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99화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천천히 스케치북을 열었다.
오늘 있을 요트 프러포즈를 대비하여 어젯밤 직접 손으로 눌러쓴 내 마음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사랑하는 유주야.
나 진형이야.
그래. 너의 남자친구 김진형.
나와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넌 이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야.
조금 뜬금없겠지만.
오늘 이렇게 내 마음을 고백할게.
나랑 결혼해 주겠니?
난 네가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야.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난 언제나 너만을 사랑해.
너의 사랑. 진형이가.
하하하. 생각해보니까 조금 쪽팔린다.
‘그래. 이걸 직접 내 입으로 말하지 않고, 스케치북에 쓴 건.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 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데.
유주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고 있다.
응? 뭐지?
너무 감격해서 저러는 건가?
그런데 유주가 스케치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으이구! 이 바보야! 너 스케치북 거꾸로 들었어!!”
뭐?
나는 깜짝 놀라 스케치북을 확인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스케치북을 거꾸로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유주가 지금 본 것은.
뒤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써진 글씨를 보았던 것.
아아악!!!
너무도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생일대의 기회에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김진형. 넌 진짜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이다.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사이.
유주가 내 손에서 스케치북을 가져가더니 다시금 한 장 한 장 열어서 내용을 살펴본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 같더니.
내게도 달려들어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어억.
무방비상태였던 나는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고, 유주가 내 위에서 눈물을 훔치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이 바보!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으윽. 유주야. 미안해. 내가 그만.”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녀는 내게 쓰러지듯 기대고는 내 입술을 훔쳤다.
으응?
뭐지? 이거 통한 건가?
아무튼 우리는 오래도록 요트 바닥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해야만 했다.
젠장. 그냥 장소를 호텔로 할 걸 그랬다.
요트 바닥에서 이게 뭐람.
#
프러포즈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유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먹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왕 식사하는 거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으니까.
상준이와 재희 씨가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와! 유주야. 너 오늘 정말 예뻐! 그 옷 어디서 산 거야?”
“재희야, 오늘 고마워. 주말인데 시간 쓰게 해서.”
“뭘. 우리도 하연이랑 함께해서 오늘 즐거웠어. 하연이는 진짜 보통 애가 아닌 것 같아. 너무 똑똑하고 예쁜 거 있지?”
유주와 재희 씨가 하연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이.
상준이가 내 팔을 끌어안으며 슬쩍 물었다.
“잘됐냐? 잘 된 거 같긴 한대.”
“그래. 덕분에 잘됐다.”
“크크. 축하한다.”
“고맙다. 그래도 너는 다음에 요트에서 프러포즈하지 마라.”
“응? 그건 왜?”
키스 주도권을 빼앗길 우려가 있으니까.
아무튼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부엌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홈쇼핑에서 싼값으로 구한 랍스터와 각종 해산물을 냉장고에서 가득 꺼내고는 해감시켜주었다.
바지락과 가리비를 찬물에 담가 이물질을 빼는 한편, 랍스터와 전복은 칫솔로 박박 긁어서 깨끗이 세척한다.
이어서 콩나물과 각종 야채도 씻으면 준비 완료.
무는 크게 썰어서 조각내준 다음 냄비에 담고 그 위에 콩나물, 양파, 버섯, 호박, 감자 등을 썰어 올려두었다.
이어서 오늘의 메인 재료인 랍스터와 각종 해산물을 투하.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물을 붓고 불을 올린 뒤 양념장을 만들 시간이었다.
하연이가 매운 걸 잘 먹는 편이었지만, 어린아이라는 걸 감안해서 고춧가루와 간장은 조금만 넣고 양념장을 만든 뒤 이를 냄비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미나리와 청양고추를 썰어서 위에 올려주면 끝!
온 집안에 시원한 해물탕 냄새가 진동한다.
냄새에 이끌린 상준이가 부엌으로 와서는 코를 킁킁거린다.
“진형아.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냐? 앗! 이거 랍스터 아냐?”
