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국힙원탑 94화
핫레스트의 매니저인 지미 킹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어?”
하지만 핫레스트의 리더인 우드게이트는 완고했다.
“저쪽은 이제 겨우 3살이라고. 어른인 우리가 직접 오는 게 맞지.”
“하아. 난 잘 모르겠다. 그 꼬맹이가 그처럼 대단한 존재인가는.”
“하하.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아. 저기 있네.”
그는 손을 흔드는 한 여성을 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미스 김.”
“2년 만의 내한이네요. 반가워요.”
“그동안 더 예뻐지셨는데요?”
“하하. 고마워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여긴 서둘러 빠져나가실까요?”
“그러죠.”
극비리에 방문한 이들이었지만 이미 몇몇 팬들이 그들의 존재를 깨닫고는 스마트폰을 들이대고 있었다.
“뭐야뭐야? 저기 핫레스트아냐?”
“어? 진짜네? 와! 우드게이트! 이쪽 좀 봐주세요!”
“우드게이트라고? 진짜다, 진짜야!”
핫레스트 멤버들은 가볍게 손을 흔든 채 김선정을 따라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준비된 대형 밴에 탑승했다.
킹이 내부를 슬쩍 보더니 불만 섞인 시선으로 말했다.
“베이비는 안 왔나요?”
“아. 그녀는 지금 어린이집에 갔거든요.”
어린이집이라는 말에 킹을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보였다.
“하하. 우리가 만날 친구가 진짜 꼬마는 꼬마네.”
“암. 어린이집을 빼먹을 순 없지.”
이윽고 그들을 태운 밴이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미끄러져 달렸다.
멤버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감격에 젖은 듯 말했다.
“한국에 오는 건 늘 설레네.”
“맞아. 한국 팬들은 진짜 다르잖아?”
“그래. 아직도 그땔 생각하니까 소름이 다 돋네. 별로 안 유명한 노래도 다 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을 부르더라니깐?”
그 말을 들은 김선정이 빙그레 웃었다.
해외 아티스트들은 유독 한국의 떼창 문화를 좋아했다. 열광적인 반응에 희열을 느낀다고나 할까? 비영어권 국가의 팬들이 단체로 영어 가사를 읊는 게 낯선 한편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과거 이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안면을 튼 김선정은 김진형의 전화를 받고는 자발적으로 나섰다.
핫레스트의 가이드를 자처한 것.
영어도 잘 하고, 김하연과 핫레스트를 동시에 알고 있는 그녀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에 제격이었다.
‘핫레스트가 극비리에 내한을 결심할 정도로 김하연에게 푹 빠졌다니. 정말 엄청난 기삿거리야.’
하지만 그녀는 묵혀둠의 미학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터트리는 것보다 두 아티스트 간의 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슬쩍 외부에 흘리는 게 훨씬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한국에 온 것은 지금 그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단독 기사를 딸 수 있는 찬스였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한 고급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 측에서 핫레스트의 비밀 내한을 배려하여 뒷문을 알려주었고, 김선정은 여기서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김선정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김선정 기자님?”
“네. 제가 김선정입니다. 그럼 정성수 차장님?”
“네. 한신 그룹 정성수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뭘요. 한신 그룹에서 핫레스트의 방문을 이리도 환영해주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 다 하연이 좋으라고 하는 일이니까요. 그럼 이쪽으로.”
김진형은 김선정에게 정성수를 연결해 주었다.
핫레스트가 한국에 있을 동안 여기에 머물면 좋을 거라면서 말이다.
‘한신 그룹하고 김진형은 무슨 사이지? 호텔 광고를 찍은 건 알고 있지만.’
그녀는 문득 김진형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하연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을 나섰다.
핫레스트가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해외 뮤지션인 핫레스트를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떨려온다.
한신 호텔에 도착한 나는 로비에서 정성수 차장님을 만났다.
“차장님.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유명 인사가 방문하면 호텔도 덕을 보고요.”
“그래서 지금 그들은 어디에?”
“따라오시죠.”
그는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카드를 단말기에 대었다.
그러자 아무런 층수도 표시되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몇 층으로 가는 건가요?”
“40층입니다.”
“40층이요? 여기에는 38층까지 밖에 없는걸요?”
“VVIP만 묵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발리에서 비밀의 방도 그렇고. 호텔이란 알면 알수록 신기한 곳이 많았다.
40층에 도착한 우리는 복도를 따라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는 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하연이의 옷도 정리해주었다.
오늘 하연이는 예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왔다.
유주가 오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선물해준 옷이다.
나는 하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웅! 아빠도오.”
하하. 그래.
방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간이 눈에 띈다.
도대체 방이 몇 개인지.
발리에서 나와 하연이가 묵었던 객실이 떠오를 정도로 화려하고 커다란 실내.
이내 TV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핫레스트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해리 우드게이트였다.
나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와우. 우드게이트!”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쪽으로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스터 킴?”
“땡큐 포 비짓팅 코리아.”
나와 악수한 그는 내 옆에 있던 하연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선 무릎을 구부린다.
“네가 하욘이구나?”
우리는 자리를 옮겨 거실에 마련된 대리석 테이블에 착석했다.
김선정 기자가 통역을 도와주었다.
자신을 핫레스트의 매니저라고 소개한 킹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는 내게 들이밀었다.
“이번 콜라보 관련 계약서입니다. 시간 나실 때 확인해보시죠.”
“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내 핫레스트 멤버들이 하연이에게 관심을 표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진짜로 3살 맞니?”
“노래는 언제부터 부른 거야?”
“우리는 알아? 혹시 영어도 할 수 있니?”
하연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 그저 방긋거리기만 했다.
킹은 내게 구체적인 계약 내용에 대해 알려주었다.
