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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97화 (97/135)

내 딸은 국힙원탑 97화

처음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내가 그녀의 얼굴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분명 내가 아는 이혜미가 아니었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안발렌티나 수녀님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이쪽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무거운 얼굴로 입을 뗐다.

“저기 수녀님. 이분은 제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네? 정말로요? 이분 성함이 이혜미가 맞고,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 이름도 김진형이라고 하던걸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 이름이 같고,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남자에게 버리고 간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이게 정말이라면 지나친 운명의 장난이었다.

이혜미는 내가 자신이 아는 김진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아니면 실망했는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이게 뭐람.”

그건 내가 할 소리였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했습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한번 들어나 봅시다. 대체 왜 얘를 버리고 도망간 거예요?”

궁금했다. 내가 아는 이혜미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왜 자기 멋대로 아이를 남자친구에게 맡기고 도망쳤는지. 그녀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말이다.

그녀는 괴로운 얼굴을 하더니 천천히 사정이 설명했다.

“두려웠어요.”

“뭐가요?”

“제가. 감히 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런 의구심이 강하게 솟구쳤거든요.”

자격? 이미 아이를 낳은 그 순간 자동으로 엄마가 된다.

그건 자격증을 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뭐가 됐든. 그러면 안 되죠. 그건 아닙니다. 진짜.”

“흐흑. 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땐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애를 버리고 혼자서 도망갔습니까?”

내가 책망하듯 말하자 그녀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사정은 이러했다.

생각지도 않은 임신이었단다.

하지만 자기는 고아여서 주변에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없는 데다, 애를 키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고.

하지만 남자친구는 그나마 가정형편이 좋고, 아이를 잘 키울 것 같아서. 그래서 맡겼단다. 보육원에 보내는 것보다는 그래도 친아빠에게 보내는 게 애한테는 더 나을 테니 말이다.

처음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무슨 자격으로? 내가 돌아가면 남자친구와 그의 부모님은 나를 반가워할까?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 여자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그래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그랬다.

그녀는 고아였기에 한 번도 제대로 사랑다운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당시에는 제대로 판단할 정신도. 주변의 도움도 없었다며 울먹거리며 내게 두 손을 빌었다.

손의 주름이 없어질 정도로 싹싹.

잘못했노라고. 자기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라며 말이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우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아이를 찾을 생각은 있는 겁니까?”

“네. 그래서 이렇게 염치없게도. 이 자리에 온 거고요.”

“아이를 보면 뭐라고 하실 건가요?”

“엄마가 미안하다고.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그리..”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반성하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냉혈한은 아니었으니까.

#

오늘따라 아빠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그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말없이 나를 꼬옥 안아주는 그.

“아빠아. 오느을 무슨이일 있었쪄?”

“아냐. 하연아. 아빤 괜찮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치잇! 아빠가 슬프면. 나도 슬프단 말이에요.

도대체 아빠가 무슨 일로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슬픈 얼굴의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나는 유주 샘에게 다가가 작전을 설명했다.

“선생니임.”

“응. 하연아.”

“아빠아 기부니 안 조은 거엇 가튼데. 우리이 함께에 춤 춰요오.”

“춤을 추자고?”

“네에! 아빠야 기부은 풀리게에.”

“아하! 이해했어. 그럼 어떤 춤 출까?”

아무래도 그의 기분이 풀리려면 멋진 춤보다는 막장 춤이 낫지 않겠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춤.

그리고 거기에 딱 맞는 춤이 있었다.

“선생니임 이본에 광고오 찍은 거어.”

“그래!”

그녀는 흔쾌히 내 의견에 동조해주었고, 우리는 내 방에서 잠깐 연습하고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아빠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치 오늘 연인과 헤어진 사람처럼. 소파 위에 축 널브러진 모습.

이런 건 내가 아는 아빠가 아니었다.

내가 유주 샘에게 신호를 주자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덩실덩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이!”

이런 멘트와 함께 말이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아빠를 위해서라면 모든 지 할 수 있는 나였다.

나 역시 광고 멘트와 함께 손발을 흐느적거리며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과즈읍만따앙! 오레인지 탄산수우! 오롼지이이!!”

아빠는 나와 유주 샘의 춤을 보더니 처음에는 황당한 얼굴을 보였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냐면서.

하지만 점점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오르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그만해, 두 사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지 않나.

