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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국힙원탑-93화 (93/135)

내 딸은 국힙원탑 93화

요즘은 내가 직접 하연이 채널의 이메일을 확인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하연이는 우리 곰도리형제단 소속의 연예인이 되었고, HiYeom하연 채널의 관리 역시 곰도리형제단의 몫이었으니 말이다.

모두가 미래 그룹 홍보 영상 편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때.

김소라가 꺄아!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김 과장님.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우상. 핫! 핫레스트가아!!”

“네?”

“하연이한테 콜라보를 제안했어요!!”

핫레스트?

그거 영국의 유명 록 밴드 아닌가?

개인적으로 국내 가수 중 가장 좋아하는 이가 이하연이었다면 해외 가수 중 최고는 핫레스트였다.

록 밴드였지만, 록(Rock)보다는 팝(Pop) 느낌이 더 강한 그들의 음악은 매 앨범마다 진화를 거듭한달까?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고 변화해갔다.

그것도 절대 나쁜 방향이 아니라 정말 이들이 왜 세계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그런데 이들의 협업 제안이라니?

나는 즉시 지메일 계정으로 로그인한 다음 메일을 살폈다.

무려 3천 자가 넘는 글인데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 급의 뮤지션이라면 조금 오만해져도 괜찮을 텐데. 뮤지션 대 뮤지션의 자세로 ‘어떤 두 사람’에 대한 칭찬으로 빼곡하게 쓰인 메일.

잘 모르는 단어들이 있었지만 그건 구글 번역의 힘을 빌려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김소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김 과장님.”

“네, 사장님!”

“이거 진짜일까요? 장난이 아니라?”

“저도 설마 싶어서 확인해봤는데 진짜 우드게이트가 보낸 메일이 맞아요! 전화번호도 적혀 있는데 한번 전화를 걸어볼까요?”

전화번호라.

거긴 지금 새벽일 테니까 지금 전화를 거는 건 민폐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긴 새벽이기도 하고. 당사자인 하연이한테도 물어봐야 하니까 이건 잠깐 보류해두시죠.”

“아, 네네, 사장님. 와. 대박. 이거 진짜 꿈이 아니죠? 몇 번을 봐도 못 믿겠어요!”

그러자 그녀의 옆에 앉은 오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뺨 꼬집어 드릴까요?”

“뭐?”

“제가 손힘이 제법 있거든요. 꿈인지 생시인지 궁금할 땐 언제든 이용해주세요. 호호.”

김소라는 언제부터인지 후배들의 밥이 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지인데.

놀랍게도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뱉고는 말았다.

“흥. 세영 씨 두고 봐. 나중에 사장님 같은 사람 못 되면 내가 평생 괴롭혀줄 거야.”

“에이. 사장님은 그래도 너무 기준이 높은 거 아닌가요? 저는 손가락 힘만 세지 팔 힘은 약해서 다섯 사람이나 구하는 건 무리라고요.”

그나저나 미래 그룹 홍보 영상은 다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큰돈을 받고 제작하는 TV 광고인만큼 후반작업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했으니까 말이다.

어색한 부분은 모두 쳐내고, 보정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 마감 기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열심히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하고 퇴근하니.

유주가 하연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어서 와. 오늘도 수고했어.”

“아빠아아!”

하연이가 내 품에 와락 안겨 애교를 부린다.

원래 나랑 하원 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유주랑 하원하면서는 유독 더 집에 와서 이러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좋았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저녁을 차려주고는 슬쩍 이야기를 던졌다.

“하연아. 너 혹시 영국의 핫레스트라는 록 밴드 아니?”

“하앗 레스트으?”

“응. 지금 한국에선 하연이가 제일 잘 나가잖아? 세계로 무대를 확장하면 핫레스트가 뮤지션 중에서는 최고거든.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기도 하고.”

하연이는 두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 아라요오! 아라아라!!”

따로 노래를 들려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연이는 정말 모르는 게 없다.

