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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98화 (98/135)

내 딸은 국힙원탑 98화

아빠가 드디어 각오를 다졌나 보다.

정신없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겠는가.

“하연아. 하연이는 유주 선생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혹시 유주 선생님이 하연이 엄마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 해본 적 있니?”

“쪼아요! 나안 유주 샘이 세상에서어 아빠아 다음으로오 제이일 쪼아! 유주 새미 하여니 엄마가아 되어쭈며언. 정마알 조켔어어.”

너무 즉답했나?

아빠가 당황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말할 걸 그랬다.

그래도 상대가 유주 샘이라면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사귈 수 있었던 건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 않나.

‘그럼 아빠도 안정감이 들 테고, 나도 좀 덜 심심해질 테지.’

전생의 나 역시 엄마 없이 자랐기 때문에 엄마란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아빠란 존재가 달라지면 이렇게나 삶의 질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감한 나.

여기에 좋은 엄마까지 추가된다면 얼마나 더 행복해질지 모르겠다.

벌써 흐뭇한 상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사실 전생엔 20대 초반에 자신을 나의 친모라고 소개한 여성을 만나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아비 몰래 내게 연락하고선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카페에서 나를 만났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분명 40대 중반이나 되었을 터인데.

실제로 본 그녀는 60세가 넘은 할머니 같았다.

검게 탄 피부. 쭈글쭈글한 손. 주름이 가득 잡힌 이마. 뭣보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머리는 새하얀 흰머리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좀 많이 늙어 보이지?”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골에서 일하다 보니까 또래보다 많이 늙어 보인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딸인 내가 이렇게나 유명한 사람이 될 줄 알았더라면. 절대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을 거라며.

그리고는 하는 말이 결국 이거였다.

“하연아. 엄마가 지금 좀 형편이 많이 안 좋아.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겠니?”

그렇다. 결국 돈을 달라 이거였다.

아비도 나의 것을 멋대로 빼앗아 가더니.

나를 버리고 도망친 어미마저 20년 만에 나를 만나고선 한다는 말이 돈을 달라는 말.

나는 부모에 대한 지독한 염증과 함께 혐오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는 다시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로 내게 어미란 존재는 아비보다 더 밉고, 싫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엄마란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그 어떠한 기대감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빠를 보라.

전생의 아비와 그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나는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다우며, 살만한 곳이라는 걸 배울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니 그처럼 좋은 사람이 나의 엄마가 되어준다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빠가 하루빨리 유주 샘을 새엄마로 맞이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

나는 하연이를 유주에게 부탁하고는 노량진에 위치한 한 횟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산물 도매시장 안에 있는 횟집이 아니라 동작구청 쪽으로 조금 더 위로 올라간 곳에 있는 그야말로 동네 횟집 말이다.

여긴 현모네 집 근처인데, 현모 말로는 가성비가 무척이나 뛰어난 집이라고 그랬다. 수산물 시장에 가면 눈탱이나 맞는다며.

아무튼 나는 세 얼간이를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뭐? 유주한테 프러포즈하겠다고?”

현모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하긴. 사귀겠다고 밝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프러포즈하냐는 의미겠지.

나도 안다. 우리의 진도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을.

그래도 나 역시 유주를 원하고, 유주 역시 나를 원하고 있다.

하연이도 유주가 좋다고 그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도 있지 않나. 유주와 결혼한다면 내 삶도 더 안정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하연이 정서에도 그게 훨씬 더 좋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상준이 녀석이 엉큼한 얼굴을 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던진다.

“크크. 뭐야 너희. 혹시 혼수라도 마련된 거야?”

“혼수? 그게 무슨 뜻이야. 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다니까.”

“혼수 중에 제일이 아기라고 하더라. 임신했냐? 이거야.”

“뭐, 뭐?”

이 미친 자식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녀와 다시 사귀기로 한 게 고작 한 달 전이다.

어라? 그럼 충분히 그럴 수 있나?

분명 관계 후 2주일이 지나면 테스트를 할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얼빠진 얼굴을 하자 다들 나를 몰아붙인다.

“요거요거 요 녀석 보게. 표정이 확실한데?”

“아, 아냐! 이놈들아!”

“얼굴이 뻘게진 게 현장범일세. 잡았다 요놈!”

“아니라니까!”

내가 빼액 소리를 지르자 녀석들이 웃는다.

성현이가 내게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래서. 결혼 일자는 잡았고?”

“설레발 좀 치지 마. 프러포즈도 안 했는데.”

“그럼 오늘 왜 모이자고 한 거야?”

“어떻게 하면 유주한테 멋진 프러포즈를 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 좀 모아보려고 그랬지.”

덜떨어진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고민하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

현모는 팔짱을 끼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으흠. 프러포즈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뭘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촛불로 길을 만들고 후식으로 먹는 케이크에 숨겨서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주지 않나?”

아니 이 자식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상준이는 한 수 더 뜬다.

“사람 많은 야구경기장 같은 곳에서 공개 청혼하는 건 어때? 너 마침 한신 구단이랑 아는 사이니까 부탁하면 빵빵하게 이벤트를 개최해줄 것 같은데 말이지.”

아서라.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프러포즈 1위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청혼하는 거니까.

그나마 성현이가 제일 그럴싸한 이야기를 했다.

“하연이는 우리한테 맡기고 둘만 여행을 다녀와 봐.”

“여행?”

“응. 그래서 그날 저녁 근사하게 차린 저녁을 먹으며 고백하는 거지.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현모랑 상준이는 그게 무슨 프러포즈냐며 야유를 보낸다.

