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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103화 (103/135)

내 딸은 국힙원탑 103화

강은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속세를 떠난 자신에게 배우로서 다시 돌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물론.

‘결혼식 주례를 맡겨?’

강은석은 단 한 번도 결혼식 주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작 40대에 불과했고, 동료 배우들의 결혼식 주례를 보는 건 원로 배우들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도 어느새 50줄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허송세월한 5년 동안. 그렇게 늙어버린 것.

그는 내게 청첩장뿐 아니라 아이패드를 하나 놔두고 갔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만든 영상과, 그의 딸이라는 하연이. 그리고 이번에 결혼할 상대인 유주라는 여성의 영상이 담겨있다 그랬다.

어차피 산속에선 시간도 느리게 가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 차라 그는 바닥에 누워 그가 준 영상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맨 처음 나온 것은 미래 그룹의 로비를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어린 꼬마가 나와서 로비를 마음껏 돌아다니며 즐거워하는 장면이었다.

‘꼬마 주제에 제법 감정 표현이 풍부한걸?’

이건 그냥 지나가는 아이 중 한 명을 붙잡고 찍은 게 아니었다.

연기를 할 줄 아는. 그것도 무척이나 섬세한 표현을 하는 친구였다.

이어서 다양한 주제의 영상이 나왔다.

하나같이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다.

‘원래는 영상 쪽 외주를 맡아서 회사를 키웠다고 그랬지. 제법 센스가 괜찮아.’

이후에는 조금 전 방문했던 남자가 요리하는 영상. 딸아이와 잡담하는 모습. 그녀와 수영하는 모습 등이 연이어 나왔다.

어느새 강은석은 자세를 바로잡고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린아..’

자기 딸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아이였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는 그의 부인과 함께 아린이까지 앗아갔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그는 큰 부상 없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하필 사고가 난 부분이 아이가 타고 있는 뒷좌석 쪽이었다.

뒤에 타고 있던 아이와 부인은 즉사. 자신만 이렇게 속절없이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영상을 볼 수 없었다.

아이패드를 치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원패밀리’라는 자막이 달힌 뮤직비디오였다.

가족의 소중함과 따뜻함에 대한 가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자세히 봤더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맨 처음 나왔던 미래 그룹 로비 영사에 나왔던 바로 그 친구였다.

‘하연이라고 했던가? 노래를 정말 잘 부르는군.’

그는 과거 속세에 있을 때 국민가수로 추앙받으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던 한 가수를 떠올렸다.

이하연.

자신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였다.

노래도 잘 불렀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랄까. 생각들이 무척 좋았다.

어린 친구답지 않게 성숙하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는 발언들.

김하연은 마치 이하연이 환생하여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몇몇 영상들이 추가로 나왔고, 갑자기 난데없이 한 여성이 등장하더니 반주도 없이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이!”

이런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선 말이다.

그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하! 이게 뭐야 대체!”

얼마 만에 이렇게 큰 소리로 웃었을까.

그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아이패드를 껐다.

그리고는 방바닥을 뒹굴고 있던 청첩장을 들어 올렸다.

‘미친놈. 내가 주례로 오지 않으면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니.’

물론 그가 진심으로 그런 말은 한 건 아닐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남이 결혼식에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내가 이전에 출연했던 수많은 작품을 입에 줄줄 담으며 나의 오랜 팬임을 자처했다.

어느 작품에서는 뭐가 좋았고, 어느 작품에서는 뭐가 아쉬웠다는 둥.

나를 만나기 위해 따로 공부한 게 아니라 진짜로 어릴 적부터 내가 출연한 작품들을 즐겨 봤다는 증거.

회사의 모든 금액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것도 꽤나 솔깃한 이야기였다.

‘가족들을 놔두고 혼자서 도망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고.’

강은석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정장이 어디 있더라.”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지금과 같은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옷과 구두를 신고는 미친 듯이 이곳을 올랐다.

자살할 생각으로 말이다.

이왕 죽을 거. 마지막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배우답게 그리 죽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나무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차 안에 보관하고 있던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고는 정장과 구두를 고이 가방에 넣어두었다.

정장을 입고 산에서 생활하기에는 너무 불편했으니까.

어쩌면. 그때 그가 한 행동을 이를 위한 신의 안배일지도 모른다고.

강은석은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오늘 내 결혼식을 위해 방문해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식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못내 아쉬웠다.

식장 관계자가 내게 와서는 귓속말했다.

“신랑님. 어떻게 할까요? 플랜 B대로 주례 없이 진행할까요?”

내가 어쩔 수 없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 같더니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저 사람 강은석 아니야?”

“어? 정말이다. 강은석 배우야!”

“실종된 거 아니었어? 뭐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사람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한눈에 보기에도 연예인의 포스를 줄줄 풍기는 한 남자가 당당히 내 앞에 섰다.

강은석이었다.

그는 대체 어디서 저런 옷을 구했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정장과 구두로 단단히 무장한 채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무 늦었습니까?”

면도했는지 산적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지금은 잘생긴 중년 남성이 눈앞에 서 있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 맞춰서 도착하셨습니다.”

“다행이네요. 버스를 한 대 놓쳐서 그만.”

