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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96화 (96/135)

내 딸은 국힙원탑 96화

청룡 음료가 보내준 스토리보드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1. 신유주는 반주 없이 자기가 추고 싶은 대로 춤을 춘다.

2. 춤을 추는 와중에 이번에 홍보할 음료수인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를 외치며 춘다.

3. 오롼쥐를 마시며 황홀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4. 마지막으로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라는 대사를 별도로 녹음한다. 최대한 밝고, 경쾌하게.

정말로 저게 다였다.

일종의 병맛 광고인데 유주는 생각이 달랐다.

“진심으로 춰야겠지? TV 광고니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수준이 있을 텐데 말야.”

“어어. 그, 그렇지.”

“반주 없이 추라니까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유주의 촬영은 시종일관 웃음 참기 대회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촬영감독을 위시한 스태프들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선 촬영에 임해야 했다.

유주는 오징어같이 팔과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국적 불명의 춤을 추었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이!”

그 모습이 충격적이면서도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결국 나는 도중에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야만 했다.

너무 배가 아파서. 도저히 이 이상 지켜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주는 차츰 적응되었던지, 어느새 불안하고 어색해하던 얼굴에서 이제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음료를 마시며 황홀한 표정을 지을 때는 카메라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나름 새침함을 표현했다.

아무튼 촬영은 그렇게 두어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촬영감독도 이 이상 그녀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는 말과 함께.

온몸이 땀으로 절어진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유주야. 수고 많았어.”

“응. 진형아. 나 진짜 최선을 다해 췄어! 어땠어? 보기에 괜찮았어?”

“으응.”

“뭔 대답이 그래? 진짜로?”

나는 대답 대신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주말이기도 하고, 촬영도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나는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하연이는 어디 있냐고?

강성식과 그의 동생들과 함께 집에서 놀고 있었다.

하연이에게 차마 유주의 촬영 장면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성식은 자기만 믿으라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말했다.

믿음직한 녀석 같으니라고.

유주는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이날 촬영에 썼던지 주문한 메밀소바를 단숨에 먹고는 내가 먹고 있는 그릇까지 넘봤다.

딱히 식욕이 없었으므로 그녀에게 남은 메밀소바 그릇을 넘겼다.

“고마워!”

그녀는 이 한마디와 함께 단숨에 내 메밀소바를 먹어 치웠다.

춤추는 영상만 올리면 질릴 수도 있을 테니까 다음번에는 유주에게 먹방을 권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그녀가 먹음직스럽게 식사하는 걸 지켜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유주야.”

“응.”

“너 방송인 된 거 후회 안 해?”

“뭐?”

그녀가 먹던 면을 도중에 끊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을 하고선.

“아니 너는 본업이 따로 있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부업으로 유튜브 한 거. 괜찮냐고.”

“아. 난 또 뭐라고. 난 좋아.”

“그래?”

“응. 덕분에 이렇게 CF 광고도 찍어보고. 돈도 벌 수 있고.”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유주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냥.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걸 하는지 궁금해서.”

“으흠. 그러게. 나도 무슨 마음인 걸까?”

유주가 진지한 얼굴로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

사실 신유주는 딱히 유튜버가 되어야겠다는 강한 동기는 없었다.

그러다가 자기 제자인 하연이와 전 남자친구였던 김진형이 유튜버를 한다고 하니까 신기했던 것뿐.

하지만 정작 김진형의 제안으로 유튜브를 직접 해보니까 마음이 달라졌다.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해야 하나 무언가 자기 내면에 있는 에너지를 완벽하게 발산할 통로를 찾았다고 해야 할까.

춤을 추고 나면 개운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댓글을 달면서 좋아해 주는 걸 보면 흥이 났다.

어린이집 선생님이란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이었다.

온종일 여러 명의 아이를 동시에 봐야만 하고, 학부모와 트러블을 겪는 일도 종종 있었다.