“우~ 그게 뭐야. 재미없게.”

“맞아. 주변에 사람들도 좀 있고, 이왕 하는 거 멋들어지게 해야지.”

현모가 왜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는지. 그리고 상준이는 이제야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 것들한테 조언을 받겠다고 나오다니. 어리석었어.”

“뭐?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우리를 모욕하다니!”

“어이. 김지녕이. 장가가기 전에 죽도로 맞고 싶다 이 말이지?”

아무튼 우리는 모둠회와 함께 계속해서 술을 퍼마셨다.

역시 알코올이 공급되자 조금씩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회사 선배가 했던 방법인데, 한강에 가면 요트를 빌릴 수 있다더라. 선상에서 세일링을 즐기다가 선착장에 돌아와 프러포즈하는 거지. 괜찮지 않아?”

“높은 곳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고백하는 것도 방법이야. 왜 그렇잖아? 엄청 높은 고층 빌딩에서 멋진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마음이 더 설레는 거.”

“영화관에서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 호텔처럼 안락한 스위트 룸이 설치된 곳이 있는데 이런 곳이라면 분위기도 훨씬 더 좋지 않겠어? 아니면 진짜로 그냥 고급 호텔에서 하던가.”

짜식들. 이제야 내가 원하는 답변이 하나둘 나오는군.

언젠가 기사에서 봤는데 여자들은 공개적인 장소보다는 둘만의 공간에서 진심을 담아 프러포즈하는 걸 더 선호한다고 그랬다.

그러니까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조용히 속삭여주길 기대한다는 것.

하지만 호텔은 하연이도 있는데 조금 그렇고, 요트를 빌려 프러포즈를 하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결정했어! 유주에게는 물 위에서 멋진 프러포즈를 하겠다!

벌써 유주에게 청혼할 생각을 하니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저기 유주야.”

“응.”

“이번 주말에 나랑 한강 데이트 어때?”

“한강 데이트?”

“응. 너랑 예전에 사귈 때도 한강 둔덕에서 치킨만 먹었지 배를 탄 적은 없었잖아.”

“배? 왜? 유람선 타자고?”

하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유람선은 됐고. 요트를 타는 거지.”

“요트?”

“다른 사람은 없고 우리 둘만 탈 수 있어서 방해받을 일도 없거든.”

오호라. 진형이가 드디어 내게 청혼하려고 하는구나!

당장이라도 펄쩍 뛰고 야호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애써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는 시선을 돌린 채 넌지시 말했다.

“으흐흠. 어떨까나.”

“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거 너무 비싼 거 아냐?”

“괜찮아! 내가 너한테 프..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별로 안 비싸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하. 이렇게 애원하는 진형이라니. 너무 귀엽고 깜찍하다.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너무 그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예쓰!! 좋아 좋아. 자세한 시간이랑 장소는 따로 톡으로 줄게!”

며칠 뒤.

상준 씨와 재희 커플에게 하연이를 맡기고 나온 진형이가 어디서 나 몰래 옷을 샀는지.

평소 잘 입지도 않던 정장 차림으로 약속 장소인 선착장에서 나를 맞았다.

“와! 유주야! 옷 진짜 이쁘다아!”

“그러는 너야말로 오늘 제법이다? 옷 새로 산 거야?”

“아 이거? 나도 가끔은 외부 미팅도 해야 하고, 이제는 회사 대표니까 이런 옷도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히히. 말은 잘한다. 오늘 나한테 잘 보이려고 차려입은 거 다 아는데.

하긴. 나 역시 오늘 입고 나온 옷은 이번에 새로 산 옷이었다.

이걸 사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저축한 돈을 털털 털어가며 신경 좀 썼지.

진형이는 여전히 내 옷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주야. 진심 공주 같아.”

“뭐, 뭐야. 부끄럽게. 그만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은 좋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나.

앞으로는 너무 캐주얼하게만 입고 다니지 말고 가끔은 이렇게 좀 꾸미고 다녀야겠단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있는 한강 주변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마치 지금의 내 심정 같다.

은은한 주황빛으로 물든 강물과 구름.

우리를 태운 요트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물살을 갈랐다.

한강에 이렇게 멋진 고급 요트가 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동안 너무 세상사에 무심했나 싶기도 하고.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부터 시작해서 헤어졌던 순간. 그리고 다시 내가 고백해서 연인이 된 지금까지.

알고 보니 진형이는 자격지심으로 나와 헤어졌다고 한다.

자기는 1년 동안 취업도 못하고 백수로 있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 나를 보기 너무 부끄러웠다면서.

‘뭐야. 겨우 그런 걸로 연락을 끊었던 거였어?’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오늘은 그가 나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니까 참도록 하자.

그 역시 나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있었다니깐 말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참지만. 두 번다신 그따위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마렴, 진형아.’

40여 분을 그렇게 둘이서 한강을 즐기다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요트 위에서 타이타닉 포즈라도 취해야 하나 고민했더니 벌써 세일링이 끝난 것이다.

‘뭐야? 여기서 고백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다.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데려가 깜짝 고백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형이가 내 손을 잡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진형이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더니 요트 아래에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핑크빛 풍선과 LED가 반짝이는 꽃들로 장식된 그곳은 무척이나 아늑하고 러블리한 공간이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나를 앉힌 진형이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스케치북을 가져와서는 내 앞으로 들이민다.

어? 진형아. 너 설마 그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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