“우리가 또 여기 오기란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일주일 안에 녹음을 마치고 우린 떠날 겁니다. 그 사이에 신곡을 완성해야 하죠.”
“네. 그건 우드게이트가 보낸 메일에서 확인했습니다. 곡 자체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곡은 이미 있고, 가사는 아직 만들지 않았습니다. 빨리 가사를 만든 다음 녹음을 진행해야겠죠.”
“혹시 지금 이 자리에서 곡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하더니 우드게이트가 직접 작곡했다는 곡을 틀어주었다.
감각적인 전자음을 시작으로 비트가 강한 팝 음악이 연주되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음악을 모두 들은 나는 우드게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네요. 진짜.”
그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씨익 웃더니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런데 하연이가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아빠아. 이거어 내가 카사르을 만들고 시포요.”
응? 네가?
평소 작곡은 물론이고 작사까지 직접 하는 하연이였지만 남의 노래를 듣자마자 자기가 작사하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다.
김선정은 곧바로 이를 통역해주었고, 핫레스트 멤버들은 놀랍다는 얼굴로 하연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가 작사를 직접 하고 싶다고?”
“뭐야? 가사도 쓸 수 있는 거야?”
“꼬마야. 진심으로 한 소리니?”
우드게이트는 하연이의 아빠인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전 곡들도 이 친구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지금까지 총 3곡을 발표했는데 모두 제 딸이 직접 만든 노래예요.”
“대단하네요. 저도 한국에 오면서 한국어 가사가 일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영어로도 만들 수 있는 걸까요? 물론 한국어로 만든 다음에 영어로 번역할 순 있겠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문장의 길이나 어감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이 맞다. 하연이가 한국어로 된 가사를 만드는데 재능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이걸 번역하다 보면 무언가 느낌이 바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 된 소설이 외국에서 통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다.
‘한국어만의 고유한 감성과 감각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서 그랬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하연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했고, 결국 우리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저희가 한국에 있을 기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일단은 하연이는 하연이대로 가사를 쓰고, 저희도 저희가 따로 가사를 준비할게요. 봐서 적절히 조합하든가 하면 되겠죠.”
좋은 생각이다.
가사를 쓸 수 있는 기간은 단 3일. 이후에는 녹음에 들어가야 했다.
뮤직비디오는 곡을 만든 다음 추후 다시 찍기로 했고.
우드게이트는 이 말을 강조했다.
“저는 이 곡을 만들면서 결국 우린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인종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결국 다 똑같은 인간이란 점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메모 앱을 켜서 이걸 기록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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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하연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가사를 만드는데 열을 올렸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하연이는 쉽게 쉽게 가사를 만들어내곤 했다.
이번에도 부디 좋은 가사를 만들어내길 희망하며 나는 과일을 잘라 하연이 방에 가져다주었다.
“하연아. 이거 먹고 해.”
하지만 하연이는 작사에 빠져들었는지 방에 누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아이패드에 가사를 쓰기 바쁘다.
삐뚤빼뚤 흘려 쓰는 글씨체.
하지만 맞춤법은 모두 제대로 지키는 데다가 저게 4살 꼬마가 쓰는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현력이 대단하다.
나는 과일을 하연이 책상에 올려주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하연이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얼마 뒤 유주가 방문했다.
유주는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하연이는?”
“지금 방에 있어. 가사 쓰고 있으니까 방해하면 안 돼.”
“가사?”
유주가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대단하다. 하연이가 직접 작사하기로 했다고?”
“일단은 각자 가사를 만들어서 나중에 비교하기로 했어. 잘되면 일부 한국어 가사는 하연이가 만든 부분에서 차용하지 않겠어?”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유주는 두 손을 맞잡고는 진심으로 그리되길 빌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유주야.”
“응.”
“너도 광고 찍어야지.”
“뭐?”
“얼마 전에 청룡 음료에서 너한테 CF 광고 제안 들어왔다는 건 들었지?”
“응. 네가 직접 이야기해줬잖아?”
“그래. 나는 이거 한번 진행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넌 어때?”
유주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평범한 일반인인데. 그래도 괜찮을까?”
“유튜브를 시작한 시점에서 일반인이라고만 하기는 어렵지.”
“솔직히 두려워.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그들이 제안한 내용은 이랬다.
유주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처럼 이상한..아니. 춤을 추고는 마지막 부분에 음료를 마신다. 그리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게 다였다.
‘크게 연기가 필요한 부분은 많지 않으니까. 해볼 만한데 말이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나도 최근에 하연이랑 TV 광고 하나 찍었잖아?”
“한신 호텔&리조트?”
“응. 처음엔 엄청 긴장했었어. 과연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지.”
“그런데?”
“막상 찍으니까 별거 없더라. 전문가분들이 다 알려주시고, 그냥 평소처럼만 하면 됐어.”
“평소처럼?”
“어. 그냥 하연이랑 어디 좋은 데 놀러 온 것처럼. 너도 평소에 하듯이 편하게 춤을 추고, 음료수를 마신 뒤 깜짝 놀란 얼굴을 보여주면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거야.”
“진짜, 그럴까?”
아무렴. 넌 누구보다 예쁘고 당당한. 내 여자친구니까.
유주는 알겠다며 용기를 냈다.
“좋았어. 진형아. 나 한번 해볼게. 너만 믿으면 되지?”
“오케이! 청룡 음료에 메일은 우리가 보낼게. 너는 우리 소속 방송인이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유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머리를 숙였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야 말로요.”
하연이뿐만 아니라 유주까지 뻥 터트려보자. 그래서 곰도리형제단이 단순히 영상 제작만 하는 곳이 아니라 연예 기획과 MCN도 함께 하는 곳이라는 걸 강렬히 어필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