새빨갛게 익어버린 랍스터를 발견한 상준이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후. 이 정도로 놀래서야.
맛을 보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걸?
조금 심심한 것 같아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냄비 그릇을 식탁으로 옮겼다.
“자! 모두 식사 시간입니다! 여기로 오세요!”
내가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 군침을 흘리며 식탁으로 집합한다.
“와아! 라압스으터어다아!”
“진형 씨. 이게 대체 뭐에요?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랍스터 해물탕인데 어서 드셔 보세요. 만족하실 겁니다.”
내가 했지만, 진심 맛있다.
얼큰하고 바다향이 가득 살아있는 게, 입안에 바다를 한 모금 머금은 것만 같다.
하연이를 비롯해서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내가 차린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재희 씨가 내게 말했다.
“진형 씨. 축하드려요. 유주한테 이야기 다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재희 씨.”
“후후. 그런데 스케치북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나는 상준이를 슬쩍 쳐다보았고 상준이가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 왜 러브 액츄얼리 보면 주인공이 여주한테 스케치북으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잖아? 내가 한번 해보라곤 했지만 진짜로 했을 줄은 몰랐네.”
“으흠. 자기야. 나한테는 다른 걸로 해줄 거지?”
“어어. 무, 물론이지.”
상준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마치 내가 하려던 아이템이었는데 왜 네가 먼저 해서 일을 망치냐는 듯한 표정.
이 자식 웃긴 놈일세. 반드시 이걸 해야만 한다며 나를 협박할 땐 언제고.
아무튼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는 하연이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연아.”
“웅!”
“아빠 말이야. 조만간 유주 선생님하고 결혼할 거야.”
“와아!! 잘 됐다아아!!”
하연이가 숟가락을 놓고선 물개박수를 쳐주었다.
물론 유주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저번에 유주네 집에 들렀을 때 분위기로 보건대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아쉽지만 우리 쪽 부모님은 안 계시니까 유주네 부모님 허락만 얻으면 되겠지.’
그래도 하늘에 계신 엄마와 아빠. 그리고 외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하시겠지.
나는 조만간 그들의 산소를 찾아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성대한 만찬이 끝나고 우린 이후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나와 유주의 이야기. 그리고 상준이와 재희 씨의 이야기. 하연이의 이야기까지 곁들이며 그야말로 끝날 것 같지 않던 서울의 밤이 깊어갔다.
#
그 시각.
서울에는 또 다른 커플이 탄생하고 있었다.
한신 그룹의 막내딸. 이세미가 정성수에게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정 차장님. 내일부터 부장 다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정성수가 얼빠진 얼굴로 이세미를 돌아보았다.
차장 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부장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세미는 거침이 없었다.
“제 측근이 겨우 차장이라고 하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아빠한테 졸라서 승진시켜달라고 했어요.”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가씨라는 말. 그만하면 안 돼요?”
“이제는 한신 그룹 호텔&리조트 대표가 되셨으니까요. 그럼 아가씨라는 호칭 대신 대표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아 좀!”
이세미는 역정을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세미야. 하고.”
“아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세미라고 불러주실 건데요?”
“네?”
이세미는 그를 흘깃 보더니 작심한 듯 이런 말을 꺼냈다.
“정성수 씨.”
“네네.”
“저랑 사귀어요.”
“푸흡! 네에?”
정성수는 하마터면 입 안에 있던 음식을 허공으로 흩뿌릴 뻔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녀와 단둘이 저녁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그것도 한신 호텔 꼭대기에 위치한 VVIP 룸에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부장 승진에 이어 나랑 사귀자고?
정성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 정도로 그만해주세요.”
“농담 아닌데요.”
“아가씨!”
“아가씨가 아니라 세미야!”
하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투정을 부렸다.
제발 자기를 상사가 아닌. 여자로 인정해주라는 것처럼 말이다.
“전 성수 씨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요. 능력 있지, 똑똑하지,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하지. 성수 씨만큼 제 단짝에 어울리는 인물도 없단 말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이도 이제 곧 마흔이 될 터. 아가씨와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이 차이 같은 게 중요한가요? 성수 씨 의외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네요?”