얼마나 박박 닦았는지 그가 신은 구두에선 눈이 따가울 정도로 광이 나고 있었다.

나는 식장 관계자에게 예정대로 플랜 A로 진행해달라고 말한 뒤 그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강 배우님. 아니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주례를 맡아주시기로 했으니까 선생님 맡죠. 아닌가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가 미소를 보인다.

“넉살하고는. 영상 잘 봤습니다.”

“와! 그걸 봐주셨군요?”

“어차피 산속 생활이라는 게 특별히 할 게 없는 지루함의 연속이니까. 딸 이름이 하연이라고 했소?”

“네. 맞습니다. 거기 나온 꼬마 아이가 제 딸입니다.”

“가창력이 엄청나더군. 연기를 해도 잘할 것 같고.”

“그런가요? 아직 연기 쪽은 진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호히 외쳤다.

“무조건 연기를 해야지! 이 아이는 연기를 위해 태어난 존재야.”

너무 단호해서 하마터면 사래가 걸릴 뻔 했다.

“흠흠. 그럼 선생님이 하연이의 연기 지도를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죠. 진형 씨 회사에도 들어갈 생각이니 계약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합시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조금 쉬고 싶다며 혼자 있고 싶다고 그랬다.

이내 대기실 넘어 이날 사회를 보기로 한 상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신랑 김진형 군과 신부 신유주 양의 예식을 거행할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으로 입장하셔서 앞쪽부터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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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을 만나기에 앞서! 아름다운 양가 어머님께서 화촉을 밝혀 주시겠습니다. 어머님들께서는 두 손을 꼭 잡고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가 어머님 입장!”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두 여인이 손을 맞잡고 웨딩 아일을 가로지른다.

내겐 어머니가 안 계셨던 관계로 안발렌티나 수녀님이 신랑 쪽 어머니 역할을 해주셨다.

두 분이 초에 불을 환하게 밝힌 뒤 맞절과 함께 자리로 돌아가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다음은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밋밋하게 그냥 들여보낼 순 없지 않겠습니까?”

상준이가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준비한 멘트를 날렸다.

“신랑! 춤을 추면서 입장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께선 신랑의 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야유를. 마음에 든다면 큰 함성과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후. 내 저럴 줄 알았다.

절대로 나를 쉽게 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

하지만 나는 녀석이 이렇게 나올 것을 이미 다 예상한 상태였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나는 유주가 청룡 음료 광고에서 선보인 막장 춤을 선보이며 웨딩 아일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물론 멘트도 잊지 않았다.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이!”

“우하하하! 미쳤네, 미쳤어! 신랑이 미쳤어!”

“잘한다! 멋지다아!”

사람들이 환호하며 내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상준이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런. 지금 결혼한다고 신부의 전매특허 막장 춤을 따라 하며 애교를 부리는 건가요?”

“하하.”

요즘 유주가 워낙 핫했기에 이 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흥에 겨운 몇몇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춤을 따라 한다.

내가 단상에 오르자 상준이는 내게 윙크를 찡긋 날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신랑에게 축하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 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뒤로한 채 상준이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식장을 울렸다.

“자. 하객 여러분.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뒤쪽을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랑 입장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큰 박수와 환호로 신부를 맞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주가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앞에 있었다.

‘예쁘네.’

나는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원래부터 아름다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유주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으리라.

나는 두 사람이 웨딩아일의 중간쯤 왔을 때 그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맞았다.

아버님은 아쉽다는 얼굴로 유주의 손을 내게 건넸다.

아버님. 제가 절대 유주 손에 물 묻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저만 믿어주세요!

우리는 단상에 함께 올라 맞절하였고,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하객들을 향해서도 인사를 올렸다.

따뜻한 박수가 식장을 가득 울린다.

이윽고 강은석의 주례가 시작되었다.

그는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시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지인들의 지방방송이 일제히 꺼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왜 아니겠는가. 한때는 톱배우로 이름을 날리다가 사고와 함께 어느 날 홀연히 모습을 감춘 자가 지금 주례석에 서 있으니 말이다.

그는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결혼이라는 자리는 무척이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는 탑 배우답게 우리에게 감동적이고도 훌륭한 조언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해서 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고, 서로를 사랑하세요. 우리에겐 생각보다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아마도 그는 가족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었기에. 저다지도 건강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서 축가가 진행되었다.

이태식과 아일라가 서로 자기가 축가를 부르겠다며 다투었지만, 최종적으로 낙찰된 인물은 내 딸. 하연이었다.

그녀는 나와 유주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날리더니 자신의 데뷔곡인 ‘원패밀리’를 불러주었다.

그래. 하연아. 유주야. 우린 지금부터 한 가족이다. 이 세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한 가족이라고.

나는 주먹을 꼭 쥐고는 유주와 하연이를 평생 지키겠다며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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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이를 장인 장모님에게 맡기고 나와 유주는 둘이서 신혼여행을 떠났다.

유주는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에 가고 싶어 했지만, 거긴 코로나가 터진 이후 동양인을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다기에 제외했다.

대신 우리는 동남아에 있는 한 국가로 왔다.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바로 이곳. 라오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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