왜 우리 애에게 더 신경을 써주지 않았나요, 왜 우리 애가 다쳤나요, 오늘은 조금 늦게 갈게요, 일찍 갈게요, 애를 조금만 더 봐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애가 요즘 왜 이럴까요?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오늘 상담 좀 부탁드립니다. 등등.

천성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시간을 버틸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 조금 달라졌다.

어디에도 풀지 못했던 억울함과 힘겨움이. 춤을 추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가 유튜버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이자 유튜버라는 사실이 당당하고 뿌듯해.’

게다가 자기 옆에는 김진형이라는 든든한 남자친구 겸 소속사 대표. 그리고 하연이라는 귀엽고 대단한 선배 유튜버도 있지 않나.

오늘도 그랬다. 이렇게 자기 옆에서 에스코트도 해주고 단둘이 데이트할 시간도 나고.

신유주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생활에 무척 만족해. 스트레스도 풀리고, 춤을 출 땐 정말 행복하거든.”

“그래?”

진형이가 의외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 설마 내가 부끄러워?”

“뭐? 내가 널 왜 부끄러워해!”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체통도 없이 춤을 추잖아. 안 부끄러워?”

“네가 부끄러웠으면 애초에 너한테 유튜버를 권하지도 않았겠지. 곰도리형제단에 영입하려고도 안 했을 테고.”

“그치? 그러니까 나는 지금이 좋아.”

내가 웃자 진형이도 따라 웃었다.

좋아진 분위기를 틈타 나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우리 어린이집 7월 말에 방학인 건 알고 있지?”

“응. 그런데 원래 어린이집 방학은 유치원과 다르게 불법이라고 하던데. 괜찮은 거야?”

“아. 그거? 문제없어. 보육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으면 임시로 대체 교사를 채용하니까.”

“그렇구나.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너 저번에 너희 발리 가서는 바다는 못 봤지?”

진형이와 하연이의 브이로그를 확인해보면 신기하게도 바다가 나오지 않았다.

울창한 밀림 속 리조트에서만 생활한 두 사람.

진형이가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어떻게 바다에 갈 생각을 못 했을까?”

“그건 리조트 소개 목적으로 갔으니까 너도 깜빡했겠지. 숙소 위치도 바닷가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며?”

“응. 생각해보니까 바다를 못 간 건 아쉽네.”

“그럼 이번에는 나랑 같이 바다에 가보는 건 어때?”

“너랑? 둘이서?”

어이구.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물론 둘이서만 가면 나도 좋지만, 그럼 하연이가 서운할 것이다.

하연이에겐 아빠인 김진형이 자신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요즘은 내 앞에서 대놓고 부녀지간의 애정을 과시하며, 은근히 나를 경계하지 않던가.

그러니 가더라도 다 같이 가야 한다.

“아니. 하연이랑 셋이 다 함께.”

“아. 그거 괜찮네.”

“그렇지? 그럼 약속한 거다. 셋이 다 함께 올여름에 바다에 가는 거!”

“오케이! 장소는 네가 한번 생각해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 창을 여러 개 동시에 켜놓은 다음 어디로 놀러 가면 좋을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제주도? 거긴 너무 흔하고.

아예 해외로? 그러자니 방학이라고 해봤자 겨우 3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비행기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너무 짧을 것 같고.

뭐가 좋을까? 나는 잡아먹을 것처럼 모니터를 노려보고는 검색에 검색을 더했다.

#

‘한부모 가족 대잔치’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 사용 허가신청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행사 취지도 좋고, 하연이가 출연 가수로 내정되었다고 써냈더니 거기서 좋은 점수를 얻은 듯싶다.

행사는 각종 레크리에이션과 축하공연. 그리고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상담실 운영으로 이루어졌다.

상준이가 법률상담을 맡아주었고, 현모는 어려운 사연을 들어 기사화를. 그리고 성현이는 감사하게도 보라매병원 의사들과 함께 나와서 의료봉사를 해주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무료다.