“다행이네. 그쪽에서 하연이 너랑 협업하고 싶다고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거든. 어떨 거 같아?”

“혀버어업??”

옆에 있던 유주도 놀랍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핫레스트가. 하연이한테 협업을 제안했다고?”

“응. 어젯밤에 보낸 것 같은데, 아직 답장은 하지 않았어.”

그러자 유주가 하연이를 돌아보며 강하게 외쳤다.

“하연아. 이거 무조건 하자! 무조건 해야 하는 거야!! 핫레스트라니! 말도 안 돼!”

사실 나도 유주와 같은 입장이다.

천하의 핫레스트잖아.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하연이가 싫다고 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당사자가 싫다는 걸 억지로 우겨서 할 순 없었으니까.

하연이는 잠시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보고오 시포요.”

“응? 뭐가? 핫레스트가?”

“아니이이. 이메이일.”

“아. 잠시만. 따로 출력해 올게.”

나는 즉시 윗방으로 올라가 그들이 보낸 메일을 프린터로 출력했다.

A4로 뽑았더니 무려 10장이 넘는 문서.

나는 먼저 영어로 읽어준 다음 이걸 하나하나 번역해주었다.

하연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면서 열심히 내 설명을 들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눈은 출력한 문서를 보고 있었고.

“그래. 어떤 거 같아?”

“차카다아.”

“착하다고? 이게?”

“웅. 이거 쓴 사라안. 차케.”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긴 이렇게도 정중하고 우아한 문장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성도 좋은 사람일 것이다.

왜 글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럼 하연이는 핫레스트랑 협업하는 거 찬성이야?”

하지만 하연이는 대뜸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뮤딕 비디이오에 똑가치 나오면어언.”

응? 그게 무슨 뜻이지?

나와 유주는 둘 다 멍한 얼굴로 하연이를 바라보았다.

도통 우리 하연이의 머릿속에선 무슨 생각이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이라 그런지 핫레스트가 누군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

고민이 많았다.

전생에도 그들에게서 이렇게 협업을 제안받은 경우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핫레스트는 나 역시도 가장 좋아하는 록 밴드 중 하나였다.

아니. 그들은 내 마음속 원탑이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정중하게 협업을 제안하긴 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들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들은 세계적인 거장이었다.

반면 나는 이제야 한국에서 조금 주목받는 신인 뮤지션이고.

전생의 이하연이었다고 하더라도 세계적인 인지도에 있어서는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좋다고 받아들였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끝나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어린 꼬마가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한 사람의 뮤지션으로서 당당히 대접받고 싶어.’

이번 ‘어떤 두 사람’의 뮤직비디오도 그런 연유로 카메라의 포커싱을 내게만 맞추지 않고, 출연자 모두를 골고루 담지 않았던가.

그래서 고심 끝에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오 그들이라앙 또가치 나올래에.”

“뭐를?”

“뮤지익 비디오에.”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다. 그들이 진짜로 나와 협업하고 싶다면. 적어도 뮤직비디오에서만큼은 그들과 동등한 분량을 보장받고 싶다고.

만약 그들이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건 단순히 나를 먼 동양의 작은 꼬마 아이 정도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뮤지션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빠는 당황스럽다며 입을 뗐다.

“너무 무리한 요구이지 않을까?”

“노우! 이게에 안되며은. 안 할래요오.”

아빠는 마지못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내일 회사에 출근해서 영어를 잘하는 직원에게 답 메일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전생에도 내게 협업을 제안한 가수들은 많았다.

고민 끝에 수락하면 그들은 내 명성과 인기를 무기 삼아 과도한 마케팅과 무리한 출연 제안을 일삼은 적이 많았다.

나도 내 스케줄이 있는데. 제발 자신들과 함께 방송에 나와달라면서 애원하는데 당시 매니저가 고생이 많았더랬다.

물론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핫레스트는 나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이들이고, 적어도 내 인기를 노리고 협업을 제안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들에게는 내가 그저 동양의 먼 나라에 있는 신비로운 꼬마 아이로만 비칠지도 모르니까.

