”
하연이는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하연이와 함께 놀이공원 밖으로 나온 뒤 하연이를 뒷좌석에 설치한 카시트에 태웠다.
유주가 떠나기 전 누누이 당부한 사항이었다.
“유주 어릴 적에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어.”
“뭐라는 거예요. 사람들 또 몰리겠다. 빨랑 해요!”
“여편네 등살 하고는. 다 했어요.”
신병석은 네비게이션에 집을 찍으려다 말고 이런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바로 집으로 가는 건 조금 그렇고. 드라이브나 합시다.”
“그래요. 그건 괜찮겠네요.”
“하연아. 할아비랑 할미랑 바다 구경할까?”
“네에.”
어쩜 이리도 예쁘게 대답을 잘 하는지.
신병석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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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다.
분명 내가 유주 샘의 친자식이 아니었던지라 더 신경을 써주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지만 자기를 이렇게나 예뻐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생에선 한 번도 조부모에게 사랑받아본 기억 따윈 없었으니까.
아비는 어린 시절 가출해서 집안과는 연을 끊고 살았다.
그래서 친가 쪽 조부모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외가 쪽 또한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나면서 외가와의 연락도 끊겼기 때문이다.
‘이런 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라는 거구나.’
그저 웃기만 해도 예쁘다고 칭찬해주시고, 손녀딸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신경 써주신다.
나는 더 이상 딱딱하게 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분들은 나, 김하연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셔. 마음을 열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드리자.’
나는 그리 마음먹고 평소 하지 않던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하라부지.”
“응. 하연아. 무슨 일이야?”
“나아 아이스크림임 먹고 시포오.”
“아이스크림? 좋지! 이 할아비가 다 사주마!”
그는 손녀딸의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인근의 카페에 들어가 내 얼굴만 한 아이스크림을 구해왔다.
“헤헤. 고맙뜹니다아!”
“아이구 내 새끼. 먹는 것도 참 복스럽지. 천천히 먹으렴. 아이스크림 갑자기 많이 먹으면 머리가 띵하고 아프거든.”
그가 갑자기 차가운 걸 먹었을 때 머리가 아픈 걸 표현이라도 하려는 듯 바보 같은 얼굴을 하기에 나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하라부지 웃겨 어어.”
“그래? 우리 하연이는 이런 걸 또 좋아하는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그는 계속해서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웃겨주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타박하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분들.
앞으로 이분들을 내 진짜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생각하고 손녀된 도리를 다해야겠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
전생에선 정말 낯선 단어였는데.
아빠가 맨날 내게 해주는 말이라 그런지 어느새 입안에 사랑한다는 표현이 붙어버렸다.
김하연으로 다시 태어난 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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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았던 4박 5일의 신혼여행이 후딱 지나갔다.
친구들은 더 길게 다녀오라고 성화였지만, 하연이도 있는데 그러기는 어려웠다.
유주 역시 하연이가 보고 싶다며 어서 돌아가자며 부산을 떠는데, 그저 감사한 일이다.
나는 유주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한 다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주야. 고마워.”
“응? 뭐가?”
“그냥 다.”
“어쭈. 우리 진형이 사랑꾼 다 되셨네?”
“나 원래 사랑꾼이었는데?”
“그래. 앞으로는 평생 그 포지션 잊지 마.”
“물론이지. 나한테는 유주 너랑 하연이밖에 없으니까.”
공항 면세점에서 지인들에게 선물할 특산품을 잔뜩 산 다음 비행기에 오르려는데 비행기 입구에 배치된 신문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신문을 하나 들어 올렸다.
유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왜? 신문 보려고?”
“유주야 여기 봐봐.”
“뭐?”
나는 1면에 표시된 큼직한 문구를 가리켰고, 유주의 눈이 점점 더 커진다.
“와! 대박!”
“그렇지? 미혼부의 출생신고를 대폭 완화하겠다니. 드디어 우리 노력이 결심을 맺었어!”
“그러게. 진짜 다행이야!”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커다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미혼부 출생신고 대폭 완화된다...‘하연이법’ 국회 본회의 통과>
내용은 이러했다.
앞으로는 친모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신고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이고 친자확인만 되더라도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한부모 가족 대잔치에서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미혼부 출생신고에 대한 발언을 해줘서 그런지 법안 통과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됐어!’
하연이 출생신고를 한다고 고생했던 일도 떠오르고. 무척이나 뿌듯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했더니.
출국장을 나오자마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우리를 반긴다.
번쩍번쩍. 눈이 아플 정도다.
“어어! 나왔다, 나왔어! 김진형 대표님! 하연이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김 대표님!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대표님! 이쪽 좀 봐주세요!”
유명 인사인 하연이와 함께 있었다면 모를까 유주랑 둘이서만 다녀왔는데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들. 미혼부의 자식 역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권과 평등권. 그리고 생존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 찰칵찰칵!
연이어 플래시가 터진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는 즉시 출생등록이 되어야 하고, 법과 제도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동안 노력해주신 정부와 정치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하하. 제가 이제 막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라서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하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김 대표님! 이번 하연이법이 만들어지는데 여당과 야당 중에 누가 더 큰 역할을 하셨다고 보십니까?”
“김 대표님! SBC 김태호 기자입니다! 이번 본회의 통과에 ‘한가족 부모 대잔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대표님!”
나는 방긋 웃으며 유주와 함께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저런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다.
‘괜한 분란만 조장하겠지. 그게 저 사람들 특기니까.’
기자인 현모에게 수 차례 교육을 받았더랬다.
너는 이미 공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스타인 하연이의 아빠이자, 한 회사의 대표.
그리고 미혼부의 상징적인 인물.
그러니 한마디 한마디를 가려서 하라고.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하연이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것뿐인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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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이후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강은석과 전속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계약서 안에는 회사의 재무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조건이 달려있었다.
강은석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는 서명란에 도장을 찍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부담스럽고. 그냥 강 배우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죠.”
그는 드디어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한 듯싶다.
이제 그와 계약도 했으니 어딘가 출연을 시켜야 할 텐데.
이쪽 일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태식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친절하게 내게 조언을 해줬다.
“내년 상반기에 방영되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강은석 배우를 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명한 작품인가요?”
“지상파는 아니고 종편 드라마인데, 요즘은 종편 시청률이 더 높으니까요. 게다가 김수진 작가의 드라마 복귀작입니다. 저도 카메오로 잠깐 출연하기로 했고요.”
“오. 김수진 작가라면 몇 년 전에 은퇴 선언을 한 유명작가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김수진 작가와 강은석 배우의 복귀작이라는 타이틀이 걸리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겠죠.”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제작진과 미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수진 작가가 나를 보자마자 이 한마디를 던졌다.
“김하연도 함께 출연시키시죠.”
뭐? 하연이는 한 번도 연기해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러니까 외주 영상이나 광고에서 아주 잠깐 연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나서 본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