“맞습니다. 전 고지식하고 옛날 사람입니다. 아가씨에게는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죠.”
그러자 이세미가 그의 옆으로 바짝 의자를 당기며 밀착했다.
“으흠. 성수 씨는 제가 싫나요?”
“그, 그만하십시오. 아가씨. 이러다가 회장님에게 들키면 저는 그대로 모가집니다!”
“아빠요? 아빠는 성수 씨가 꽤나 마음에 든 눈치던데.”
“네?”
“성수 씨 소원이 한신 그룹 사장이라면서요. 그 소원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가씨?”
“저랑 사귀어요. 그래서 결혼까지 가면 더 좋고요. 제가 회장 자리에 오르면 사장이 뭐예요. 부회장 정도 드릴게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란 말인가.
물론 한신 그룹 사장은 정성수의 원대한 꿈이었다.
이 회사에 입사하고부터 줄곧. 사장 자리만 노리고 달려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회장이라니.
계열사 사장 따위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헤에. 왜요?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아가씨는 제가 너무 과분한 사람입니다. 띠동갑 차이인데 만약 아가씨랑 사귀게 된다면. 과연 그 후폭풍을 아가씨는 견디실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뭐야. 성수 씨 생각보다 간이 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
“적당히 간이 작아야 조직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으니까요.”
“흥. 한마디도 안 지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떤?”
정성수의 물음에 이세미는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
“저랑 한 번 사귀어보고 그다음에 결정해요.”
“네?”
“그러니까 계약 연애를 하자. 이 말이에요. 한번 사귀어봤는데 그때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땐 마음대로 하세요.”
“아, 아가씨?”
“아 좀! 그 아가씨라는 말 좀 어떻게 안 되나요? 진짜 듣기 싫다 정말.”
정성수는 눈앞이 노래져 보였다.
설마하니 이세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을 줄이야.
한때는 김진형과 그녀를 엮어보려던 생각을 하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아니라 나였어?’
정성수는 고심 끝에 결국 이세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세미의 눈 밖에 난다면 결국 한신 그룹에서 오래 버틸 순 없을 것이다.
자신이 모시는 상사이자 재벌가의 일원이지 않던가.
게다가.
그녀를 상사가 아닌 여자로 보니까 그녀는 제법 미인이었다.
똑똑하고, 일 잘하고, 어린데다가 예쁘기까지.
거기에 야망 넘치는 한신가의 막내딸이라는 신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분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 일단 그녀의 말처럼 사귀어 보고. 그다음에 결정하자.’
혹여나 이 일로 자신이 한신 그룹에서 잘리더라도.
적어도 재벌가의 막내딸과 사귀어봤다는 경험은 남지 않겠나.
정성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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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7월 말이 다가왔다.
어린이집은 삼일간의 방학에 돌입하였고, 나와 유주. 그리고 하연이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풀빌라로 이동했다.
창문 넘어 바로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사시사철 따듯한 물이 있는 수영장이 거실 바로 옆에 위치한 숙소.
유주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자랑스레 말했다.
“어때? 하연이는 아직 어리니까 바다는 조금 위험하잖아? 바다가 보이지만 물놀이는 숙소에서 할 수 있고. 괜찮지?”
그러게. 하연이도 좋은지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물놀이에 빠져있다.
그럼. 나도 어디 한번 물놀이를 즐겨볼까나.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유주가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어이어이. 자넨 아직 할 일이 남았을 텐데?”
유자가 입구 쪽에 가득 쌓인 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저걸 또 언제 다 치워.
나는 눈물을 머금고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만 끝나봐라. 종일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만 할 거다!
나는 차 트렁크에서 아직 내리지 못한 짐을 빼다가 강성식을 만났다.
녀석도 두 팔 가득 짐을 들고 있는 게 나와 마찬가지인 사정으로 보엿다.
“사장님..”
“성식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