나와 유주 샘은 혼신을 다해 반복해서 춤을 췄고, 아빠를 웃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빠는 포복절도. 땅을 치며 웃어댔다.

다행이다. 아빠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 10여 분을 계속해서 춤을 췄다.

아빠가 제발 그만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

나는 곤히 자는 하연이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쁜 내 새끼.

어떻게 이렇게도 착하고 예쁠 수 있을까.

아빠 기분이 안 좋은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어떻게든 웃기려고 막춤도 다 추고.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한 다음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유주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물었다.

“하연이는 자?”

“응. 오늘 고맙다, 유주야.”

“뭘. 하연이가 아빠 기분이 안 좋은 걸 눈치챘는지 내게 같이 추자고 먼저 제안했어.”

“그런 거였어? 부끄럽네.”

“부끄럽긴 뭘. 그런데 이제 말해봐.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언짢아 보이더라. 무슨 일 있었어?”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유주는 슬픈 얼굴을 하고서는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랬구나. 고생했어.”

“아냐. 집에 와서까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니. 아빠 실격이네.”

“아냐.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기분이 편치 못했을 거야.”

이후 유주는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

“진형아. 하연이한테 엄마가 있으면 좋겠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 하연이도 이제 4살이야. 사리 분별도 할 줄 알고,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됐어. 지금까지 우리 둘이서 잘 살아왔어. 엄마는 무슨.”

하지만 그녀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하연이 혼자서 목욕한다며. 그게 말이 돼? 4살짜리 꼬맹이가 혼자서 목욕한다는 게? 그러다 갑자기 미끄러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애가 절대로 나랑 같이 목욕하는 건 싫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유주는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건 네 여자친구로서의 의견이 아니라 하연이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으로서의 생각이야.”

“으응.”

“나는. 하연이에게 엄마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꼭 목욕뿐만이 아니라 아빠는 해줄 수 없는걸. 엄마는 해줄 수 있거든.”

“그게 뭔데?”

“예를 들어 고민 상담을 해준다거나 같이 수다를 떤다거나. 물론 네가 충분히 잘해주고 있겠지만, 엄마랑 아빠는 기본적으로 해줄 수 있는 역할이 달라.”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유주 말이 맞았다.

내가 남자치고는 섬세한 편이라지만 그렇다고 여자는 아니니까.

분명 같은 여자이기에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체 누가 하연이의 엄마가 되어준단 말인가.

21세기라지만 여전히 고루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 딸린 미혼부를 좋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주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있어!”

“뭐?”

“아니 나니까 그럴 수 있어. 나보다 더 하연이를 잘 알고,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없잖아?”

“유주야. 너?”

나는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유주는 각오를 굳힌 듯 보였다.

“너랑 하연이만 괜찮다면. 내가 하연이의 엄마가 되어줄게. 그리고 나.”

“응?”

유주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응?”

커억.

하연이 말고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여자가 내게 또 있을 줄이야.

이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유주가 내게 청혼해 오다니.

다시 사귀자는 말도 그녀가 내게 먼저 했었는데.

아무리 남자와 여자의 관념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돼!”

“응? 나로는 부족하단 말이야?”

“아니. 네가 먼저 말하면 안 된다고.”

“그게 무슨?”

유주가 당황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는 그녀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유주야. 네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남자친구로서 미안하다, 정말.”

“아, 아냐. 갑자기 왜 이래?”

“오늘 바로 답을 해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하지만 하연이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니깐.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응?”

“내가 어떻게든 하연이를 설득할 테니까. 하연이가 좋다고 하면 곧바로 내가 너한테 프러포즈할게. 이건 진심이야.”

“진형아!”

그녀는 깜짝 놀랐다는 듯 양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유주 말이 맞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고, 그건 하연이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하연이를 돌보고, 회사를 키운다고 외면하고 있었을 뿐.

모른 척한다고 실존하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하연이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

상대가 유주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것이다.

#

다음 날.

하연이에게 유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나 흔쾌했다.

“쪼아요! 나안 유주 샘이 세상에서어 아빠아 다음으로오 제이일 쪼아! 유주 새미 하여니 엄마가아 되어쭈며언. 정마알 조켔어어.”

아니. 하연아. 정말 괜찮겠어?

너 한 번도 나한테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 한 적 없잖아?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되면 당장 유주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준비해둔 게 하나도 없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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