뮤지션이란 언제나 늘 새로운 아이템에 목마른 존재다.

그러니 이번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내 뮤직비디오를 보고는 ‘쟤, 괜찮지 않겠어?’ 하는 마음가짐으로 메일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빠가 출력한 이메일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조금 가시긴 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게 좋다지 않나.

그들의 제안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금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의 확인이 필요했다.

#

정성수는 최근 하연아빠TV의 특이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어쩌다 한 번씩 등장하던 신유주가. 요즘은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연이의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둘이 사귀는 건가?’

가만히 보면 둘 다 선남선녀에 얼핏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전화해서 살짝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이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한때는 이세미를 그와 한번 엮어보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게 이제는 불가능해진 것 같아 조금 아쉬울 뿐.

그나저나 요즘 이세미는 한신 그룹 돌풍의 핵이었다.

계륵 같았던 호텔&리조트 분야를 맡더니 눈에 띄게 높은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었으니까.

그뿐인가?

인천공항 면세점에 추가 입점을 성공시킨 데 이어 명품 브랜드까지 유치하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 사업부를 개편하여 조직을 새롭게 재정비하는 등 놀라운 경영수완을 자랑했다.

‘그저 멋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미래에는 그녀가 회장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연아빠TV에 올라온 고기국수 레시피를 반복해서 보았다.

요즘 들어 요리에 관심이 생겼달까. 김진형이 자주 요리 레시피 영상을 올리니까 자신도 흥미가 생겼다.

그는 아이패드로 김진형이 올린 고기국수 레시피를 천천히 따라 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먹어줄 여잔 어디 없나.”

이제 내일모레면 자신도 마흔이다.

지금까지는 일에 빠져 살면서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슬슬 옆구리가 허전하다고 생각하던 그였다.

그의 바로 옆에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

우드게이트는 상대가 언제 답을 줄까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하연은 정말이지 뮤즈의 환생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보물을 왜 이제야 발견하게 되었던 걸까.

그는 밤새 새로고침을 하며 지메일을 들락거렸지만, 그들에게선 답이 없었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겨우 잠이 들 수 있었고, 늦은 오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켰고 지메일에 로그인했다.

하지만 상대로부터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조금 괘씸하기도 하고, 애가 타기도 하고.

그런데 다음날.

상대로부터 메일이 왔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메일 내용을 확인하였다.

메일을 다 읽은 그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으하하하하. 진짜 장난 아니네.”

우드게이트의 집에 놀러 왔던 베이스 기타의 프랭크 롭슨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너 미쳤어?”

“하하. 너도 이거 읽어 봐. 그럼 내가 왜 웃는지 알게 될 테니까.”

롭슨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메일 내용을 확인하였고 쓴웃음을 지었다.

“헤에. 만만찮은 꼬마네?”

“그렇지? 뮤직비디오에 우리랑 동등한 분량으로 출연하고 싶다고 말할 줄이야. 아주 당차고 영리해.”

“그래서. 리더, 네 생각은 어떤데?”

“당연히 응해줘야지.”

“그렇겠지? 원래 이 꼬마랑 콜라보하면 너 역시 그럴 생각이었잖아?”

“그래.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각국의 뮤지션은 각자 존중받아야 마땅해. 그래서 나도 정중하게 메일을 보낸 건데 이렇게 당당히 요구하니까 오히려 고맙네.”

“그러게. 상대가 너무 저자세로 나오면 우리가 부담스러운데 말이야.”

“오케이. 다른 멤버들한테도 문자 보내서 의사를 물어봐야겠다.”

“그건 내가 보낼게. 잠시만.”

오래지 않아 다른 멤버들에게 답이 왔다.

당장 그렇게 하자고. 이 보물을 절대로 놓치지 말자고.

우드게이트는 다시금 키보드 위에 자신의 커다란 손을 올려놓았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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