‘이제 사회자만 정해지면 될 것 같은데.’

물론 행사 주최자인 내가 사회를 맡아서 해도 되겠지만 이왕 광화문 광장처럼 큰 곳에서 하니까 유명한 사람이 맡아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유주에게 눈이 갔다.

최근에 유주가 찍은 CF 광고가 전파를 타고 나갔는데, 이게 반응이 대박이었거든.

└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쳤다! 미쳤어!!

└ ㅋㅋㅋ 내 이럴 줄 알았다! 유주 언니 언젠가 뜰 줄 알았다니깐! 파이팅♥

└ 매력 터진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얘 누구임? 누군데 이렇게 내 가슴을 설레게 하냐

└ 신유주라고 하연이 어린이집 담임 선생임

└ 하연이? 국민아기 하연이???

└ 맞음. 하연이 주변에는 다 끼 넘치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음. 하연이 아빠도 장난 아니잖아?

└ 대박!!! 어쩐지 하연이가 아이치고는 끼가 많은 것 같더니

└ 과즙 만땅! 오렌지 탄산수! 오롼지이!(중략)입안에서 오롼지가 퐈아아앜앜ㅋㅋ

└ 아 미친 오롼쥐 춤 왤케 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ㅌㅋㅋㅋㅋㅋㅋㅌㅌㅋㅋㅋ

이러니 유주도 이제 반 연예인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인지도가 높을 때 사회를 맡아서 진행하면 사람들도 좋아해 주겠지.

유주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유주도 좋단다.

행사 취지도 좋고, 이런 자리라면 언제든지 무료로 봉사하겠다면서 말이다.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에게 사랑을>의 안발렌티나 수녀님도 내 계획을 듣고서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며, 자기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 저희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 주세요. 이런 행사를 기획하시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도와드렸을 텐데.

“아닙니다, 수녀님. 마음만으로도 감사하네요.”

- 그런데 진형 씨.

“네?”

- 하연이 친모 말입니다.

“네네?”

나는 스마트폰을 바짝 당겨 귀에 대었다.

- 우리가 찾은 거 같아요.

“진짜로요?”

- 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하연이를 진형 씨에게 맡긴 시점이라던가 나이. 그리고 뭣보다 이름이 같아요.

이럴 수가.

지금까지 하연이의 친모인 이혜미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더랬다.

아니, 그렇잖은가.

뭣 하러 그녀에 대해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로 소중한 일상을 낭비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그녀를 찾았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녀를 찾고 싶다고 했던 건 분명 나였다.

‘안발렌티나 수녀님은 이런 친모 찾기 프로젝트가 있다고 제안을 해주셨던 것뿐이고.’

그러니 수녀님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즉시 성당을 찾았다.

수녀님은 말없이 내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손 편지.

이혜미의 필체를 본 적은 없기에 이것이 그녀가 직접 쓴 것인지. 내가 아는 이혜미가 쓴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편지 안에는 미안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이를 버린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아이가 보고 싶지만, 스스로가 부끄러워 도무지 찾을 생각을 못 했다는 내용.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편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덜너덜하게 구겨진 편지.

수녀님이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형 씨..”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답니까?”

“지금 여기 와 있어요.”

“여기에요?”

수녀 님는 친모를 찾아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녀와 연락이 닿았고, 오갈 데 없던 그녀는 현재 이곳에서 도움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랬다.

여기 온 지는 아직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만나보시렵니까?”

수녀님의 말에 나는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는 한번. 얼굴 보고 만나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제대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대체 어떤 낯짝으로 나를 볼 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당사자의 입으로 듣고 싶었으니까.

수녀님을 알겠다면서 자리를 비웠고 나는 홀로 사무실에 남겨졌다.

오래지 않아.

수녀님이 이혜미를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나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아는 이혜미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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